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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교수
Subject   신국원의 문화이야기: 문화 전쟁 시대의 기독교 문화전략
http://www.neulsarangchurch.com/?document_srl=105039



신국원의 문화이야기: 문화 전쟁 시대의 기독교 문화전략

(신국원, IVP)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다시 말해,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가 차고 넘치는 문화의 홍수 시대이다. 그러므로 21세기는 문화 전쟁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화 전쟁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화의 길잡이 역활을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신국원의 문화이야기>이다. 이 책은 하나님으로부터 문화 사명을 받은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의 대중 문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기독교 문화를 일구어 나갈지를 개혁주의 입장에서 매우 잘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은 자칫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의 문화 이론들을 누구나 쉽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비판 정리한 제대로 된 문화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의를 개요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의 세기’ 또는 ‘문화 시대’의 현실을 살피고, 둘째,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셋째, 역사상 기독교가 문화에 대해 어떤 전략을 구사해 왔는지(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고찰)를 반성해보고, 넷째,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라고 알려진 전통에서 발전되어 온 기독교 문화론을 살펴보고, 다섯째로 앞의 논의들을 토대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화적 도전에 맞설 전략을 짜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한다. 그럼 먼저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해 보자.

 

제1장 현실 문화의 도전

 

한국은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대략 10년 단위로 산업화, 민주화, 자유화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적 관심의 폭도 경제, 정치, 문화의 순서로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문화 시대(90년대 이후에 도래한)를 살고 있다.

 

경제적인 안정으로 얻은 여가는 힘든 노동과 일을 대가로 얻은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힘든 직업의 여건으로 인해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휴식과 긴장 완화의 욕구는 더욱 늘어났다. “이런 욕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수고를 요구하지 않으며 값싼 오락을 제공하는 상업적 대중문화에 몰리게 한다.”(p. 26)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국에서 1990년대 이후에 대중문화의 활동과 생산,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60, 70년대의 산업화가 근로자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민주화를 주도한 학생(386세대)의 시대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의 신세대는 문화의 세대이다. 권위주의적 문화에 ‘화가 난’ 세대였던 이들은 권위적인 환경이 차츰 개선되어 가면서 새로운 문화를 구가하는 세대로 부상하였다. 문화 세대인 신세대들은 감성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즉 신세대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끼”로 존재하는 세대이다. 결국 감성을 중시하는 신세대는 대중문화의 주역이요 주된 소비자이다. (p. 33)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은 또한 ‘내 감각대로, 내 개성대로,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대’이다. 결국 이들의 주관심사는 개성과 다양성이다. (p. 34)

 

오늘날은 “문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문화 갈등의 시대이기도 하다. “문화전쟁(kulturkampt)이란 문화를 둘러싸고 계층이나 인종 또는 세대간의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을 말한다.”(p. 36) 한국에서도 영화 <거짓말>,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만화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탤런트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적 문화 운동은 동성애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문화적 상화 속에서 기독교의 반성과 개혁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오락적 상업 대중문화의 확산으로 인한 폐해 그리고 소위 ‘문화 전쟁’의 조짐과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오염된 대중 문화에 대한 건실한 비평이 필요하다.

 

