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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
Subject   마포삼렬(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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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 1.hwp [4.2 MB] 다운받기 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 1.hwp (4.2 MB) - Download : 64





<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 1>


마포삼렬(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과 한국교회



















발제: 이상규 교수 (백석대), 박응규 교수 (아신대),
이승구 교수 (합신대).

일시: 2022년 3월 25일 (금) 오후 2시-5시
장소: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더글라스 홀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18길 53)

주최: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소장 오덕교 총장)    
후원: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제 1 부  예배 (2:00-2:30)

인도: 오덕교 목사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소장)
찬송: 14장 “주 우리 하나님”























기도:       안명준 목사 (평택대학교 명예교수)
본문:              시편 3:1-8
설교:              “기도와 응답”
           현창학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축도:   정효제 목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총장)

                      
              제 2 부    학술 발표

환영사: 강덕영 장로 (유나이티드문화재단 이사장)

2:30-3:10   <1강>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 선교”
            이상규 교수 (고신대 명예교수/백석대 석좌교수)

   <플륫 특별 연주   “주의 은혜라”   (손경민 작곡, 지선)
        연주자 이제이 (사랑가득교회 이은정 집사)>
              
3:10-3:30    휴식과 교제

3:30-4:10   <2강>  “마포삼열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
         박응규 교수 (아신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

4:15-4:45   <3강>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                      이승구 교수 (합신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4:45-5:00   정리, 마침기도 – 오덕교 총장

<발제 1>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선교
          - 평양지부의 개척, 평양신학교의 설립, 한국장로교의 건설자 사무엘 마펫 -

                                                                        이상규*

마포삼열(馬布三悅)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은 한국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서 조선교회의 아버지였다. 동료선교사였던 곽안련은(Charles Allen Clark, 1878-1961) 그를 “한국교회를 낳은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상규 교수는 고신대학교와 호주 멜버른의 장로교신학대학(PTC), 그리고 호주신학대학(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에서 공부하고 고신대학교에서 35년간 교수로 일했다. 현재는 명예교수이자 서울 백석대학교에서 다시 교회사와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마포삼열박사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박사 전기』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1973), 19.
 1890년 1월 25일 자신의 26번째 생일날 내한한 그는 1936년 9월 24일 한국을 떠나기까지 46년간 조선에서 살며, 서울(1890-1893)과 평양(1893-1934)에서 44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1934년 1월 25일 은퇴하였다. 당시 선교사 정년이 70세였기에 은퇴하게 된 것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2년간 평양에서 체류하던 그는 1936년 9월 24일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주 몬로비아(Monrovia)에서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내한 이후 첫 3년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조선어를 공부하고 후일 경신학교로 발전한 예수교학당 책임자로 일했다. 이 기간동안 서울 이북지방을 순회 전도하여 평양을 관서지방 선교거점으로 인식하여 1893년 평양으로 이거하였고 평양에서는 ‘사랑방전도’를 시작으로 장대현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고, 우리나라 첫 장로교신학교육기관인 조선야소교장로히신학교를 설립하여 24년간 교장으로 활동했다. 또 평양의 중요한 교육기관인 숭실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숭의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학교교육에 관여하여 교육선교사로 활동했고, 1907년 독로회장을 비롯한 장로교 치리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한국에서의 장로교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등 만세운동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내한했던 1,55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 중 가장 뛰어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183cm의 장신이었던 그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우뚝 선 인물로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한 선교사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교회의 실제적인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다섯 아들 중, 3남 사무엘 휴 마펫(마삼락) 목사와 4남 하워드 마펫(마화열) 의사는 아버지에 이어 2대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며 선대의 유업을 계승했다. 이 글에서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생애 여정과 내한, 그리고 서울과 평양에서의 활동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그를 ‘마펫’으로 호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마펫에 관한 전기적 혹은 문헌 기록으로는, 마포삼열박사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박사 전기』와 김선욱, 박신순, 『마포삼열』 (서울: 숭실대학교한구기독교문화연구원, 2017), 박성배, 강석진, 『한국교회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 (서울: 킹덤북스, 2021) 등이 있다.


      1. 선교사로서의 준비와 내한 (1864-1890)

     출생과 교육
마펫은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Madison)에서 스코틀랜드 언약도(Covenanters)의 후예인 사무엘 슈만 마펫(Samuel Shuman Moffett, 1823-1892)의 5남 2여 중 4남으로 출생했다. 출생 순으로 볼 때 여섯 번째 자녀이자 넷째 아들이었다. 슈만의 아버지 윌리엄 마펫(William Moffett, 1783-1832)은 친구의 콜레라 병을 간호해 주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1832년 사망했는데, 슈만이 9살 때였다. 메릴랜드 주 행거스타운에 있는 윌리엄 마펫의 묘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묘비명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성장한 슈만은 18살 때 고향인 행거스타운을 떠나 당시 미개척지인 인디애나 주 매디슨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면서 지내던 중 1852년 8월 12일 마리아 제인 믹키(Maria Jane Mckee, 1831-1912)와 혼인했다. 이들은 언약도의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자녀들에게 성경 읽기와 암송, 교리 문답 등 경건한 가정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마펫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가 출생한 때는 미국역사의 변혁기였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62년 1월 1일에는 링컨이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링컨은 1862년 1월 1일 오후 노예 해방을 선언하는 문서(Emancipation Proclamation)에 서명하기 전에 그의 각료들 앞에서 “나는 나의 생애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는 일 보다 더 옳은 일을 한다고 분명하게 느낀 일이 없었다.”(I never in my life felt more certain that I am doing right than I do in signing this paper)라고 말했다고 한다. Eric Foner, The Emancipation of Abraham Lincoln (Ann Arbor: William L. Clements Library, 2012), 1.
 이 선언에 따라 1863년 1월에는 노예 해방이 이루어 졌고, 그가 출생한 이듬해인 1865년에는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2월에는 노예해방이 의회에서 공식 승인되어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해방을 선언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출생한 그는 무지와 미신에 매여 있던 조선에서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는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매디슨의 작은 사립학교에서 수학한 마펫은 15세가 되던 1879년 하노버 칼리지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수학하고 하노버 칼리지(Hanover College)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하노버대학은 1827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학으로서 인디애나주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다. 이 보다 후에 설립된 일리노이즈대학(Illinois, 1829), 카롤대학(Carroll, 1840), 웨스트민스터대학(Wesminster, 1851), 듀북대학(Dubuque, 1852), 블랙번 대학(Blackburn, 1857) 등과 함께 당시 미국에서 전개되던 기독교학교 운동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였다. 마펫이 이 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학생수는 130여명에 불과한 소형대학이었다. Catalogue and Circular of Hanover College, 1880-1881. 대학생 수는 60명이었는데, 신입생 22명, 2학년 15명, 3학년 8명, 4학년 15명이었고, 예비학생이 63명, 총 123명이었다. 1880년 처음으로 여학생의 입학이 허락되었는데 첫 해 입학생은 3명이었다. 『마포삼열박사 전기』, 53. 이상규 역,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3), 175에서는 당시 학생이 500여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고 1884년 6월 12일 로빈슨(J. W. Robbins)와 더불어 공동수석으로 졸업했다. 전공은 화학이었다. 곧 하노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885년 6월 이학석사(M.S.)학위를 수득한 마펫은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확인하고 1885년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본래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화학자가 되려고 생각한 바 있으나 신학교로 가게 된 것은 동료였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와 베어드의 11살 위의 형으로 하노버대학 교수였던 존 베어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 베어드 또한 언약도의 후손으로서 하노바대학에서 수학하였음으로 그는 마펫과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함께 선교사의 길을 가는 오랜 동료였고 후일 한국에서 함께 일하는 일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상규, 『부산지방기독교전래사』 (부산: 글마당, 2001), 52; 김명구, 『복음 성령 교회』 (서울: 예영, 2017), 232.
 
