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세계관과 엘룰 1'| 성경적 세계관  
이      름: 안명준
작성일자: 2012.11.15 - 13:17
'세계관과 엘룰 1'| 성경적 세계관
신동식 | 조회 83 |추천 0 | 2002.05.27. 11:19
http://www.freechal.com/ellul 에서 퍼온 글입니다.

제목 Caleb의 에세이:'세계관과 엘룰 1'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시는 분들은 쟈크 엘룰을 그다지 좋은 모습으로 보고 있지 않다. 심한 경우 그를 20세기의 영지주의자라고 평하시는 분들까지 있다(슐츠 포함). 엘룰을 이렇게 폄하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엘룰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가장 주된 주장인 '세계 변혁' 내지는 '문화 변혁'을 세속적 시민 운동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영적 의미나 가치도 부여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엘룰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 내지는 '창조 명령'에 이토록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1) 니버의 5가지 모델

우선은 니버의 그리스도교와 문화와의 5가지 관계의 모델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다. 잘 아시다시피 니버는 그리스도교와 문화와의 관계의 영원하고 심원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으며 또한 완전한 신으로 이땅에 오셨다. 바로 여기서 피할 수 없는 문제 곧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가 생겨난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대한 많은 답변을 해 오고 있다. 이 답변들의 한쪽 극단은 복음과 문화는 완전히 구별되며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며 다른쪽 극단은 복음과 문화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일 것이다. 니버는 이처럼 복음과 문화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입장을 분리모델이라 했고(실제로 니버는 분리 모델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아님) 복음과 문화를 일치시키는 입장을 일치 모델이라고 했다. 곤잘레스와 웨버는 양쪽 극단 중앙에 한 가지 모델을 더 추가했는데 이를 변혁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혁 모델에 의하면 복음과 문화는 서로 질적으로 상치되지만 복음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고로 죄된 문화를 복음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바로 이 변혁 모델의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사상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칼빈으로 시작된 변혁 모델은 후에 화란 기독교 철학자 도예벨트와 아브라함 카이퍼 등을 거치면서 정교화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프란시스 쉐퍼를 통해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버는 분리, 일치, 변혁 모델 이외에 두 모델을 더 추가시켰는데 분리와 변혁 모델 사이에 역설 모델을 변혁과 일치 모델 사이에 종합 모델을 위치시켰다. 그에 의하면 역설모델은 변혁모델에서 보다 분리적 성향이 강하며 반대로 종합 모델은 변혁 모델에서 보다 일치 모델에 가깝다고 한다. 종합 모델은 복음과 문화의 기본적 단절을 상정하기는 하나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계 사이에 통로를 설정하듯 복음과 문화 사이의 어떤 통로를 인정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카톨릭 사상가들에게서 많이 보여진다. 반면에 역설 모델은 기본적으로 분리 모델에 가깝다. 복음과 문화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그러나 역설모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분리주의자들과 다른 한 가지는 분리주의자들이 문화로부터 과격하고 급진적인 분리를 주장하는 반면 역설주의자들(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음)은 복음과 적대적인 문화로부터 분리되어서도 안되며 또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으로부터 비롯해서 마틴 루터, 키에르케고르, 칼 바르트 등의 신학자들이 이 노선에 속한다 할 수 있겠으며 쟈크 엘룰도 이 노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문화 변혁

세계관 운동에 의하면 노동은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다스리고 지배하라'는 명령은 창조의 명령이며 문화 명령이요, 나아가서 노동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이름 짓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하나님의 6일간의 노동으로 생겨난 이 세계를 보다 완전히 가꾸고 다스려야 하는 사명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엘룰은 이 의견에 철저히 반대한다. 노동은 철저히 타락의 질서이다. 노동은 창조때부터 생겨난 창조의 질서가 아니요,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인간에게 맡기신 이 세상은 인간의 손으로 개발을 해야 완전해지는 불완전한 창조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손으로 개발을 더 해야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 완전한 피조세계였다. 다만 이 세상을 통치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는 그 방법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주권자로 부르셨다. 이 통치는 안식의 질서에 속하는 통치이다. 휴식과 노동이 구별된 타락의 세계의 그런 노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이 세계를 다르시리기 위해 했던 행동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해와 달, 궁창의 이름을 부르신 그 행위의 모방이다. 이것이 아담의 통치행위였다. 아담의 통치 행위는 관계맺는 행위요, 사랑의 행위다. 이것은 힘든 노동을 해야만 안식할 수 있는 그런 노동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아담의 통치는 노동이며 안식이며, 유희며 사랑이었다.

엘룰은 노동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는 철저하게 반성서적으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하나님의 징벌이요, 필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이 노동이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동하도록 부르셨다(the calling)는 사상은 철저하게 부르즈와의 자기 합리화라는 것이다. 노동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의 필연의 질서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노동해야 한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은 우리를 노동해야만 살 수 있게 만든다. 노동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악이다. 그렇다고 노동이 선은 아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질서이다. 이것이 필연의 질서이다. 그러나 저 세상은 노동이 없을 것이다.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이것이 자유의 질서가 지배하는 저 천국의 특징이다. 따라서 노동을 기독교화 시킨다는 것, 필연의 질서를 자유의 질서로 재개편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저 천국이 도래하기까지 노동을 떠날 수는 없다. 노동은 이 땅의 질서며 이 땅에서 사는 한 노동을 멈출 수는 없다. 단지 보다 공정하게, 보다 정당하게 노동하는 행위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공정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러한 법칙이 아니라 시민법, 곧 이 땅의 법칙이 요구하는 공정함일 뿐이다. 이 공정함은 '일한 만큼 벌어야 한다'는 매매의 법칙과 교환의 법칙에 근거한 공정함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은혜를 말하고 있다. 은혜란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주는 은혜이다. 은혜와 매매는 근본적으로 적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은혜의 복음으로 노동을 변혁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다. 엘룰은 이 땅에 속하는 질서를 기독교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우상에 금칠하기'라는 과격한 말로 비판한다. 노동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는 복음과 적대적이다. 따라서 문화를 기독교화 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허망한 노력일 뿐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복음과 문화의 근본적인 대립과 모순 앞에 좌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