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검색
<!--TITLE_DATA-->
 
::: 교회사 :::


189 77 통계카운터 보기   관리자 접속 --+
Name      한 천설
Subject   바울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본21세기 한국교회 /   한 천설
바울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본

21세기 한국교회

The Korean Church in the 21st Century

from the Aspect of Pauline Soteriology







                                                             한 천설 교수                     Prof. Dr. Cheon-Seol Han







우리 한국교회는 1885년 선교가 시작된 이래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여, 불과 1세기 만에 1200만 신도를 가진 동양최대의 개신교회로 발전하였다. 세계교회가 경이의 눈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성장의 주요모델로 삼고 있으며, 21세기 아시아와 세계교회를 책임질 교회라고 하기도 한다. 실지로 한국교회는 4만 교회와 1200만 성도, 교회의 수많은 행사들과 화려한 예배들, 그리고 수천 명의 신학생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1세기 초의 우리 한국교회는 심각하게 세속화되어 교회내외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 성장이 중지되고 정체상태를 맞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심지어는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한다는 말조차 들려지고 있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복주의, 물량주의, 공로주의, 현세주의, 개인주의, 심각한 대립, 반목, 분열! 한마디로 우리 한국교회는 성장에 만취, 칭찬만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경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염려가 된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가운데,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부단히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고 한다. 세속화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진화론적으로 인식’하여 역사의 변천과 함께 교회와 그 가르침은 시대를 따라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만 존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복음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도 기독교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끊임없이 세속화와 변질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수호하고,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반복적인 자체개혁’과 ‘궤도수정’과 ‘원상회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개혁할 요소가 우리 가운데 있는 한, 고칠 것이 있고 잘못된 것이 있는 한 1517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2003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선교 110여년 만에 놀라웁게 성장한 우리 한국교회, 그러나 그 성장에 따르는 아픔(growing pain)을 바로 직시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기도하며 이를 바로 잡고자 힘써 왔고, 그래서 어느 집회에 가 보던지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단골메뉴로 등장한지 오래이다. 또 시중에는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에 관한 논문이나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뒤안길에 널려진 어두운 문제들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말은 많은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개혁되지 않거나 갱신되지 않았을 뿐더러, 또한 변화의 조짐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들이 창조하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원래 교회라는 것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청순한 이미지 때문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부정적인 면은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 하더라도 태산과 같이 크게 보이고 육중한 무게로 우리의 가슴을 내려 누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 조그만 잘못과 티에도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가슴아파하는 이유는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는 흠과 티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보아서는 안될 것들을 보고, 들어서는 안될 것들을 듣고,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교회에도 있음을 알게 될수록 안타까움은 커지기만 한다. 암담한 중세의 교회현실에서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개혁자들의 후예로서 21세기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바로 분석하고, 성경말씀의 원리에서 이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시기에 “현대교회와 신약해석”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모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며 그 대책을 같이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현 한국교회가 과연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현 한국교회의 모습이 정상적인지 그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겸손히 분석해보고, 바울의 구원론에 대한 이해를 그 대안으로 제시함으로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1. 현 한국교회의 상황분석