      매코믹 신학교는 1829년 설립된 복음주의 신학교육기관으로, 인디애나의 하노버대학의 신학과를 독립하여 시카고에 설립한 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목회자 양성이 일차적인 목표였지만, 1880년대 이후는 선교사양성과 파송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매코믹신학교는 1870-1880년대 무디에 의해 주도된 학생자원운동(SVM)의 중심지였고, 북미 기독교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상규 역,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 175.
 마펫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고 선교사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고, R. Baird, 5.
  1888년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동기생인 윌리엄 베어드, 기포드(Daniel L. Gifford), 가드너(Sarah Gardner) 등이 한국으로 왔고, 다른 동기생들은 중국, 인도, 일본 선교사를 자원한 것을 보면 당시 매코믹신학교의 학풍을 헤아려볼 수 있다.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에 의하면 매코믹신학교가 설립된 1829년부터 1884년까지 55년간 배출된 617명의 졸업생 중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이는 불과 17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6년부터 1888년까지 3년간 17명의 졸업생이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었고(McCormick Speaking, Dec., 1954, 12쪽), 1886년부터 1929년까지 45년간 253명의 졸업생이 해외선교사로 파송되었다(『마포삼열박사 전기』, 63쪽)는 사실은 18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학생자원운동과 멕코믹신학교의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런 학생자원운동과 선교지향적인 대학 내외의 환경이 베어드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내한  
1888년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마펫은 그해 5월 인디아나주 매디슨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미조리 주 애플톤의 제일장로교회에서 1년간 시무하였다. 매사에 치밀하고 성실했던 마펫은 이 기간 동안에도 교인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지만 목회지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해외 선교를 희망하고 있었음으로 교인들의 호소를 뿌리치고 1889년 3월 26일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사 자원서를 제출하였고, 해외선교부는 4월 15일 그의 허입을 결정했다. 비록 그가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지만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어머니는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당시 한국은 미지의 땅이었고,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사회에 알려진 조선에 대한 정보는 로웰(Percival Lowell)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가 전부였다. 김명구, 『복음 성령, 교회』, 234.
 이 책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는 미개한 사회로서 일부다처주의가 일반화 되어 있고 맹수들이 득실대는 나라였다는 정도였다. 수도 서울은 더러운 오물이 넘쳐나고 거리는 악취가 진동하고 대로변에는 효수당한 죄수의 머리가 걸려 있는 무지한 원시 사회로 그려져 있었을 정도였다. 가족의 반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어머니를 설득하고 한국행을 준비한 마펫은 1889년 12월에 미혼 여선교사인 수잔 도티(Miss Susan A. Doty) 파크대학 출신인 수잔 도티는 이 때부터 1905년까지는 서울지부에서 활동했는데,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 3대 교장으로 일했다. 1904년에는 밀러(F. S. Miller)와 결혼했고, 1905년 청주지부로 배속되어 활동하던 중 1931년 3월 사망하였다.
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는 알렌 이래로 내한한 북장로교의 13번째 선교사였다.
  이보다 앞서 9월 4일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마펫을 존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에게 소개하고 후원을 요청했다. 존 언더우드는 언더우드 타자기 창업자로서 부유한 실업가였다. 그는 기꺼이 마펫의 선교비를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 지자 마펫은 한국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그가 일본 요꼬하마를 경유할 때 이곳에서 한국인 박영효(朴泳孝)와 언더우드의 어학선생 송순용, 그리고 한영, 영한사전 출판을 위해 요꼬하마에 와 있던 언더우드 부부를 만났다. 마펫은, 192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동아일보 창간 축하 메시지’에서 그가 요꼬하마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 박영효가 자신에게로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마포삼열 자료집 1』, 111.
 이들이 마펫이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일본에서 2주간 체류한 마펫은 동경의 메이지(明治) 학원, 교토의 도사샤(同志社) 학원 등을 둘러보고 그곳의 선교사들을 만났다.
      마펫이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1890년(고종27년) 1월 25일 토요일, 곧 그의 26번째 생일날이었다. 제물포에서 다시 소형 배를 타고 마포로 갔고 거기서 헤론의 영접을 받았다. 마포에서 정동까지는 도보로 이동하여 일단 언더우드 집에 여장을 풀었고, 기포드 목사와 함께 지내게 된다. 한국생활의 시작이었다. 그가 내한 했을 때 한국에는 21명의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제물포에 2인, 부산에 1인, 그 외는 다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중 4사람만이 한국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J. W. Heron's letter to 'My Dear John,' Feb. 23, 1890, Seoul, Korea;  『마포삼열 박사 전기』, 71.
 이때는 알렌이 내한한지 6년 후였고, 첫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내한한지 5년이 지난 때였다.

     2. 서울에서의 활동(1890-1893)