문화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종의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통한 위기는 정치적 위기나 사상적 위협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직접적으로 종교적 위협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p. 50) 게다가 문화를 무시하면 무지한 반문화적 인간으로 매도될 수도 있기 때문에 대응이 쉽지가 않다. 또한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한 기독교 문화 이론과 궤변들도 문제이다. 기독교계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는 과거 문화에 집착하는 맹목적이고 폐쇄적인 보수주의를 낳고, 이러한 보수주의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어둡게 하고 그들의 반발을 초래한다. 결국 이러한 복합적인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건실한 기독교 문화 이론과 세계관의 정립이 필요하다.(p. 51) 그리고 기독교적 문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제2장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흔히 ‘인간 집단의 생활양식’으로 정의된다. 문화는 인간의 독특한 생존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고도의 의식적인 삶을 영위한다.”(p. 56) 인간은 지식을 추구하고 도구를 사용한다(Homo Sapiens, Homo Faber). 결국 이 말은 인간이 독특한 삶의 방식, 즉 문화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물론 거미나 벌도 정교하게 그물을 짜고 육각형 집을 짓는다. 하지만 동물들의 제작과 형성 행위는 본능적 행위이다. 새가 집을 짓고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는 일은 고도의 기술과 노력을 수반하는 일이긴 하지만, 문화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캐나다에 사는 비버들은 강에 댐을 만든다. 어떤 것은 규모나 정교함이 작은 저수지 둑에 못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캐나다 철도 회사인 CN에는 비버 댐 폭파반이 있다고 한다. 비버가 쌓은 댐이 홍수에 무너지면 범람을 일으킬 수 있기에 미리 폭파시키는 것이다. 비버가 만든 댐은 기능상 틀림없는 댐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비버는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화에 근접하는 개념인 사회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개미와 꿀벌은 역할 분담과 위계 질서까지 갖춘 탄탄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본능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그것이 자연적이지만은 않다는 데 있다.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삶의 양식인 문화에는 고도의 의식적 고려가 개입되기 때문에 다양한 양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물이 본능적으로 형성하는 군집 생활에는 다양성이 없다.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자연을 의식적으로 개발하고 통제하여 삶의 조건을 변화시켜 나간다. 이것은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잘 드러난다. 영어의 culture나 독일어의 kultur는 경작행위(cultivating)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colere와 명사 cultura에서 왔다. 또 여기서 파생된 단어들도 많다. 농업을 의미하는 agriculture는 땅(agros)과 문화(culture)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양봉은 벌(apus)과 문화라는 단어가 합성된 apiculture라 하고, 새(avis) 기르기는 aviculture라 한다. 손톱 가다듬기인 manicure와 발톱 가다듬기인 pedicure도 손을 뜻하는 manus와 pes에 문화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이 모든 단어들은 문화가 자연에 대한 의식적인 가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위의 내용들로 문화를 정의하자면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순화시키는 것과 그 성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강은 자연이고 운하는 문화이다. 숨쉬기는 식물과 동물도 수행하는 자연이고, 기공체조는 인간, 특히 동양 고유의 문화이다. 고함지르기는 자연적이지만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나 성악은 문화에 속한다.(p. 57)

 

결국 문화적인 존재인 인간이 살아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물과 공기(즉, 자연)처럼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제2의 환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의 정의를 확정해 주지는 않는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래서 영국의 문화 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문화는 영어에서 가장 복잡한 두세 가지 단어 중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문화 자체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문화의 개념을 대략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특정 시대나 집단의 특수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 (2) 그런 삶이 가능하게 하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 발전의 원칙으로서의 문화, (3) 높은 교양과 깊은 지식, 심미적으로 세련된 생활 등 고급 가치를 만들어 내는 행위나 실천의 결과로서의 문화가 그것이다.”(p. 59)

 

제3장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기독교와 문화의 갈등은 기독교가 등장한 이래 항상 있어 왔고, 세상이 현 상태로 존재하는 한 계속될 문제이다. 그래서 니버의 표현처럼 기독교와 문화의 긴장은 ‘영속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p. 92) 그런데 기독교와 세상 문화의 문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각자의 확신과 강조점에 따라 그 양상이 복잡해 진다. 즉, 낙태 문제, 안락사 문제, 사형제도 문제, 동성애자 성직자 안수 문제 등 시비가 명백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조차 기독교인들 안에서도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그래서 “니버는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문화관을 5개의 유형으로 분석하였다. 처음 두 유형은 서로 대조되는 극단적 입장으로 문화와 기독교가 서로를 배척하거나 아예 포함해 버리는 것이며, 나머지 세 유형은 이 둘을 종합해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p. 94)

 

첫째 유형: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그리스도와 문화가 서로 대립됨을 강조하는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는 문화를 포기 또는 배척하는 것을 충성된 신앙의 표시로 삼는 자세이다. 니버는 고대 교회에서는 터툴리안(“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냐?” “모순되므로 믿는다”), 근대에는 무교회주의를 고수하였던 박애주의자 톨스토이가 이 입장의 대표자라고 본다. 특별히 터툴리안은 반문화론의 대표자로 불린다. (p. 96)

 

둘째 유형: 문화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복음이 기존 문화와 사회가 열망하는 바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문화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문화를 해석하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위격에 일치된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를 문화의 영웅이요 이상의 실현자라고 생각한다. 니버는 헬라 철학과 신앙을 조합하려고 하였던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부류라고 보았다. (p. 101)

 

셋째 유형: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이 입장은 문화를 하위에 두고 기독교가 확고히 우위를 점하는 한 양자를 긍정하고 종합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독교와 문화 모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차이를 진지하게 이해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기 때문에 손쉬운 이원론적 배격이나 타협적 화합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니버는 이것을 문화에 대한 중립적 입장으로 분류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이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한다.