1.1. 종교학적 측면에서 분석해 본 한국교회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교회는 소위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내는 일반적인 현상들이 여러가지 보여지고 있다. 종교학에서는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어떤 종교이든 상관없이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고등종교가 타락하면 성직자가 급증한다고 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부인(self-denial)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을 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본으로 살아가는 삶이요, 구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이 바르게 이루어지는 종교라면 성직자는 절대 급증할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가 급증했다는 것은 자기부인은 간데없고, 성직자체가 좋은 직업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둘째, 종교기관의 급증이다. 그 종교의 성직자가 급증했기 때문에 많은 성직자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종교기관이 급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의 기복화이다. 기복신앙이란 말 그대로 복을 비는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중심에 복을 구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앙생활의 지향목표가 복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 물론 지복(至福)의 상태에 대한 욕망이 무조건 정죄될 수 없고, 이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함부로 정죄될 수 없다. 이는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요소는 기복의식(blessing-oriented consciousness)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종교적이라는 말은 기복적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이며, 기복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기복성이 기복주의로 빠지면서부터 시작된다. 기복주의란 신앙의 기복적인 요소가 절대자와의 인격적인 관계로 승화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이기적 욕구해소로 퇴화되어 버린 타락한 종교적 모습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복주의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나의 소유나 정성으로 神을 달래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목적의 성취가 궁극적 목표인 신앙의 형태이다. 반면 참 신앙이란 내가 神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기복성이 종교의 출발점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은 바로 기복주의의 강화요 강조이다. 그 까닭은 급증한 성직자들의 생계의 근원과 늘어난 종교기관을 유지하는 원천이 바로 교인들이 내는 헌금이기 때문이다. 급증한 성직자들의 생계유지와 종교기관의 유지를 위해서는 내가 몸담고 있는 종교기관으로부터 교인들이 떨어져 나가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그들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철저히 복과 저주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결국 신앙은 철저히 현세기복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신앙은 철저히 개인의 부귀영화와 입신영달의 차원으로 격하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몇 가지 관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한번 진단해 보자.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첫 번째로 성직자가 급등한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교파에 등록되어 있는 신학생의 총 숫자는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신학생의 수보다 더 많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최근 한 언론기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2003년 현재 한국교회가 매년 배출하는 신학교 졸업생의 수는 약 8500-10,000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니면 소위 고등종교가 말하는 타락의 한 현상인지 우리는 겸손히 물어야 한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이 물이지만 정작 마실 물은 없어진다. 오늘 우리 한국은 온천지에 신학생이요, 목사인데 정작 교인들은 믿을 만한 목사가 없다고 한다. 온 사방이 십자가 천지인데, 이사를 가는 교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은 종교기관의 급증이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한국의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는 끊임없는 분열의 역사이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서 당연한 수순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성직자의 공급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으로 합동측만 해도 무임목사가 6,500명을 헤아리고 있다. 아마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분열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목회자가 급증한 만큼 교회는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지로 유럽에 있는 교포교회들을 보면 이러한 문제를 실감할 수 있다. 교인은 몇 명되지도 않는 작은 도시에 지나치게 많은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의 교회면 충분한 데도, 교회는 계속 분리되어 갈 뿐 절대 합쳐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목회자들 때문이다.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세 번째 현상은 신앙의 기복주의화라고 했다. 앞서 지적한대로 기복성은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종착역이 되어서는 결코 되지 않는 다. 모든 문제는 신앙의 기복성이 기복주의로 빠지면서부터 시작된다. 기복주의란 신앙의 기복적인 요소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승화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이기적 욕구해소로 퇴화되어 버린 타락한 종교적 모습을 말한다.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수적 선물에 착념하는 신앙행위이다. 비록 기복이 종교의 근원적 요소이긴 하지만, 기복주의는 신앙의 풍성한 세계를 오직 물질과 금전, 건강과 출세, 개인의 안녕과 번영, 즉 개인의 부귀영화와 입신영달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균형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복주의 신앙으로 빠지면서 하나님은 나의 성공의 도구로 상대화되며,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과 바람을 깨닫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이 변화해 가는 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용하여 자신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의 욕망을 채우는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한마디로 이는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피조물에 집착하는 우상숭배인 것이다.




현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기복주의화 되어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전 국민의 25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자랑해왔다. 네 명중에 한 명이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부패와 악이 감소하기는커녕 총체적으로 부패했다고 모든 사람이 개탄을 한다. 부패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기복주의화 되었는지, 하나님의 뜻이나 사회정의, 또는 진리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한국교회를 잘 아는 한 유럽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세 가지 밖에는 모른다. 하나님, 자기 자신, 돈!” 부끄럽지만 정확한 지적처럼 보인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만, 그 열심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그 사람의 기도내용을 보면 된다. 한 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그 사람의 기도의 내용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내용의 기도만 드리는 사람은 이타적인 삶을 헌신적으로 살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자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의 테두리 내에서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 한국교회의 기도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가? 만일 현재 우리의 기도가 ‘자기’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인 기도로 일관되고 있다면, 또한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귀영화와 입신영달과 소원성취를 기도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현세를 목적과 우상으로 삼고 기복주의의 무당종교를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과연 그런 기도생활이나 신앙생활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고, 이 세상의 더러움을 맑히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현재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기복주의화, 개인주의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살펴 본 한국교회의 현실이 고등종교가 타락하는 일반적인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1.2. 교회사적 측면에서 분석해 본 한국교회