     언어공부
내한한 마펫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는 조선말을 배우는 일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쓴 첫 편지인 1890년 1월 28일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한 저는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한국어 공부를 했고,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가지 인내하며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썼다. 『마포삼열 자료집 1』, 109.
 당시 선교부는 부임 후 첫 6개월간은 오직 언어공부에만 주력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첫 어학선생이 당시 선교사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서상륜(徐相崙)이었다. 그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영어도 약간 이해하는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유능한 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습득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통용되는 한국어에는 한자어가 많아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까지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였음으로 한국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한자어 공부는 필수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역에 따라 상이한 방언을 이해해야 했는데 이 점 또한 한글 공부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이런 언어 공부는 모든 선교사들의 난제였는데 마펫은 늘 자신의 한국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언어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언더우드는 마펫과 메리 기포드(Mary H. Gifford)가 1차년도 어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점을 엘린우드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언어 공부에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교학당
부임 후 첫 6개월간 언어공부에 몰두했던 마펫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예수교학당을 관장하는 일이었다. 예수교학당은 언더우드에 의해 1886년 봄 작은 고아원으로 출발했는데, 얼마 후 ‘예수교학당’(Jesus Doctrine School)으로 명명되었다. 후에 이 학교는 ‘경신(儆新)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培材學堂)이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예수교학당이 시작된 것이다. 최재건은 예수교학당의 시원을 검토하여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언더우드가 한 달 먼저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재건, 『언더우드의 대학설립』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62.
 한 명의 고아로 출발한 고아원학교가 2개월이 못되어 10명으로 증가되었고, 최재건, 『언더우드의 대학설립』, 68.
 1888년 6월에는 ‘영아소동’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890년에는 25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교과목은 국어, 한문, 영어, 성경 등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를 신학교로 혹은 대학교로 육성할 의도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890년 9월 언더우드 부인의 건강(관절염) 문제로 일시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마펫이 예수교학당의 제2대 학당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마펫은 2년 6개월 간 예수교학당을 책임 맡게 된다. 마펫은 이 학교를 책임 맡으면서 자립 위주로 학교를 경영하였고, 규칙생활이라는 점에서 일과표를 작성하여 교육하게 했다. 5시 기상하여 6-7시 한문공부, 7시 30분부터 아침 식사, 8-9시 아침예배, 9-13시 한문공부, 13-14 점심식사, 14-15 성경공부, 15-17시 오락 및 목욕, 17-18시 한문공부, 18-19시 저녁식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80-81.
 한문 공부라고 하지만 지리 역사를 공부하게 했고 독서를 권장했다. 토요일에는 휴교하였고 주일에는 주일학교로 운영했다. 이런 일과는 공동생활에서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마펫이 1893년 1월 평양으로 이거하게 되자 밀러(閔老雅, F. S. Miller, 1866-1937)가 3대학당장이 되었고, 학교 이름도 ‘민로아 학당’으로 개칭된다.

      선교지역 탐사와 평양 방문
북장로교의 선임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이미 여려 차례 평양을 포함한 이북 지방을 여행한 바 있지만, 언더우드는 1887년 가을(1차) 송도 평양 소래를 답사한 일이 있고, 1888년 봄(2차)에는 아펜젤러와 함께 이북지방과 평양을 방문한 바 있고, 1889년 봄(3차)에는 신혼여행을 겸해 개성 송도, 소래, 평양, 의주, 강계, 압록 강변을 답사한 바 있다. Underwood, The Call of Korea, 137.
 마펫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1890년 8월이었다. 이때 마펫은 아펜젤러와 헐버트의 여행에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감리교의 이북지방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여행이었고, 헐버트는 조선에서의 석탄 공급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들은 8월 22일 조랑말을 타고 서울을 떠나 황해도 소래를 거쳐 엿새만인 28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헐버트는 듣던 이야기와는 달리 석탄을 구할 수 없어 곧 서울로 돌아갔고, 평양을 이미 여러 번 방문한 바 있는 아펜젤러는 평양에서 이틀간 체류한 후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펫은 혼자 평양에 2주간 체류하면서 지역을 답사하였고, 이 때 평양을 자신의 선교지로 구상했다고 한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86.
 이 때 그가 체류했던 여관이 대동문(大同門) 안의 최치량의 여관이었다고 한다. 최치량은, 토마스가 산포한 성경을 주어 벽지로 사용한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으로부터 주택을 매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고 있던 인물인데 후일 장로가 된다. 평양에서 두 주간 체류한 마펫은 의주로 갔는데 여기서 백홍준의 소개로 한석진을 처음 만나게 된다. 다시 소래를 거쳐 서울로 돌아갔는데 약 6주간의 여행이었다. 이를 흔히 제1차 전도여행이라고 부른다. 마펫이 언더우드에 이어 예수교학당장을 맡게 된 것은 바로 이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마펫의 두 번째 순회 전도여행은 1891년 2월 27일부터 5월 18일까지 약 3개월간의 여행이었는데, 게일과 동행했고, 한국인 요리사 최윤화, 조선어 선생 서상륜, 그리고 이북지역에 밝은 백홍준이 동행했다. 이때의 여행은 서울에서 고양, 파주, 임진강, 개성(松都)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두 번째 평양방문이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향해 안주, 박천, 가산, 용천을 거쳐 의주로 갔고, 이곳에서 12일간 체류했다. 곧 압록강을 건너 만주 묵덴(지금의 瀋陽)으로 가 한글성경번역자이자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 선교사인 존 로스를 만났다. 로스(John Ross)와의 만남을 통해 한중 지역 선교 상황과 선교활동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여기서부터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화진, 백두산, 압록강 계곡, 강계, 장진, 함흥, 원산, 철원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제2차 전도여행은 2253Km의 거리였다. 이는 1,400마일(5,600리)의 거리인데, 700마일은 도보로 걸었고, 400마일은 마차로 이동했고, 300마일은 말을 탔다고 한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96.

     1891년 9월부터 북한지역을 다시 방문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여행이었고, 1892년 5월 6일에는 부산에 있던 북장로교의 브라운 의사(Dr Hugh M. Brown)와 더불어 평양과 의주를 다시 여행하고, 평안북도 삭주(朔州)까지 방문했다. 네 번째 여행이었는데, 약 4개월이 소요되었다. 삭주는 그 이후 다시 방문한 일이 없다. 이런 이북지역 방문과 전도활동은 평양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도여행 과정에서 후일 자신의 조수가 되는 한석진의 도움과 안내, 자문이 유효했고, 어학선생 서상륜, 의주의 백홍준과 그의 사위 김관근(金灌根) 등의 안내를 받으며 이들과도 교류하였다.
      1892년 10월에는 그래함 리(Graham Lee, 1861-1916) 목사가 내한했는데 그도 평양지부로 배속되어 마펫과 함께 일하게 된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결의에 따라 1893년 1월, 마펫과 그래함 리, 그리고 스왈론은 평양지부 설치를 위한 준비회의를 한 바 있고, 이들은 평양지부 설치를 위해 그해 3월 6일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여행했는데, 이를 제5차 전도여행이라고 부른다. 이 때 마펫의 평양 방문은 다섯 번째였다. 이 때 한석진의 이름으로 선교지부 개설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했고, 비슷한 시기에 북감리회의 윌리엄 홀(William Hall) 의사도 이곳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한옥 두 채를 매입했는데 이 일로 문제가 제기되어 한석진과 토지를 판 땅주인이 구금되는 어려움을 격기도 했다. 마펫은 이런 여러 차례의 방문과 사전 탐사를 마치고 1893년 11월 평양지부로 부임하게 된다.

