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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
Subject   자크 엘룰의 사상 /송광택

  
 자크 엘룰의 사상  논문  2006/02/23 15:00

  http://blog.naver.com/jungunlee7/140022037012
 

 

  
송광택

들어가는 말
쟈크 엘룰은 1912년 보르도 출생하였고,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했다.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하였으며, 1953년부터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법학 박사인 그는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보르도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의 편집 주간으로 최근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하였다.



1. 쟈크 엘룰의 생애



1) 청년 시기의 엘룰(1912-1936)
쟈크 엘룰은 1912년 1월 6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어머니(Marthe Mendès)는 개신교 프랑스인이었으나 부친(Joseph Ellul)은 이탈리아계의 세르비아 귀족 출신으로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다. 어린 시절의 매우 부유한 생활에 젖어 있던 부친이 프랑스에서 극도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사실은 독자였던 어린 쟈크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행복했던 추억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미술 강사로서 생계를 꾸몄고 아버지는 1929년이래 실직 상태였다. 엘룰은 16세부터 어학(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교습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때로는 가족 부양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는 1928년 보르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에는 보르도 법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법학을 한 것은 부친의 요구가 일차적이었고, 또 스스로도 법학이 직업을 얻어 줄 수 있는 학문이며 비교적 공부 기간도 짧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그에게 영향을 준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성경이었다. 그는 1930년 <자본론>을 읽고 하나의 세계관에 접했다. 이것은 당시 그의 가정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5개국어에 능통한 아버지가 실직한 채 직장을 찾아 헤매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자본론>을 읽었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느꼈다. 나는 결국 왜 나의 부친이 직업을 잃었는지, 왜 우리가 헐벗었는지를 알았다고 느꼈다." 또한 마르크스는 1930년 당대에 정치적으로 일고 있는 상황(파시즘과 나치즘)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했으나 이내 실망했고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 사이에 있는 괴리를 보았다. 그는 공산당과 결별하고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특히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실존적인 문제였다. 그는 성경을 통해-삶의 다른 수준에서-마르크스의 사회에 대한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1932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회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두 가지 것만을 말한다. 하나는 '돌발적인 회심'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회심'이 아니라는 것이다(이 말은 자신에게 찾아온 계시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그가 회심을 말하는 대목에서 파스칼을 언급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때부터 그는 성경과 자본론 사이에서, 예수와 마르크스 사이에서 갈등과 대립을 느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크스가 사회에 대해 말하고 경제와 세상의 불의에 대해 설명한 것들을 왜 포기해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이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을 거부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종합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매우 진지하게 취하는 한, 마르크스가 하나님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무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그리고 경제적 정치적 영역 외에 다른 모든 영역을 거부하는 한, 나는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체계화가 결코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 엘룰은 프랑스 개혁 교회에 몸을 담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었다. 얼마 동안 그는 칼빈의 사상에 몰두했으나 점차 키에르케고르와 칼 바르트에게로 넘어갔다. 비록 그가 칼빈과 같은 회심의 급진주의를 공유했지만 점차 칼빈 신학에게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느끼게 되었고, 칼빈과 같은 분석적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해석의 다양성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칼빈에게서 떼어놓게 된 것은 아마도 칼빈의 세계관이 마르크스의 세계관과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불편했던 것은 서로 똑같이 배타적이고 전체적인 두 사상가 앞에 직면해야 했던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둘 중 누구도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내 사상의 발전은 변증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르트는 엘룰의 지적 삶에 있어 마르크스 이후, 칼빈을 밀어내면서 두 번째로 큰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듯이 바르티안도 아니다. 이러는 사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비극의 시대가 도래하면서(1934.2.6.) 엘룰은 정치에 입문하였다.
엘룰과 그의 일생의 친구인 Bernard Charbonneau는 1930년대에 인격주의 운동에 매료되었다. 둘 다 Esprit지(誌)를 창간하면서 주창자였던 무니에(Emmanuel Mounier)와 함께 일했다.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려 한 이 운동은 19세기 부르주아지에 깊이 얽매인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또한 집단주의도 거부했다. 인간을 경제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영적 존재를 의미하는 인격으로 보고, 사회는 마땅히 이런 개성을 발전시키고 소외를 막는 쪽으로 짜여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람은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인격이 될 수 있다. 엘룰은 이 운동의 공동체와 집단체의 대립, 가까운 관계 그룹과 먼 관계 그룹 사이의 대립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 변화를 이룩함에 있어 신학과 전략의 차이는 엘룰로 하여금 1937년 이 운동과 결별하게 했다. 혁명적 영향을 갖는 운동을 형성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인들 사이에 배포되는 기관지만을 가질 것인가의 딜레마에서 엘룰의 행동적 성향은 무니에의 반발을 샀다.