2000년 교회사를 살펴볼 때 교회와 세속사는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세속사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교훈이 있다. 첫째는 사회의 윤리와 도덕, 성적수준은 교회의 영적상태와 정비례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학교가 부흥했을 때 치고 교회가 타락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1.2.1. 현 한국사회의 도덕적 상태와 성적수준

첫째, 교회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는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교회의 영적상태는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성적 수준과 정비례 한다”는 것이었다. 즉 교회의 구성원이자 동시에 한 사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정직하고 진실하고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당연히 그 사회는 높은 도덕적, 윤리적, 성적수준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할 경우 당연히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가 알 수 있는 당연한 원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한 번 진단해 보자.




2003년 현재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현재 한국은 부패공화국! 총체적 부패의 나라! 거짓말이 판치는 나라, 중곡(衆曲)의 나라! 즉 모든 것이 온통 굽어 버려 정상적인 가치관이 웃음을 받는 나라가 되었고, 법을 지키고 도덕과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뒤처진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OECD국가 가운데 공직자 부패도 1위의 국가가 되어 버렸다. 대통령이 되는 분들마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우리나라가 썩어도 이렇게 썩은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무슨 게이트가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게이트마다 그 문이 얼마나 깊은지 문을 열 때마다 모두가 깜짝 놀라고 있다. 도무지 그 끝과 몸통을 알 수 없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의 고리!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수석비서관, 국정원차장, 장군, 검사, 언론사 사장 등 그런 당당하고 화려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정의 투기판 같은 게이트에 발을 들여놓았고, 지금도 온갖 거짓말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는 대통령이 말을 해도 믿지 않는 불신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철저히 조사해서 검찰이 발표를 해도 어린 학생들까지도 믿지 않는다. 소위 한국형 부패의 뿌리와 범위가 어떠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번 청문회가 열려야 하고, 특별검사제가 시행되어도 별로 나아질 소망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 부패의 마지막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윤리나 도덕적 수준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성적수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아마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국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문제와 비슷하다. 결코 급증할 수 없는 신학생의 수가 늘어나서 신학교가 부흥한다는 것은 성직이 좋은 직업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신학교가 부흥하고 신학생의 수가 많다는 것은 교회의 부흥기가 아니라 오히려 위기라는 것이 2000년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만일 지금 목회자의 길이 핍박받고 고난받는 십자가의 형극의 길이라면 이처럼 신학교마다 신학생들이 넘쳐날 것인가? 우리 한국교회도 한 번 심각히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1.2.2. 사회타락의 근본적 원인:

     그리스도인들이 책임과 사명을 감당치 못한 결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타락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현재 우리 교회가 성장부흥하고 있고, 성도들은 얼마나 열심이 신앙생활하고 있으며, 세계교회가 우리 교회를 인정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사회는 사회이고, 교회는 교회이지 않는가? 왜 이 사회의 잘못을 교회가 책임져야 하는가? 정치가와 관리들, 교육가들의 잘못이 아닌가? 어차피 썩어질 세상 아닌가?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회의 타락은 교회의 책임이다. 한 번만 생각해보자. 만일 교회가 살아있고, 그 구성원인 25퍼센트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갔다면 이 땅이 이렇게까지 황폐하게 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바로 생활했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이 사회는 당연히 바르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아닌가! 결국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신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1.3. 값싼 은혜(cheap grace)와 공로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멍들어 가고 있는 한국교회