      3. 평양에서의 선교활동 (1893-1934)

      평양으로의 전임
마펫은 1893년 1월 이후 서울-평양을 왕래하며 평양지부를 개척하게 된다. 미국북장로교의 한국선교는 1884년 알렌의 내한으로 시작되지만 그 동안의 선교사역은 서울을 거점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1891년 2월 3일 회집된 주한 북장로교선교부 연례회의는 평양과 부산에 새로운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부산에는 윌리엄 베어드를, 평양에는 마펫을 개척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것은 관서지방 선교를 위한 의도였다. 이 결의에 따라 윌리엄 베어드는 1891년 9월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마펫은 1893년 1월 예수교학당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이거할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마펫은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떠나 장차 일하게 될 이북지방을 순회하게 되는데, 평양을 방문을 통해 그곳의 선교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평양으로의 이거의 배경이 된다.
      평양은 서울에서 232km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산세(山勢)가 아름답고 북쪽에는 금수산, 서남쪽에는 창광산, 동쪽으로는 서기산이 있고, 대동강을 가운데 두고 발전된 도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고조선의 수도였고, 고구려 후기 장수왕(長壽王, 394-491) 이후의 수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이은 제2의 도시였다. 특히 이곳은 관서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경제, 문화, 교통 중심지였다. 금수산과 모란봉(牡丹峰), 을밀대(乙密臺), 을밀대 아래의 부벽루(浮碧樓)는 이 지역 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곳은 평양감사와 기생 이야기로 널리 소문난 유흥의 도시이기도 했다. 1893년 당시 평양의 인구는 1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평양을 방문했던 마펫은 이곳을 ‘한국의 소돔과 고모라’라고 불렀다. 감리교의 Shewood Hall은 평양의 도덕적 정황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전략상 희망적인 곳이라고 말한다. “이 도시는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으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가 된다. 또한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을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거기에도 인구가 10만원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기업적이라 비교적 번성할 여지가 있는 도시이다. 이 외에도 이곳은 서울과 북경 간을 연결하는 도로 선상에 위치함으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교통도 용이하다. 평양은 정말로 찬란한 역사의 도시이다.”(셔우드 홀, 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서울: 동아일보사, 1984], 89).
 따라서 북장로교선교부는 이 지역을 선교의 전략적 거점으로 여겨 마펫을 개척 전도자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 평양에서의 첫 사역은 ‘사랑방 전도’였다. 사랑(舍廊)은 한석진 조사의 거처였는데 이곳이 평양주민들과의 접촉지였다,

     장대현교회의 설립
평양지부로 배속된 마펫은 이곳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는데,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야유를 당하기도 했고, 후일 목사가 되는 이기풍이라는 청년으로부터 돌을 맞아 피를 흘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실하고 대담한 전도사역은 결실을 가져왔고, 1893년에는 평양에서의 최초의 교회인 평양 장대현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1893년 10월 마펫과 한석진은 최치량의 집근처의 새로 지은 집 방 하나를 얻어 교인 4,5명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장대현교회의 모체가 된다. 이들은 얼마 후 최치량을 중심으로 평양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널다리골(후에 鹽店里로 불림)에 있는 홍종대 소유의 큰 집을 매입하여 이전하였다. 이곳에는 판교(板橋)라는 다리가 있어 그 부근을 널다리 골이라고 불렀고, 판교동(板橋洞) 혹은 판동(板洞)이라고 불렀다. 이 때 교인은 7명이었는데, 이 ‘널다리교회’가 평양 최초의 교회이자 평양지방 거점 교회가 되는 장대현교회의 공식적인 시작이 되었다. 채필근, 『한석진과 그의 시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1), 54-55.

     마펫은 한석진과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여 노방전도를 실시하여 그 결과 1893년 말에는 20여명의 새로운 교인들이 출석하였고, 1894년 1월에는 22명에게 학습을, 7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때의 첫 수세자 7인은 최치량(崔致良) 전재숙(田載淑) 문홍준(文興俊) 이동승(李東昇) 조상정(趙相鼎) 한태교(韓台敎) 박정국(朴鼎國) 등이었다. 채필근, 『한석진과 그의 시대』, 56.
 최치량은 후일 집사 그리고 장로가 되었고, 이동승은 영수가 되었다. 또 이 때 첫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마펫은 이 때 신자들의 신앙을 관리하고 지도하기 위해 신자들을 원입교인(願入敎人), 학습교인(學習敎人), 세례교인(洗禮敎人)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구분이 되었다. 마펫과 한석진의 전도로 입신하여 후에 장대현교회의 지도적 인물이 된 이들로는 김종섭, 신상호, 이덕환, 전군보, 한치순 등이 있고, 1907년 초대 목사가 되는 길선주,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은 장대현교회 출신들이었다. 채필근, 『한석진과 그의 시대』, 56.

     1894년 5월 8일(음력 4월 7일) 수요일 저녁 발생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와 그 관련 신자들에 대한 관,민의 박해는 기독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거부였고 심각한 고통을 주었다. 한석진(장로교)진과 김창식(감리교)는 처형 직전까지 갔으나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고종황제의 칙서가 평양감사에게 전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사건은 마펫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서울 연지동에 위치하고 있던 경신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북장로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마펫은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때의 일 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한 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채필근, 122.
 
      이 지역에서의 마펫의 기여는 대단한 것이었다.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여 예배당이 협소하여 1898년부터 2부 예배를 실시하였다. 아마 이것이 한국에서의 주일 2부 예배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결국 1899년 3월에는 예배당 신축 계획을 세웠고, 1900년 정월 첫 주 건축계획을 발표하고 그날 건축 연보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ㄱ자 모양의 교회당이 1903년 완공되었다. 교회 풍금, 교회 종(鐘과 종루(鐘樓)는 미국교회 성도가 헌납해 주었다. 채필근, 『한석진과 그의 시대』, 100-101.
 교회당 건축에 대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평양부 판동(板洞)교회에서 김종섭(金鐘燮)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고, 장대현(章臺峴)에 신축하는 예배당을 준공한 후 이전(移轉) 회집하고 장대현교회라 명명하니 축조(築造)의 굉걸(宏傑)함이 당시 도내(道內)에 가관(可冠이러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 65.
 

장대현교회는 계속 성장하였고 이 교회 사역이 계속되어 점차 평양과 그 주변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장대현교회 또한 여러 교회로 분립되는데, 1903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일부가 분리하여 남문밖(南門外)교회가 설립된다, 교인 50여명으로 출발한 이 교회가 평양제2교회라고 불렸으나 후에 남문밖교회로 불리게 된다. 스왈른 선교사와 주공삼 영수, 황준국 집사가 이 교회 초기 중심인물이었다. 1904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내리(內里)교회가 분립하였다. 1905년에는 평양 창전리(倉田里) 교회와 대동군 임원면 송암리(松岩里)가 분립하였다. 또 이해에 사창골(창천리)교회가 분립되는데 이 교회가 후에 창동교회로 불리게 된다. 평양성의 3번째 교회였다. 1906년 1월에는 산정현(山亭峴)교회가 분립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에서는 ‘산정현교회’가 1905년 분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 상』, 127.
 처음에는 장대현교회당에서 별도로 모이다가 산정현에 교회당을 건립하면서 산정현교회로 불리게 되는데 평양시의 4번째 장로교회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평양성 제4교회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장대현교회는 평양의 모교회이자 관서지방의 모교회가 되었고, 거듭된 분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906년 당시 약 1,500여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1906년 당시 북장로교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평양성내와 그 인근의 복음 사역은 놀라운 진전을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평양성내의 4개 교회의 주일 평균 회집수는 3,000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Anmnual Report, PCUSA, 1906, 28; 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76.