2) 전쟁의 시기(1937-1947)



1937년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뒤, 엘룰은 영국 국적의 화란 태생인 Yvette Zensvelt와 결혼한다. 엘룰은 Montpellier에서 1년간 법학을 강의한 뒤 1938년 Strasbourg로 이적한다. 전쟁으로 인해 1939년 교수들과 학생들이 Clermont-Ferrand으로 자리를 옮겼고, 엘룰은 페텡(Marshal Pétain)에게 공개적인 반대를 함으로써 1940년 Vichy 정부에 의해 해고당했다. 그것은 패전 중에 알자스 학생들 편에 서서 페텡의 말을 믿지 말고 알자스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만일 돌아가면 독일 군대에게 차출될 것이라고 5-60명의 학생들 앞에서 말했고 누군가가 그것을 경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의 부친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보르도 근처의 Martres에 살던 가족에게로 돌아와 농부로 살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이 운동에 가담한 이유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자신은 해고당하고, 부친은 체포되었으며, 부인 역시 체포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룰은 maquis(레지스탕스의 한 운동)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지도자 없이 버려진 개신교 교회를 발견하고 이 개신교 농부들을 목양했으며 1943년엔 정규 예배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신학을 공부했는데, 1943년 그가 법학 교수 자격증 획득을 위해 제출한 논문 제목이 신학과 맞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부터 엘룰은 보르도 법대에서 비공식적으로 다시 강의를 했다.
해방 후 그는 보르도 시의회에 임명되었고 부시장으로 특히 무역과 공공 사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사회 경제적 조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은 그의 확신을 흐리게 했다. 그는 1947년 이 직분의 환멸을 느끼고 정치를 떠났다.



3) 강단의 시기(1947-1980)



엘룰은 본격적으로 대학교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강의했던 보르도 대학(1943-1980)과 보르도 정치학 연구소(1947-1980) 시절, 엘룰은 그의 전공과목들인 로마법, 제도의 역사와 사회학,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선전, 기술 사회 등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논문을 지도했고 적극적으로 학생들과 연루되었는데, 특히 1968년 학생 소요때 그는 중재자로 개입했다.
엘룰은 1945년에서 1955년까지 보르도에서 영화 클럽을 지도하면서 선정된 영화의 주제에 대해 토론을 이끌어 갔다. 1968년 이후 그는 환경 운동에 개입해 왔고, 특히 <아키텐 해안 보호 위원회> 회장으로 있는 기간동안 그는 정부의 개발 계획으로부터 보르도 근처 해안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들에 적극 참여했다.
4) 은퇴 후(1980- )
1980년 은퇴한 후, 엘룰은 글쓰기와 논문 지도(명예교수로서)에 전력했다. 그는 계속 교수 강연회에 참석하고, 특히 보르도 지역에서 자주 공개강좌를 연다. 그는 정기적인 성경 그룹을 인도하며 한 달에 한두번 설교한다.