1.3.1. ‘자기 십자가’ 대신 ‘값싼 은혜’를 팔고 있는 한국교회




1945년 4월 9일 히뮬러(Himmuler)의 특별명령에 의해 Flossenburg의 수용소에서 사형당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과연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만일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가 자유주의자니까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가 던진 충격적 질문을 쉽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그의 질문을 1960년대나 1970년대에 들었다면 큰 고민없이 그의 질문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한국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본회퍼의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독일루터파교회의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이것은 초대 한국교회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평양에 부임하는 관리에게 정부는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혹시 잘못해서 체포될 일이 있어도 수갑을 채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초대교회의 전통은 1980년대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지탄을 받고 있는 실정으로 바뀌었다. 김 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 일으킨 사정으로 축출된 많은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70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 전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무종교인인 경우 앞으로 종교인이 된다면 어떤 종교를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불교 30퍼센트, 천주교 20퍼센트, 개신교 10퍼센트가 나왔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우리보다 기독교가 약하지만 무종교인이 앞으로 종교를 택한다면 1위가 기독교로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지금까지의 성장에 만취하여, 성공의 신화를 팔면서 하나님의 경종을 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본회퍼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기독교는 과연 구원의 종교인가?”

그는 1937년 Nachvolge (The Cost of Discipleship: 나를 따르라)란 책에서 당시 독일교회가 ‘값싼 은혜'(cheap grace)를 판다는 이유로 일부교회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교회가 진정으로 죄의 용서를 갈구하지 않는 자에게 죄의 사유를 선포하고, 진정한 권징과 징계가 없는 세례를 베풀며, 참된 고백이 없는 성찬을 베풀고, 제자로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언급하지 않는 값싼 은혜(cheap grace)를 선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당시 교회들이 하나님의 구원목적과 자신의 사명은 잊은 채 값싼 은혜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내고 있다고,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영역주권으로 확장시켜 나아가지 못한 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1.3.2.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의 지나친 강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독교를 지나치게 ‘구원의 종교’로만 보고 있다. 물론 폭넓은 의미에서의 구원, 즉 현재적인 삶에서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매우 좁게,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내세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 믿고 천당”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천당을 간다는 단순 논리가 교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1937년 당시 본회퍼가 “과연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독일 루터파교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없는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고 당시 교회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본회퍼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 교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부르심의 사명은 잊은 채 값싼 은혜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내세적 종교인들을 양산해 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이 땅에 이렇게 황폐하게 되어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 복음에서 은혜를 제외하면 복음이 복음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쉼을 주시고, 죽음을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러나 또한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 바른 복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즐기기만 할 뿐 사명을 감당치 않는 방향성을 상실한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대리자로서 이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마땅히 이러한 은혜의 양면성을 균형있게 강조해야지,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한국교회가 이 땅의 황폐함에 대하여 무책임이나 무관심하기에 나타나는 이 모든 현상들은 복음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특히 바울서신은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 성도의 삶과 사명에 대해 철저히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한국교회는 구원을 너무 좁게, 너무 소극적, 너무 개인적으로 이해한 결과 구원의 의미를 정치, 경제, 상업, 문화, 교육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1.3.3.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i)의 지나친 강조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구호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바울−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교회의 전통에서는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선택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가르친다. 즉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택하는 것마다 죄요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것은 옳은 일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점만은 포기해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한 후에도 인간의 전적타락만을 강조하며,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책임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구속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해질 수 있으며, 또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인간이 빠져 있었던 점만을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중생한 후에도 계속 인간의 절망과 좌절만을 이야기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 아닌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니까?” 라는 말을 쉽게 교회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덫에서 구원하는 것을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구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마치 마지막 목적인양 생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요,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시켜 천당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왜 구원한 즉시 천당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고 살도록 우리를 덫에서 구원해 내신 것이다(엡 1:6, 12, 14). 따라서 덫에서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에 합당한 모습을 실제 삶 가운데서 드러내야지, 자꾸 덫이야기만 하면서 죄를 저질러서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것도 그리스도인은 실제로는 의인이 아니지만 법정적으로 의인으로 선언하셨다는 ‘법정적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이러다 보니까 인간은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견해를 양산하였고,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중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죄인이 죄를 짓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1.3.4. 게토화(Ghetto)되는 한국교회