                          평양성 내의 4대 장로교회의 현황

  교회
설립연
  담임목사
 세례교인
 학습교인
한해 영입
  계
장대현
 1893
Moffett, Lee
   914
  334
   167
 1,415
남문밖
 1903
Swallen
   139
  189
   117
   445
사창골
 1905
 Blair
   127
   97
    55
   279
산정현
 1906
Bernheisel
   103
   85
    43
   231

 

1909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다시 서문밖교회가 분립했다. 세 장로와 400여명의 교인들이 분리하여 처음에는 평양신학교 상층에서 예배드리다가 하수구리로 이전하였다. 위창석(韋昌錫), 주공삼(朱孔三), 박영일(朴永一) 장로에 이어 김선두(金善斗)가 장로로 선임되었다. 서문밖교회도 처음에는 마펫과 그래함 리 선교사가 목회자로 일했고, 후에 김선두 목사가 담임이 된다. 이와 같이 장대현 교회를 시작을 평양과 인근 지역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909년 당시 장대현교회의 세례 및 학습교인은 756명에 달했고, 장대현교회를 포함한 남문밖, 사창골, 산정현, 서문밖교회의 등 다섯 교회의 학습 및 세례교인 수는 2,500명에 달했다. 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79.
 장대현을 시작으로 하는 마펫의 전도와 교회 설립 사역은 계속되어 1909년까지 26개 교회 26개 교회를 설립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봉산군 모동교회(1894), 와성창교회(1894), 평원군 지덕교회(1895), 구성군 신시교회(1895), 평원군 삼관교회(1896), 숙천군 읍교회(1896), 중화군 읍내교회(1897), 강진군 강진교회(1897), 대동군 장천교회(1897), 통호리교회(1897), 덕지교회(1897), 강동군 열파교회(1898), 남궁리교회(1900), 현좌동교회(1900), 양포교회(1900), 안주성내교회(1900), 평원군 팔동교회(1900), 문창리교회(1901), 남문밖교회(1903), 영유읍교호(1903), 이천리교회(1904), 사창골교회(1905), 입석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대동군 황촌리교회(1907), 서문밖교회(1909). 김명구, 247을 참고하여 보완함.
를, 그가 한국에서 은퇴할 때가지 그가 설립하거나 설립에 관여한 교회는 1천여 교회에 달한다고 한다. 마펫은 전도와 목회, 신학교육을 담당하면서도 매월 60개 이상의 교회를 방문하고, 400여명 이상의 세례지원자들을 세밀히 검토하고, 300여명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하면, 여러 교회의 문제들을 상담하거나 논의하고, 거의 1천명에 달하는 학습교인을 만나는 일을 수행했다고 한다. Moffett's Letter to the Foreign Mission Committee, June 27, 1898; 서명원, 『한국교회성장사』, 155; 『마포삼열 박사 전기』, 267.
 

     신학교의 설립
마펫은 지역 순례와 개척전도, 그리고 교회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지만 특히 그가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신학교의 설립이었다. 평양을 거점으로 이북지방에서의 순회전도를 통해 신자들을 확보하고 또 교회가 설립되어 안정적으로 자라가게 되자 그는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885년 당시 장로교의 세례교인은 6명에 불과했으나 1890년에는 1210명, 1895년에는 286명, 1900년에는 287개 처 교회 3,690명으로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지도자 양성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한국인 지도자 양성을 위한 첫 시도는 1890년 초가을 언드우드 집 사랑방에 모였던 ‘신학반’(Bible Class)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서 6월에는 중국 주제 미국북장로교회의 네비우스 선교사가 내한하여 서울 주재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정책에 대한 강연에서 사경회(査經會) 개최를 중시했는데, 이에 부응하여 ‘신학반’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때 김관근, 백홍준(이상 의주), 서경조, 최명오(이상 소래),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이상 서울) 등 7명이 참여하였다. 1892년에는 학생 수는 3배나 증가되었는데 수학 기간은 1개월이었다. 마펫이 평양에서 선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지방공의회가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평양공의회의 마펫은 서울에서 시행해 오던 신학반을 정규 신학교로 전환하여 교육시키려고 구상했고, 평양공의회는 ‘신학과정 위원’을 선정하고 장대현교회의 두 장로 김종섭(金宗燮)과 방기창(邦基昌) 두 사람을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고 마펫은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장로교신학교의 시작이었다. 1902년 신학과정위원은 교육기간을 5년으로 하여 5학년의 전과목을 결정하고 다른 지방 공의회에도 신학생 추천을 요청했다. 이 해에 추천된 이는 길선주,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등 4사람이었다. 이들은 마펫의 장대현교회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학생 수는 6명이 되었다. 1903년에는 평양공의회에서 추천된 6명을 데리고 제1학년 과정을 3개월간 가르쳤다. 이 때의 교수는 마펫을 비롯하여 배위량, 소안론, 이길함, 한위렴, 편하설 등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평양신학교가 정식 개교되었다. 이 신학교육을 주도한 인물이 마펫이었다. 당시 신학교 설립에 대해 서울 선교부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또 시기상조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마펫은 토착교회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른바 ‘네비우스 정책’의 투철한 신봉자였다. 『마포삼열 전기』, 268.

      1903년 가울 평양공의회는 5년간의 교과목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는데, 교과목은 정식과목과 열람과목(閱覽科目)으로 구분했다. 정식과목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었고, 열람과목은 방학동안 자습하는 독서과목이었다. 당시는 일 년에 3개월 수업하고 나머지 9개월은 가정에서 자습하는 기간이었다. 이 때 채택된 교과목은 아래와 같다.

                         1903년에 채택된 평양신학교 교과과정 채필근, 『한석진과 그의 시대』, 120-22, The Minutes of the Ninth Annual Meting of 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1902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2), 21-24. 양 기록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일단 채필근의 기록을 따랐고, 과목 해설은 선교공의회 회록을 참고하였음.