2. 엘룰의 사상



엘룰의 책들은 사회학적이고 신학적인 두 범주로 나뉘도록 의도되었다. 마르크스 입장에 영향을 받은 사회학적 작품들은 현대사회의 삶의 형태를 지배하는 원리들을 관통한다. 먼저 칼빈에게서 이어서 칼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나타내는 신학 작품들은 현대 세계에 대한 성경 계시의 도전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엘룰은 조직신학자는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교리적 문제들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의 윤리적 중요성에 그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 성경 계시의 중심 축- 예수 그리스도



엘룰은 조직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결코 철학적으로 논증된 신앙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복잡한 신학 방법을 전개시키지 않는다.
엘룰의 신학적 탐구는 -그 자신의 확언에 의하면- 성경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신학적 연구들은 성경 본문들에 대한 직접적인 주해이다. 본문을 둘러싸고 구성되며 또 본문들을 유기적인 전체성(an organic totality)으로 함께 끌어당기는 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이다. 또한 엘룰이 신구약 성경을 철저한 기독교문서로서 그리고 신앙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자료로서 사용하는 것은 고전적인 개신교 원리인 '오직 성경'의 표이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동시에 성경적이다.
이런 시작에서 출발하여 그의 신학은 개혁파 기독교의 전통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곧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역사 속의 죄의 힘과 견고함,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나 역사를 포함하는 새 창조(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의 존재이다. 그런데 각각의 경우 주제가 의도되어 있고 그 주제는 현대 세계에 대한 심판이다.
2) 도시의 의미



엘룰은 그의 저서 <도시의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연구하는 가운데, 새 예루살렘이 도래할 때까지 도시(현대 세계에서는 '기술'과 동의어임)는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역의 상징이요 실재라고 주장한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최초의 도시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서 도시는 대응 창조(countercreation)로서,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안전 장소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도시의 참된 특징은 성경을 통한 바벨론(이해와 교제의 장소가 부족한 곳)이란 이름으로 예표된다. 그렇지만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그 거주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내적 정신인 도시 전체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모든 도시들의 정신은 그 자체의 자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 자체를 다른 도시들과 분리시킨다. 도시들은, 민족들과 문명국들처럼, 그 자신의 삶을 경영한다. 한 도시는 하나의 폐쇄된 세계이다. 더욱이 상업과 강압으로 다뤄질 경우, 도시는 인간관계들을 파괴한다.
그렇다고 도시가 전적으로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소돔은 파괴되지만, 니느웨는 회개하여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구원은 도시를 손안에 사로잡고 있는 영적 권세를 넘어뜨리는데 달려 있다. 한편 예루살렘은 특별한 경우이다. 다른 도시들처럼 이것도 대응 창조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거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비록 그가 도시를 저주하셨지만- 저주의 고통을 인정하며 그 도시가 소망 없이 있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에 대한 성경적 평가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은 도시의 영적 권세들을 정복하고, 궁극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도시는 소외의 장소이다. 전체로서 도시는 도시에 의존하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다. 도시는 도시의 일원들로 하여금 도시의 이익에 봉사하게 하는 필요의 질서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도시는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계속되기 위해서 보존의 질서에 속한다. 도시 없이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는 변증법적 성격을 갖는다. 도시는 파괴하나 또한 유지한다.
3) 소망