 

 

넷째 유형: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니버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상반된 권위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적 책임을 구별하지만 이를 결부시킬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종합론자와 일치하지만, 죄와 타락으로 인해 이 둘이 나뉜다고 보는 점에서는 종합론자와 다르다. 종합론자는 문화와 기독교가 본래 구분된다고 보지만, 이원론자는 그 구분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죄와 은총과 관계되어 생긴다고 본다. 즉 문화는 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기독교는 은총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p. 114)

 

다섯째 유형: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ransformer of Culture)

 

어거스틴에서 칼빈과 카이퍼로 이어지는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개혁주의는 문화를 창조의 소극적 보존이나 구속에 대한 준비라기보다 현재의 갱신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선한 세계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잘못되었고 이는 개혁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할 것이지 새 창조로 대체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은 구조의 타락이 아니라 방향의 타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입장은 현재의 세계 속에서 변혁을 시도하는 특징을 가진다. 문화는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방향이 왜곡된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p. 126)

 

제4장 개혁주의 문화론

 

개혁주의 신앙 전통에 서 있는 문화 변혁의 비전은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기본적인 골자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문화 이론가들은 “문화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계를 돌보며 발전시키는 사명의 준수라고 본다.”(p. 132)

 

흔히 문화 명령이라  불리는 창세기 1장 26-28절은 인간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일꾼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문화 명령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문화 명령은 자연을 돌보라는 말씀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정복하라”(카바쉬, subdue)와 ‘다스리라’(라다하, rule, have dominio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총괄하게 하셨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창세기 2장 15절에서 ‘다스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바드’(work, serve)는 일하고 봉사한다는 의미이며, ‘지키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샤마르’(keep, watch, preserve)는 지키고 보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정복이나 다스림도 결국은 ‘경작하고 돌보며 가꾸기’의 일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성경은 문화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 내고 발전시켜 온 자율적 기획의 산물이 아님을 보여 준다. 문화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순종에서 비롯된다.”(p. 136) 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인 동시에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소명이다(아브라함 카이퍼).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이한 능력인 생각, 직관, 느낌, 상상력, 솜씨를 발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개발함으로써 그 소명에 응답한다. 그러므로 “문화란 인간적 의도가 담긴 자연의 변형 또는 조작 행위와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온 모든 활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는 결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타락 이후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또 타락 이후 죄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 낸 고상한 처방전도 아니다.”(p. 137) 문화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에 대한 순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문화는 그 기원에 있어서 타락보다 앞서며, 그 본질상 타락의 파괴적 영향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망치고 종말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은 문화를 성취하는 능력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의 활동이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p. 137)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우주적 법칙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타락 이후에도 문화 명령도 유효하다. 이것은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19)는 명령을 주신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 명령은 이전의 문화 명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8장 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자연 질서가 유지될 것을 확언하셨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 많은 선한 것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문화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p. 138)

 

타락의 결과로 생긴 변화는 첫째, 문화가 자율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대신, 그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문화 전반과 예술은 우상 숭배나 신성모독적 쾌락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본래 문화가 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맡은 인간의 심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p. 138) 한마디로 말해, 타락의 결과는 인간의 자율성이다.