학년
  정식과목  Academical Studies
   열람과목   General Reading
1
삼합복음(三合福音), 창세기, 소요리문답, 구약지지(舊約地誌), 구약총론,
신도요론(神道要論), 강도법, 국어,
음악
만국통감1,2
천도강대(天道講臺)
복음강대(福音講臺)
기독실록(基督實錄)

2
사도행전, 출애굽기, 신도계요, 신도요론, 교회사기(中古), 신약지지(新約地誌), 신약총론, 도덕학, 심리학, 강도법, 국어, 음악
구약(民數記-士師記)
신약(加拉太-帖撤後), 만국통감3,4
신도요론(神道要論)
3
고린도인서, 에베소인서, 이보아서성례(以寶亞書聖禮), 신도요론(救學), 교회사기(中世代), 교회정치, 강도법, 국어, 음악

구약(路得記-以士帖)
신약(哥林多後-提摩太), 신도요론2, 만국사기, 로득정교기략(路得政敎紀略), 구세약기(救世略記)
4
요한복음, 로마인서, 시편, 예레미야서, 교회사기(更正前, 更正時),
목사지법, 말세학, 권징조례, 예배모범, 신도(神道), 국어, 음악

구약(約百-雅歌,哀歌), 신약(雅各書-猶大書), 미국사기, 양교변정(兩敎辯正), 신도요론3, 고성임죄(古聖任罪)
5
히브리서, 묵시록, 레위기, 다니엘서, 교회사기(更正後), 전도회사기, 성신지사(聖神之事), 목사지법, 교수법, 국어, 음악

구약(何西書-馬拉基)

  
 * 과목해설
    三福音合: 공관복음서, 加拉太-帖撤後: 갈라디아서-데살로니가후서,
    路得記-以士帖: 룻기-에스라, 哥林多後-提摩太: 고린도후서-디모데,
    約百-雅歌: 느헤미야-아가, 何西書-馬拉基: 이사야-말라기
    만국통감(Universial History): Sheffield's !st and 2nd vols.
    기독실록(基督實錄): Williamson's Life of Christ.
    신도게요(信道揭要): Confession of Faith
    복음강대(福音講臺): Study of Sermon in the 'Street Chapel Pulpit' by Du Bose
    구세약기(救世略記): Philosophy of the Plan of Salvation by Hayes.
    양교변정(兩敎辯正): Romanism and Protestantism by James.

1904년에는 15명이 입학하였고, 학생 수는 21명이 되었고, 이 해에 마펫이 공식적으로 제1대 교장이 되었다. 1906년에는 1906년에는 50명이 입학하였고, 신학교 교수로는 북장로교의 마포삼열(Samuel A. Moffet)을 비롯하여 이길함(Graham Lee), 언더우드(H. G. Underwood), 배위량(W. B. Baird), 곽안련(A. D. Clark) 등이 참여하였다. 북장로교 외에도 다른 선교부가 교수를 파송하엿는데, 남장로교는 이눌서(W. P. Reynolds), 구례인(J. C. Crane)을, 캐나다 장로교는 부두일(W. R. Foote), 업아력(A. F. Robb)을, 그리고 호주장로교는 왕길지(G. Engel)를 교수 요원으로 파견하였다.
      1907년에는 학생 수가 75명으로 늘어났고 그해 6월 20일에는 제1회 졸업식이 개최되었는데 졸업생 7명(의주: 서경조, 한석진, 평북 구성군: 양전백, 평양: 길선주 방기창, 송린서, 이기풍)은 그해 9월에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이 7명중 직접적으로 마펫의 전도를 통해 개종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가 길선주, 방기창,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5명이다.
      1907년에는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 여사(Mrs. MaCormick)가 5천 달라를 기부하여 평양 하수구리(下水口里) 100번지 6천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09년 교사를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 1911-1913년 어간 신학교 교사 주변에 6동의 기숙사가 건축되었는데, 두 동은 매코믹 여사가 기부한 것이었기에 ‘매코믹기념 기숙사’로 불렸고, 북장로교의 두 동은 ‘마르다 기념기숙사’로, 남장로교는 ‘마르다 기념기숙사’로, 호주장로교는 ‘빅토리아 기념기숙사’로 불렸다. 마펫은 신학교육을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건축을 관장하고 학교 주변에 나무를 심는 일 등까지 세심하게 관리했다.
     1909년 당시 학생 수는 138명이었고 이해 여름 제2회 졸업생 8명이 배출되었다. 졸업생을 위한 연장교육인 연구과가 설치된 때는 1909년이었다. 연구과는 연 1회 한 달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학생수는 계속 증가하여 1916년에는 189명으로 증가했다.  
     이상에서 보는 바처럼 평양신학교 발전과정에서 마펫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01년부터 학교를 관장했지만 1904년 공식적으로 교장인 된 후 1924년 교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33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혼신의 힘을 쏟았다. 한국에서의 장로교 신학교육에 있어서 마펫의 기여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평양 삼숭(三崇)학교에서의 교육
마펫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교육자로 활동하는 한편 평양지방의 학교 설립에도 관여하거나 영향을 끼쳤고 직접적으로 학교 교육에도 관여하였다. 마펫은 1894년 숭인상업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마펫이 평양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의 협조로 설립한 학교로서 처음에는 ‘숭인중학교’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취직이 잘 되는 숭인상업학교로 개칭한 것이다. 1907년 학교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였다. 후일 한경직이, 그의 뒤를 이어 김재준은 이 학교 교유(敎諭, 지금 교사) 겸 교목이 된다. 천사무엘, 『김재준』 (서울: 살림, 2003), 81.
 
     마펫은 이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을 비롯하여 이 지방 300여 학교 설립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평양의 ‘3숭’으로 불리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숭실대학), 숭의여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숭실학교는 1897년 10월 10일 윌리엄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중등반’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사실은 마펫의 평양에서의 사역의 결과로 가능한 일이었다. 1894년 마펫의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마펫의 주도하에 이영언(李永彦)을 교사로 시작한 사숙(私塾)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마포삼열 전기』, 273.
 개교 당시 학생은 13명이었다. 이 학교가 1897년 베어드의 사랑방학교의 시작이 되었고, 1901년에는 평양 신양리에 새 교사를 지어 입주하면서 진실 혹은 진리를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실학당’(The Venerate Truth School)으로 명명하게 된다. 윌리엄 베어드는 마펫과는 근친한 사이로 매코믹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였고 평양에서도 상호 협력했다. 베어드가 숭실의 교장이었지만, 마펫은 베어드 부인(Mrs Baird, 식물학), 블레어(Rev W. Blair, 미술, 체육)와 그 부인(Mrs Blair, 음악), 웰즈(Dr J. H. Wells, 위생), 번하우젤(Rev Bernhesiel, 산수, 지리) 등과 더불어 숭실학교에서 성경과 천로역정을 가르쳤다. 숭실대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숭실대학교백년사』, 제1권 (서울: 숭실대학교, 1997), 81.