그러다 보니 현대 한국교회는 점차 ‘게토化’(Ghetto)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모습을 찬란히 드러내지 못한 채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의 삶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초췌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정신적으로 당당하게 삶으로서 비(非)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떳떳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맞서 담대하게 맞서 싸우기보다는,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연합군에 쫓겨서 승리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산에다 굴이나 파고 동굴에 갇혀서 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기들끼리는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가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값싼 은혜를 추구하면서 시대와 민족에 대한 자신의 사명은 감당하지 않은 채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수가 늘어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게토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오늘 21세기 목회자 후보생들과 우리 목회자들이 이런 심각한 게토화현상을 직시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 한국교회 앞에 놓여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국교회의 게토화현상의 악화는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게토화현상의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지나치게 구속과 이신칭의 만을 강조한 것, 즉 정확한 구원론이해의 부재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을 원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이런 불균형을 자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면 바로 이 세상을 떠나서 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 안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 안에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앙의 사람’(persons of faith)이면서 동시에 ‘문화 속의 사람’(persons in culture)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신앙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점을 잘 밝혀주고 있는 것이 바울서신, 곧 바울의 구원론이다. 우리는 바울서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영적 게토화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3.5. 이신칭의와 공로주의 사상의 혼재

바울의 구원론을 살피기에 앞서 또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론을 그렇게 신봉하면서도, 결코 혼재해서는 안 될 공로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혹시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려 할지 모르지만, 한국교회는 값싼 은혜와 공로주의 사상이라는 양극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멍들어 가고 있다. 아마 한국교회만큼 ‘오직 은혜만으로’를 소리 높이 외치는 교회도 이 세상에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다”고 하는 공로주의 사상이 팽배한 교회도 이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말에서 분명하게 증명이 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 우리 한국교회는 도무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그리고 혼재해서는 안되는 두 개의 극단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모든 신자는 헌금을 드린다. 이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감사하는 표시로 드린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결코 공로가 될 수 없고 자랑거리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가? 헌금을 많이 드린 사람은 적게 드린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공로가 많고 의롭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기보다 헌금을 적게 드린 사람보다 천국에서 상급이 더 크다고 자부한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을까? 이런 모습은 형태는 다르나 신앙생활의 거의 모든 면, 즉 기도, 성경공부, 주일성수, 교회봉사 등에서 나타난다. 무엇을 행하는 행위로 자신의 의를 쌓으려 하고, 공로를 삼으려 하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여 등급을 나누어 일등 그리스도인이니 이등 신자니 하며 신앙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던 교만의 모습들! 이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

과연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 것인가? 이런 이상한 양립현상이 가능한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삶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이런 공로주의 사상이 만연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현상들, 즉 이신칭의와 구속의 지나친 강조, 신앙의 개인주의와 내세주의화, 공로주의 만연, 성경적세계관이 결여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양산, 믿음과 행함의 분리 등은 자신이 소유한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결여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고,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사명을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바울이 전하는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의 구원이해’를 살펴보고, 그것을 현 한국교회 상황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려 한다.