 

둘째, 문화의 대리인인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아 비뚤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문화에 미치는 죄의 영향은 ‘구조적’(structural) 이라기 보다는 ‘방향적’(directional)이며,  ‘존재론적’(ontological)이기보다는 ‘윤리적’(ethical) 이요, 궁극적으로는 ‘종교적’(religious) 이다.” (p. 139) 다시 말해, 죄로 인해 우주의 근본 구조가 변하거나 존재론적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방향과 윤리적 자세가 변했을 뿐이다. 그리고 문화의 타락은 인간의 변화된 마음의 방향과 윤리적 자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인간의 반역한 마음에 의해 문화가 오염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화 대신 하나님을 반역하는 찬양 문화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은 문화를 파기하지는 않았지만 의도되었던 방향을 완전히 왜곡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죄의 영향이 광범위하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구속의 영향 또한  그렇다.”(p. 140) 구속은 회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소극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인이 되게 하시어 인간 본래의 사명을 회복시키는데 있다. 또한 구속은 “삶의 바퀴를 바로잡는 일”(아브라함 카이퍼)이다. 앞바퀴가 비뚤어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핸들으르 바로 잡고 있어도 차가 똑바로 갈 수가 없다. 차가 바로가기 위해서 비뚤어진 바퀴를 바로 잡아야만 한다. 이처럼 구속돠 비뚤어진 우리 삶의 방향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으로 향하는 새로운 문화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구속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중생을 출발점으로 해서 성화를 거쳐 영화(롬8:28-30)로 나아간다.”(p. 141)  

 

구속의 결과로 창조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란 구원받아 변화된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p. 143) 하나님 나라는 지리적 공간적 의미보다는 주권적 의미가 더 강하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주권을 사단의 지배 아래로 넘겼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잃었던 주권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의 원리가 철저하게 나타나는 곳에 임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철저하게 인정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뜻이 실천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천국이 이루어 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들어지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일부요, 회복된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구속적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한다. 구속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회피적이거나 명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세상을 회복하고 문화를 변혁하는 신앙으로 살아간다. “타락한 문화와 사회는 변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연구하고 공부해서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아 가야 한다. 아울러 자신과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만들어 가려는 헌신적 노력이 필요하다.”(p. 146) 지금까지 말한 것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문화 비전의 골격이다.

 

제5장 문화 전략의 방향 모색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가 그 사회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형성해 놓은 요소들조차도 무차별하게 모방하고 수용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제는 미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장점은 수용하되 우리 나름의 고유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할 수만 있다면 한국 기독교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개발하여 기독교 진리를 문화를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의 향락적 문화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파괴적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둘째, 세상 문화에 만연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문하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가장 단순한 해법은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하나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여러 방식일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그것의 규범적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이 상대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도 분명한 방향 감각을 가질 수 있어햐 한다. 바른 문화는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pp. 185-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 전략은 이러한 확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넷째, 기독교 가정을 포함한 신앙 공동체의 문화적 영향력과 그 역활을 강화해야 하며, 기독교 공동체는 평이할지라도 진실한 신앙적 관점에서 비평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가정과 교회가 잘못된 문화를 걸러 내고 건전한 문화를 향유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기독교 문화 전략의 기지 역활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다섯째, 가정과 교회가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문화 개혁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시민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문화의 소비자인 시민들이 주도하는 소위 문화 소비자 운동이 문화 변혁에는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

 

일곱째로 이러한 연구를 통해 얻은 통찰과 방향을 어떻게 일상의 문화 환경 속에 적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요약한 내용들을 통해 이 책은 신학적 철학적 바탕에서 문화 일반과 한국 문화를 진단하고 개혁주의 문화론에 입각하여 이 시대의 문화 전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자 저자가“많은 문제점들을 제시했을 뿐 해결 방안보다는 남겨 놓은 과제가 훨씬 많다는 것을 절감한다”(p. 208)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대중문화와 기독교 문화론에 대한 많은 문제점들을 제시하였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 방향과 전략은 실제적이고 구제적이다기 보다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특별히 개혁주의 문화론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문화론이 다른 문화론과 어떻게 구별되는 지에 대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개혁주의 문화론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대중 문화의 변혁을 위한 비전을 회복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기독교 문화는 세상과 구별된 경건한 공동체의 삶을 토대로 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학과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연구하며 한국의 구체적인 문화 현상과 씨름한 신국원 교수가 쓴 이 책은 문화 전쟁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한번 읽어야 할, 아니 그 내용이 완전히 이해되어 마음에 완전히 심겨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어야 할 귀중한 기독교 문화 전략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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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15 -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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