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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
Subject   개혁주의 문화관 - 김영규
개혁주의 문화관 - 김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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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문화관

김영규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강의안

창1:26,28에 의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는 당장의 목적은 인간이 그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이런 지배가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이거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 형상의 전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발적이거나 사소한 가미(加味)가 아니다.

그 반대로 이런 지배와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창조와의 그런 밀접한 관계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이런 지배 속에서 표현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가운데서 형상의 내용을 더 많이 나타내고 밝혀져야 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첫 부부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을 축복하여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창1:28)고 하였고, 아담에게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는 특별한 일을 주셨다(창2:15).

이처럼 인간은 놀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은 이미 얻은 명예에 만족하고, 영광의 자리에 앉아 쉬도록 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말과 뜻의 능력 아래 넓은 세계를 다스리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는 넓은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에게 땅에서의 크고 넓으며 풍부한 과업이 주어졌다. 수세기 동안의 노력이 드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가 끝까지 추구해 나가야할 까마득한 먼 길이 그에게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류로 말미암아 땅끝까지 퍼져 나가야 하고 인간의 손의 모든 사역들 위에 새겨져야 한다. 인간은 땅을 경작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하나님의 속성의 계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땅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이 부름을 받은 가장 가까운 목적이지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이런 모든 활동은 인간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의 모든 산업 위에 하나님의 영의 인(印)을 찍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께 돌아간다(롬11:36).
생각도 없이 계획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단지 일하기만 하는 것은 소망이 없고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무가치한 것이다. 인간의 창조 때에 그가 일하기로 부름을 입었을 때 그것은 그 자신과 그로부터 나올 인류는 이 일을 마친 후에 안식에 들어갈 것임을 의미한다.

7일 이라는 일주일의 제정은 이런 생각을 확증하고 강화한다. 창조의 사역에서의 신적 모범에서처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도 일정한 목적을 향하여 가는 사역을 갖는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가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변치도 않고 단조로이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같지 않다. 그는 그의 일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생각하면서 의도하고 일하는 존재이며 그의 일에서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을 찾고 마지막에 가서 그 손수한 일을 보고 기뻐하는 존재이다. 안식일로 끝나는 6일, 주일은 인간의 사역을 고귀하게 하고 혼이 없이 자연의 단조로운 운동에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높이고 거기에 신적 소명의 날인을 한다. 그러므로 주의 목적하신 바에 따라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심같이 동일한 방식에서 자기 일에 쉰다(히4:10). 이런 경우가 단지 한 사람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인류에게 타당하다. 세계 역사 세계안식이 따르는 자신의 세계사역을 갖는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아직 한 안식이 남아 있다. 각 안식일은 그 안식의 예표요 표징이며 동시에 보증이다(히4: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주로 바르게 인식하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그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영원한 축복 가운데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말은 정당하다.

인간의 마지막 운명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최종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는 첫째로 땅에서 그의 소명을 성취해야 한다. 하늘에 이르는 길은 땅을 지나 땅위로 가는데 있다. 안식에 들어가는 입구는 6일 동안의 노동을 통하여 열린다.

* 일반종교와 과학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칼빈의 정신과 같이 문화적 관조주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는 종교성이나 다른 종교들 및 과학에 대한 태도는 칼빈의 방식이 어느 정도 해결책이다. 일반계시에 대해서 화란의 신칼빈주의 신학이나 다른 문화적 적극주의보다 칼빈 자신의 태도와 같은 문화적 관조주의가 더 좋을 것같다. 이는 문화적 적극주의가 문화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고 그렇다고 문화적 방관주의나 문화적 관용주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을 계속 계시하신다는 입장으로 그 관조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데 두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 관조주의의 경우, 잘못된 것을 분명히 고백으로 표현하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관조하는 자는 전 삶을 통하여 마치 순례자, 나그네, 외인처럼 땅에서의 삶과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는 적극적으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로 나타나고, 소극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 곤비한 자, 순교자로서 살아 갈려는 태도가 거기에 나타난다. 동시에 사회의 변화와 소동에 특별히 민감하고 적극적이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화적 관조주의를 태도를 견지할 때, 이데올로기가 신학을 대치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사려된다. 즉, 우리는 올바른 신학적 분별력을 회복하여 영적인 사안이 문화적인 사안으로, 문화적인 사안이 정치적인 사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역시 20세기에서처럼 21세기에도 교회가 문화활동과 사회참여에 얼마나 적극적일 수 있느냐가 늘 문제가 될 것이다. 적극적 문화관에 있어서 신칼빈주의는 너무 지나쳐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방세계에도 있었다는 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확인되듯이 우리의 신접자들(무당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주장을 허용하거나 그에 대한 반박할 힘이 약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통 장로교 개혁주의의 유산인 하나님의 뜻으로서 다양한 ‘도덕법’에 의해서 적극적 문화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칼빈의 종교 개혁적 원리인 율법의 제 3사용으로서 중생한 신자들도 율법을 경건과 바르게 사는 규범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원리로서만이 아니다. 이 법은 즉 성경에 명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서 동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법으로서 따라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영원한 법으로서 요구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안식일이요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세속문화에도 그 법이 유효한 법을 가리킨다. 또한, 안식년 제도는 고용제도와 실업문제, 휴가문화를 창출하는데 내적인 원리로서 사용될 수 있다. 일부일처제도 그런 법에 속한다.

새로운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사회를 기독교 문화화하는 기틀이다. 예를들어 국가지도자나 위정자의 선거에 있어서, 입후보자의 자격요건으로서 자랄 때의 도덕적 청결함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요구함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운동으로서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분위기와 가정과 청소년 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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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13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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