엘룰에 따르면, 도시가 기술 문명인 현대 세계는 인간 생활의 발전에 있어서 독특한 시기이다. 이것은 포기의 시대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는 밤의 적막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위기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는 그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기술 세계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교회는 무익한 장소이다. 주권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소망은 특별한 의미를 담당한다.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도전이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반박 청구이며, 언약 신학의 표현이다. 소망은 실제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간섭하도록 자극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소망이 없는 시대 속에서 소망을 갖는 그 자체는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응 실재이기 때문이다.
엘룰의 해석에 의하면, 이 세상의 질서 안에 있는 대응 실재로서의 기독교 소망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이다. 계시록의 첫 부분에서, 교회는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중재로 묘사된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 창조는 원창조에서 급진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다. 원 창조는 동산이었지만, 가인은 그것과 매우 다른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록 하나님은 자율적인 힘으로서의 도시를 저주했지만, 그는 역사를 모두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침묵하실 때에도, 역사 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새 창조에서 하나님은 도시를 보존하되, 그 성격과 방향을 바꿀 것이다. 반역의 작품이었던 것이 화해의 작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적인 동시에 재건적이다. 하지만 새 도시에서는 교회도 정치적 권위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고 끊임없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자유: 기독교적 삶의 형태
이 세상과 새 예루살렘의 중간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창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태도는 지상의 도시에 거는 기대에 불화하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교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 묘사이다. 그 출발점은 개인이지 사회 구조가 아니다. 창조적인 갱신의 가능성은 단지 개인에 머문다. 이 세상의 권력들과 새 창조의 가능성 사이의 투쟁점에 위치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 질서의 필요성에 대한 책임감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한편 하나님나라의 반대 질서를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이원론적이자 동시에 혁명적이다. 비록 그들이 두 도시에 속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신실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것이다.
엘룰에 따르면, 기독교적 삶의 형태의 근본적인 특색으로서의 자유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자의로 명백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그 자유는 양면성을 지닌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는 필요의 질서로부터와 이 세상 권력들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다. 엘룰은 일상 생활의 환경을 구성하는 제도적인 구조들(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구조들)과 체계적인 전체성으로의 구조에 노예화된 사람들을 붙들어 매는 힘과를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통해서, 이러한 힘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들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제도들은 더이상 우리 삶의 성격을 결정하거나 혹은 우리 행동의 필요성을 명령하지 못한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의 모든 생각에 종속된다. 나와 너 사이의 잃어버린 교제의 회복으로서의 사랑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이성에게 제기된다. 그 방향이 이웃의 필요에로 향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개인주의적이고 특수주의적이다.