     1901년 최초의 졸업생 3명이 배출되었고, 1905년에는 학제가 5년제 중학과정으로 개편 되었고, 그해 9월에는 대학과정을 신설하여 1906년 8월부터 감리교와 공동운영하였으나 1908년 숭실대학으로 분리 운영하였다. 즉 1908년 대한제국 하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4년제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합성숭실대학(The Union Christian College)로 인가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펫은 이 학교의 든든한 협력자였고 조역자였다. 특히 학교운영자금을 모금하였고, 미국북장로교 선교본부와 접촉하여 학교 시설, 교사 수급과 봉급 확보 등을 도왔다.
     특히 마펫은 베어드(1897-1915), 레이너(R. O. Reiner, 1815-1918)에 이어 숭실학교의 제3대 학장(1918-1928)으로 10년간 학교교육에 진력하였다. 즉 2대 학장이었던 레이너(나도래)가 3년간 일 한 후 1918년 4월 사임하게 되자 마펫이 그 뒤를 이어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가 학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25년에는 일제에 의해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지만, 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의 영향력 있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게 되어 1928년 9월 사임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매쿤(尹山溫, George S. McCune, 1872-1941이 학장직을 계승하게 되는데 그가 4대 학장이었고 그의 재임시 신사참배 거부로 학장과 학교가 수난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마펫이 숭실 교장직을 사임했으나 숭실대학의 이사장으로 실제적인 경영자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마펫은 매쿤과 더불어 신사참배는 받아드릴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 점에 대한 「매일신보」의 보도는 아래와 같다.

작년 11월 평남도 야스다께(安武) 지사로부터 평안남도 기독교계 각 학교 당국에 신사참배를 명하였든 바 이 문제가 원만한 해결이 못되어 지난 18일에 평양에 잇는 긔독교 북장로(北長老)파 관게 숭실중학교 숭실전문의 교장인 선교사 윤산온(尹山溫)씨와 동경영자 마포삼열씨가 평남도지사를 방문하고 최후로 신사불참배를 표명하엿기 ㅼㅐ문에 평남지사는 즉시 숭실중학교장의 인가를 취소하엿고 동시에 숭실전문학교 교장의 인가 취소의 수속을 총독부에 발벗다 함은  긔보한 바와 갓거니와 금 20일에 총독부에서는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인가를 취소하엿다.” 「每日申報」, 1936. 1. 21일자.


신문보도와 같이, 매쿤 교장은 교장직에서 해임된 후 1936년 3월 한국에서 추방되었고, 숭실대학은 1938년 3월 31일 자로 폐교되고 만다. 이만열, 『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190.
 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마펫은 교장직무를 대행하면서 학교를 이끌었다.
      마펫은 1903년 10월 31일 평양 상수구리에서 숭의(崇義)여학교를 설립했다. 그 시작은 1897년 평양 신양리에서 그래함 리 선교사가가 자신의 집에서 시작한 소학교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여자학생들이 진학할 여학교가 없음을 고려하여 마펫은 여성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인 숭의여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북장로 선교본부는 마펫의 여학교 설립 구상을 적극 지원하였고, 평양의 장로교 병원 건물을 임시교사로 하여 개교하게 된 것이다. 베스트(裵貴禮, Miss Margaret Best, 1867-1942) 선교사가 제1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2년간 일하고, 눅스 선교사(鮮于理, Miss Verma L. Snook, 1866-1960)가 제2대 교장이 되었다. 1907년에는 교사를 신축하고 1908년에는 중등과 제1회 졸업생 5명을 배출했다. 1911년에는 교지를 확장하였고, 여학교로서 지역 인제양성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특히 스눅스는 학생들의 실력차를고려하여 단계별 교육을 실시하였고, 성경, 한문, 산수, 역사, 지리, 생물(동물, 식물), 가사(요리, 재봉, 바느질) 등 다방면의 학습을 위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고, 미국의 중등학교가 사용하던 교제를 한국현실에 맞게 편역(編譯)하는 등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숭의여학교도 일제하에서는 민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35년 신사참배문제가 제기되자 1936년 교장 눅스는 메쿤과 마찬가지로 이를 거부하여 1936년 1월 26일 교장직에서 해임되어 그해 9월 한국을 떠났다. 이 학교도 1938년 3월 31일 숭실과 함께 폐교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펫은 평양신학과와 평양과 그 인근 학교의 설립과 교육, 교육적 기여 때문에 그를 대표적인 교육 선교사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장로교 치리회의 구성과 장로교제도 설계
마펫은 복음전도자이자 교육선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의 설계자이자 장로교 치리회 구성과 조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설립한 평양의 신학교가 1907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자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치리회 조직이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1907년 9월 노회가 구성되는 데 이를 독노회라고 불렀다. 이 때 마펫은 첫 노회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장로교 치리회 조직에 기여하게 된다.
      노회 조직에 앞서 선교부 간의 첫 협의체는 연합공의회였다.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및 빅토리아 장로교 연합공의회’(United Council of the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조직하였으나 호주의 유일한 선교사였던 데이비스의 갑작스런 서거(1890. 4)로 곧 해체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남장로교회가 1892년 선교사를 파송하고, 호주 빅토리아장로교도 제2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자 1893년 1월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Church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이 장로교 선교부 간의 연합을 위한 기구였다. 1901년부터는 선교사들로만 모이는 영어회의와 한국인 대표를 참석시키는 한국어 회의로 구분되었다. 처음에는 권고적 권한만을 지녔으나 1901년 무렵부터 점차로 정치적인 권한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이 선교공의회가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실제적인 치리회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공의회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첫째는 선교지역의 구분과 분담이었다. ‘교계예양’ 혹은 ‘예양협정’(Comity arrangement)이라고 불리는 이 협약은 선교부 간의 중복 투자나 불필요한 경쟁을 예방하기 위해 조치였다. 이에 대해 『장로교회사 전휘집』(長老敎會史典彙集)에서는 “호상 조력(互相助力)하며 호상물조(互相勿阻)하기로 초차(初次) 계약(契約) 하였다”라고 하였고 기록하고 있다. 『朝鮮長老敎會史典彙集』, 13.
 몇 차례의 재조정을 거쳐 1909년 선교지역 분담은 완전히 확정되었다. 선교공의회가 남긴 또 한 가지 사업은 한국선교의 기본 원칙에 합의한 점이다. 이 기본원칙은 10개항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상류 계급보다는 근로 대중 계급 전도를 강조하고, 청소년과 부녀자 교육과 전도를 중시하고, 의료선교 활동, 성경번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종교서적은 순 한글로 제작하며 한국인 전도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10개항의 원칙은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을 근간으로 하여 구체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장로교회 제도 형성기에 마펫은 호주장로교의 엥겔(王吉志, Gelson Engel)과 더불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1901-1902년 선교공의회’ 회원은 41명이었고, 마펫은 신학교육위원회 책임자로 신학교육 문제를 주도하였고, 교회정치위원회 책임자로 한국장로교회의 정치 제도를 확립하는 일에 지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The Minutes of the Ninth Annual Meting of 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1901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1), 1.
 ‘1902-1903년 선교공의회’의 경우 마펫은 두 중요한 위원회, 곧 교회정치위원회와 교회표준문서위원회의 대표로 호주의 엥겔과 더불어 한국에서 장로교 제도 정초 작업에 기여하였다. The Minutes of the Ninth Annual Meting of 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1902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2), 3-4;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17), 104-13.