2. 바울의 구원 이해

바울서신을 읽다보면 신자에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많은 구절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바울의 메시지는 구원론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일, 구원의 과정, 구원의 결과, 구원받은 신자의 상황, 그리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바램 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구원론은 이처럼 그의 메시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만은 않다. 그 결과 바울의 구원론은 지금까지 많은 오해를 빚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구원을 단지 과거적 사건으로 이해한다(엡 2:5, 8). 하지만 바울은 이 문제를 그리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서신에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아직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이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하다’에 해당하는 동사를 세 가지 시제로 모두 사용한다. 먼저 과거시제로 신자는 예수를 믿을 때 그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엡 2:5,8). 두 번째로는 현제시제를 사용하면서 신자는 신앙적으로,  지적으로 성장해 감으로 “날마다 구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고후 2:15; 엡 3:14이하; 참조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니라”). 또한 미래시제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신자는 주님의 재림 시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딤후 4:18)고 말한다. 이것은 구원의 미래성, 즉 구원의 완성은 아직 미래적임을 강조하며 구원의 미래적 소망성을 중시하는 것이다(롬 8:24; 갈 5:5; 빌 2:12). 바울의 이러한 세 가지 시제사용이 의미하는 것은 신자의 구원이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바울의 구원이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어떻게 한 가지 실체(fact)인 구원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상이 모순이 있거나 불일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은 그 중심에 있어서 ‘이미’와 ‘아직 아니’의 역설적인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구원에 관해 언급할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가지 시제를 모두 사용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하는 모습이 마땅히 선한 행실로 삶속에 나타나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하고, 결승점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자처럼 구원을 완성해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구원이해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 시작부터 인간에게 없는 은혜의 개념으로 시작하여 하나님 편에서의 무조건적 선택, 거저주시는 대속, 칭의, 성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령의 사역, 인간의 지혜로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모든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 또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이 구원론 중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2.1. 구원의 두 가지 측면




바울이 말하는 신자의 구원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먼저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이란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칭의(justification)라고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자적 행위를 지칭한다. 이점에서 칭의는 사람의 죄책을 처리하고 그를 의인이라고 선언하시는 ‘신분’(status)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딤전 1:15; 롬 5:9).

다른 하나는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으로 구원이란 의로워진 신자가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며, 그 과정 속에서 인간창조의 본래목적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성화(sanctification)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반응(response)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 우리의 죄된 ‘본성’(nature)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으로 바울은 말하고 있다(골 3:10; 참조 벧후 1:3-5).

이처럼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행15:11). 그렇다면 이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과 동시에 인간의 책임 하에 놓여 있다는 점(빌 2:12, 13)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바로 이점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2.2. 한국교회 신자들의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




한국장로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장로교회가 이신칭의 교리를 칭의와 성화의 균형잡힌 것보다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성화(聖化)와 선행(善行)에 대한 강조는 소홀히 하고 칭의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선행(善行)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거나, 또는 신자의 상급론에 종속시켜 버리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처럼 구원에 대한 지나치게 좁은 이해(칭의)로 말미암아 마치 신앙과 삶이 분리 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신자들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없이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잘못 행하는 부분들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의 성화의 삶, 좀 더 쉽게 말하면 행함에 대한 이해를 바로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2.3.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확실히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우리가 자주 빠지게 되는 실수는, “믿음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행함은 그리 필요없고, 중요치 않다”고 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믿음을 말할 때 절대로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은 실과 바늘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니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이란 것은 ‘행동’으로 그 진실성이 증거되고 나타나는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믿음의 믿음 됨을 행함 속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교훈은 야고보서가 특히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강조는 동시에 성경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세례요한은 “너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살라(마 5:16)”고 명령하셨다. 이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행함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이중기준을 제시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인데 어떻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행위구원을 주장하시는 것일까?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구원받은 자는 그 구원의 표가 선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강조는 특별히 바울서신에서 더 잘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이 기록한 모든 서신은 그것이 교리적이든 혹은 신학적이든 할 것 없이 언제나 행위와 생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바울은 대부분의 경우 서신전반부인 ‘교리적 부분’에서는 독자들에게 “우리는 의(義)라고는 조금도 없는 죄인이요, 진노의 자식이요, 소망없는 자이었는데, 이런 죄인들이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주안에서 어떤 존재들이 되었는지” ‘성도의 참혹했던 과거’와 ‘변화된 영광스러운 현재’를 상기시킨다. 이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실천적 권면부분’에서는, “은혜로 거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를 강조하며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 ‘그러므로’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롬 12장에 나오는 ‘그러므로’이다. 바울은 롬 1-11장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구원의 도리를 설명한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너희가 이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너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행함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분명해 졌다. 행함은 결코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거나, 상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산제사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자녀답게 의롭고 정직하게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선행은 모든 신자가 당연히 드러내야 할 믿음의 열매요 참 신자의 표식(sign)인 것이다.