5) 기도



엘룰의 저서 <기도와 현대인>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장에서 엘룰은 기도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를 다루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바로 인간 최대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5장은 기도가 전투임을 말한다. 기도는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전투이다. 기도는 소망의 행위이며 종말론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또한 사회참여 행위이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행위이다.
기도는 기도하기 싫어하는 본능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소비사회의 인생관과 가치관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종교적인 것들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비종교적인 기독교를 세우는 행위이다. 이단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지 못하게 만드는 요구이다. 기도를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기도는 다 반드시 종말론적이다. 기도는 우리를 이 시대의 끝에다 심어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기도에는 행동이 뒤따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기도이다. 행동이 기도의 시금석이 아니라 기도가 행동의 시금석이다.
엘룰은 기도가 본능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기도가 본능과 거스려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도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세상과 악과 싸우는 전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 "기도는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가 불가능한 자신과 싸우는 싸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과 돈
엘룰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돈이라는 용어가 경제학적인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돈을 소유한다'는 말은 "지출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 더 강하다. "돈을 벌고 쓰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경제작용이라고 하는 복잡한 구조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하나님이냐 돈이냐, 15쪽).
엘룰은 돈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돈의 유혹을 물리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쟈크 엘룰에 의하면, 아동교육에 있어서 돈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교육은 매우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어린아이가 학교에 갈 무렵이면 벌써 돈 문제에 부딪친다. 그는 아직 돈의 의미는 모르지만 그 유용성과 위력은 빨리 감지한다. 그는 아직 돈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지만 그 사용법에 대해서는 이미 감을 잡는다. 그리고 부모들의 태도로부터 돈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단계적으로 돈의 필요성과 거기에 수반되는 악을 동시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돈의 필요성과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 등을 쉽게 이해할 것이며 빨리 거기에 익숙해질 것이다. 반면에, 돈에 대한 교육을 단계적으로 받은 아이는 돈이 수반하는 악을 많이 줄일 수 있다."(같은 책, 154쪽)
엘룰에 의하면,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도 아이들에게 교육의 자료로서 가르쳐야 한다. 서로 많이 소유하려는 경쟁심, 사회적 불평등, 도둑질과 파업 등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설명해 주면 아이들은 돈의 현실과 동시에 돈의 위험도 알게 된다.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되, 돈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돈을 신뢰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엘룰에 의하면, "돈을 사용하는 어린아이는 그 돈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그것이 위험이다. 아이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자기 가족이 부유하면 그렇지 못한 친구들을 놀리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그때 가난한 집 아이들은 야욕과 원한을 품게 된다. 비싼 차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갖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경멸하게 된다." (같은 책,158쪽)
돈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치는 교육이 제구실을 하려면 아이를 위한 부모의 기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참으로 삶의 인도자이며, 하나님만이 돈을 지배할 능력과 아이를 사로잡힘에서 해방시킬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기도라야 한다. 인간을 사로잡힘에서 해방시키는 모든 행위에 우선되는 것이 바로 이 기도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돈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면 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중심적 관심사가 언제나 돈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돈 문제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쟈크 엘룰은 다음과 같이 발하고 있다: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돈 문제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얻으면 아이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성경적으로 보아 아이는 부모의 삶을 따라간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이 사실은 열 두 살 정도까지의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때까지의 아이들은 예외 없이 부모의 태도에 물질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받고 그대로 행동한다. 따라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돈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곧 아이의 태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겉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내적으로 돈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이들도 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먼저 부모의 구원을 입증하는 내적 행위가 중요하다."(같은 책,160쪽)
엘룰에 의하면, 우리가 돈에 중요성과 관심을 부여하지 않게 되면 돈도 중요성을 잃는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다른 것에 중요성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초연은 두려움과 고행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아이에게 돈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그에게서 돈을 빼앗거나 돈 없이 지내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다른 가치 체계가 그를 사로잡아 점차적으로 돈에서 멀어지도록 아이를 유도해야 한다.(같은 책, 163,164쪽).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주는 것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줄 물건과 대상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잡아끌거나 주도하는 증여는 피해야 한다. 아이 스스로 점차 증여의 필요성을 현실화하도록 하고, 그 구체적인 모양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도록 해야 한다. 한편, 이 증여는 아이의 진정한 희생을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잃은 것을 보상받으려는 의도적인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증여가 어려운 행위임을 알게 될 때 아이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어렵고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같은 책,165,166쪽)
엘룰에 의하면, 돈은 인간관계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자란 아이, 사람이 돈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쉽게 사귈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돈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권세를 꺾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돈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유일한 태도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게 돈을 쓰는 것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모으는 것도 모두 헛되다. 이런 자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취할 자세다."(같은 책, 172쪽)
그리고 "돈을 극복한다는 것은 돈을 가질 때나 가지지 않을 때나 삶의 자세가 변치 않으며 늘 하나님께 같은 헌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유한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재물에서 완전히 초연해져야 하니 말이다. 많은 부자들이 자기는 돈에서 초연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바울처럼 돈에 초연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이 말만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상 돈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들이다."(같은 책, 173쪽)



나가는 말
엘룰에게 있어서 신학의 중심 주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된다. 세상은 소외 상태에 있으나 궁극적으로 포기되지는 않는다. 때때로 불가능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투쟁의 목표는 바르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글라스 스텀(Douglas Sturm)에 의하면, 엘룰은 기독교 현실주의와 기독교 혁명이라는 양면적인 대의명분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한 마음으로 헌신했다는 점에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엘룰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의 예언자이다.
이 소고에서 엘룰의 사상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다양한 주제에 천착(穿鑿)하는 그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비록 쉽지 않은 사상가이지만, 현대 기독교를 향한 그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추적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번역 출간된 쟈크 엘룰의 저서들)



기도와 현대인(두레시대,1993)
도시의 의미(한국로고스연구원,1992)
뒤틀려진 기독교(대장간,1990)
법의 신학적 기초(대한기독교서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대장간,1992)
인간 예수(엠마오)
쟈크 엘룰 사상입문(솔로몬,1994)
폭력(현대사상사,1974)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두란노,1987)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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