바울이 ‘실천적 권면부분’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는 것이지, 행함이 인간의 공로가 된다거나 상급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후일에 우리에게 상급이 있을 줄 믿는다. 그러나 그 상급은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기보다는, 과거 우리를 구원하실 때와 같이 은혜로 상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신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아버지인 하나님처럼 정직하고, 의롭고, 신실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바램이요 뜻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은 자랑거리도, 공로도, 흥정거리도, 상급의 조건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다만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답하는 보은(報恩)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이라는 보상을 염두에 두고 흥정하듯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아닌 잘못된 자세인 것이다. 우리의 바른 자세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응답의 자세를 가지고 ‘빚진 자의 삶’ ‘보은의 삶’을 사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든, 신자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될 것을 행하게 되어 있다. 정상적인 신자는 당연히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선한 행실로 나타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왜 이 땅이 새롭게 되지 않겠는가! 왜 소망이 없겠는가!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우리 한국교회가 차고 넘친다면 왜 우리 교회들이 참된 구원의 방주와 어두움을 밝히는 등대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이 모든 비정상으로부터 다시 말씀으로 새롭게 회복되어야 한다. 다시금 신자로 신자되게 하고, 교회로 교회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3. 결 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신자로서 처음 경험하는 체험만을 지칭하지 않고, 재림 시에 완성되어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체 삶의 과정을 가리키고 있다. 구원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혜의 선물로서 제시되지만, 그것은 신자 편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성취되고 완성되어져야 할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날마다 자신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살아감으로 구원을 성취해야 하고,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영역주권으로 확장시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특권을 즐기기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역사와 민족 앞에 책임을 감당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뜻과 목적이 계셔서 성도들을 죄의 덫으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결코 그 구원이 마지막 목적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들을 구원시키셔서 하늘나라에 데려가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신 즉시 하늘나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구속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며 살고,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확장시키는 책임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을 실제 삶 가운데서 나타내야만 하고, 삶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영역주권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결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는 망각한 채 정신없이 살아가서는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첫 번째 질문은 “네가 무엇을 믿었느냐?”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네가 세상을 다녀오는 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하였느냐?” 그것이 아닐까!




성경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신자들은 과거 하나님을 모를 때 본능과 욕망을 따라 살던 자기중심적 삶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역사와 민족 앞에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신의 출발지와 최후의 목적지를 모를뿐더러, 무엇 때문에 세상을 다녀가는지 삶의 목적도 모르기에 극한 방탕을 향해 달음질치며 자기욕망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마땅히 달라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알고, 잠시 이 세상을 다녀가는 동안에 이 세상을 목적이나 우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신앙은 본능을 따라 살던 옛사람의 정욕을 매일 십자가에 못박는 자기부인의 신앙이었다. 기독교의 핵심은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유익하게 하는 생산적인 신앙이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은 자기를 극복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중심의 현세기복신앙 쪽으로 더 기울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이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신앙의 본질과 복음의 본질을 알고 마땅히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모든 면에 걸쳐 불의에 찬 우리 조국은 더 이상 욕망의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의 가치관과 행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교회의 문턱 만을 드나드는 사람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동시에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눈물로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참 신앙의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이 자리에 모인 목회자들과 목회자 후보생들 모두가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세상을 다녀가는지를 먼저 분명히 알고, 말씀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것들을 다시 회복함으로 섬기는 교회가 새롭게 되고, 새롭게 된 교회들을 통하여 이 나라와 민족이 다시 살아나는 귀한 역사가 속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한 천설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과(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화란 Kampen 신학대학교 독투란투스(Drs. Theol.)

화란 Kampen 신학대학교 박사(Dr. Theol.)

현재 개혁신학연구원 신약학 교수(교무처장)



 
  
 
  

게시물을 이메일로 보내기 프린트출력을 위한 화면보기
DATE: 2006.12.10 - 16:33

211.221.221.150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SV1; V-TV Browser7.0.0.0 (Build 700))


 이전글 김명혁교수의 교회사
 다음글 종교개혁 한국교회 이상규
글남기기삭제하기수정하기답변달기전체 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