      마펫은 이런 장로교회의 제도적인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학습, 세례, 입교 과정에서 신생교회인 한국교회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상제사 문제와 중혼(重婚) 혹은 복혼(複婚)의 문제였는데, 마펫은 친구인 베어드와 입장을 같이 하여 엄격한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조상제사 금지는 물론 복혼자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 회원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상규, “교회는 중혼자를 받아드릴 수 있는가?” 「동서신학」 2 (2019. 12): 19.
    
      마펫과 마찬가지로 매코믹신학교 출신이었던 스왈른(蘇安論, William L. Swallen)은 복혼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중혼자를 교회가 받아드릴 수 있는가에 대한 윌리엄 스왈른의 입장에 대해서는, 윌리엄 스왈른 (이상규 역), “중혼과 교회” 「한국기독교문화연구」 14 (2020. 12): 161-78을 참고할 것.
 마펫은 베어드와 더불어 복혼관계를 실제적으로 청산하기 전에는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중혼자를 교회가 받아드릴 수 있는가에 대한 윌리엄 베어드의 입장에 대해서는, 윌리엄 베어드(이상규 역), “중혼자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한국기독교문화연구」 12 (2019. 12), 343-81과 “중혼자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2”, 「한국기독교문화연구」 13 (2020. 6): 207-361을 참고할 것.
 이것이 신생교회에게 바른 윤리적 가치를 심어주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건실한 장로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S. A. Moffett's letter to F. F. Ellinwood, Oct., 22, 1910.
 서상륜은 자신의 어학선생이자 한국교회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 간의 협의 기구였던 선교공의회는 1903년 9월부터 ‘장로교공의회’(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로 개칭되었고, 선교사들 외에도 한국인 대표, 곧 장로나 조사(helper)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01년 당시 장로교공의회 휘하에는 7개 위원회, 곧 선교지구획위원회(Committee on Arrangement), 통계위원회(Committee on Statistics), 신학교육위원회(Committee on Theological Education), 교회정치위원회(Committee on Church Government), 표준문서번역위원회(Committee on Translation of  Church Standards), 혼례관계위원회(Committee on Marriage Relations), 법규위원회(Committee on Rules and By-Laws)를 두고 있었으나, The Minutes of the Ninth Annual Meeting of 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Seoul: Methodist Pub. House, 1901), 1-2.  
 1903년 장로교공의회로 개편되면서 13개 위원회로 세분화 되었다. 자격심사위원회(Committee on Credentials), 찬송가위원회(Hymn Book Committee), 회계감사위원회(Committee on Auditing Treasurer's Accounts), 한국교회 명칭위원회(Committee on Name of Native Church) 등이 첨가된 것이다. 마펫은 1901년 이래로 신학교육위원회와 교회정치위원회를 이끌면서 한국에서의 장로교 제도와 의식을 문서화하고 제도화 했다. The Minutes of the Ninth Annual Meeting of the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Seoul: Methodist Pub. House, 1904), 6-8.
 이런 점에서 곽안련은 그를 한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장로교 공의회가 모체가 되어 1907년 9월 17일 최초의 장로교 노회인 ‘조선야소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를 ‘독노회’(獨老會, the Independent Korean Presbyterian Church)라고 불렀다. 이때 마펫은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장로교공의회에서의 활동을 고려하여 그를 창립노회의 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회원은 한국인 장로 40명, 주한 장로교선교사 38명 등 78명이었다. ‘독노회’는 전국의 산제한 교회를 효과적으로 치리(治理)하기 위해 노회 산하에 7대리회(代理會)를 두었는데, 경충대리회(관할교회 수 50교회), 평북대리회(160여개 교회), 평남대리회(90여개 교회), 황해대리회(50여개 교회), 함경대리회(80여개 교회), 전라대리회(130여개 교회), 그리고 경상대리회(190여개 교회)가 그것이다.
    이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교세는, 교회가 785개 처, 신자가 75,968명, 세례교인은 18,061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목사 선교사는 49명, 한국인 장로는 47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목사의 장립은 시급한 요구였다. 그래서 노회의 조직과 함께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길선주(1869-1935), 방기창(1951-1911), 서경조(1852-1938), 송인서(1867-1929), 양전백(1869-1933), 이기풍(1865-1942), 한석진(1868-1939) 등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독로회록을 보면, “신령하고 크도다. 이 아름다운 노회여”로 시작되는 서문이 나오는데, 이 문서는 길선주와 한석진이 초안했으나 마펫이 검토한 것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로회회록 (1908), 1-3.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신경(信經, Confession of the Faith)으로 채택하였다. ‘12개 신조’는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 성경의 기본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이때 채택한 12개 신조는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였고, 단지 서문만 한국교회에 맞게 수정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마펫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장로교치리회와는 달리 1905년 9월 11일,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협의체를 구성했다. 즉 150여 명의 장,감 선교사들은 이화여학교 예배당에 모여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결성하고, 언더우드(H. G. Underwood)를 초대의장으로 추대했다. 연합공의회는 한국에서 선교사역에서의 협력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C. A. Clark, 149: Hugh Miller, “The History of Co-operation and the Federal Council,” Korea Mission Field (이하 KMF, December, 1934), 256.
 그래서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장,감 양 교단이 협력해야 할 여러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선교지 구획위원회, 한국교회 관계위원회, 통합찬송가편찬위원회, 교회신문 통합위원회, 그리고 북장로교가 중심으로 발행하던 Korea Mission Field 발간 위원회, 기도달력(Prayer calendar)발간위원회 등을 두고 상호 연합과 통합을 추구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장,감 선교사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 이름을 버리고 ‘대한예수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구체적으로 캐나다에서 작성된 신조를 ‘대한예수교회’의 신조로 삼을 것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민족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교회일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북장로교의 스왈론(W. L. Swallon)은 “한국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개제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하여 일치의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헐버트(H. B. Hulbert)도 “서로 협조해서 궁극적인 일치를 가져올 때 비로소 도덕적이요 지적이요 사회적인 활동의 결실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장.감 양 선교부가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민경배는 그 불가능성을 3가지로 설명했는데, 선교사를 파송한 모교회(母敎會)의 모호한 태도, 당시의 기구적 교회 일치에 대한 무관심, 주한 선교사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와 ‘미끈한 구실’ 등을 그 원인으로 들었다. 민경배, 270-71.
 사실상 장,감연합에 대해 감리교측과 미국남장로교회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미국 남장로교는 장로교 공의회에 공식 서한을 보내 “후일에 여차히 타 교회와 연합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가하나 지금은 유안(留案)하는 것이 위호(爲好)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북장로교 측도 다 찬성한 것은 아니다. 이를 강하게 반대한 이가 마펫과 로버츠(라부열, S. L. Roberts)였다. 마펫은 언약파의 후손으로 장로교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보수주의자였다. 결국 장,감 양 교파의 단일교회 조직 안은 폐기되었다.
    한국교회가 계속 발전해 감에 따라 노회가 조직된 지 5년 후인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게 된다. 1911년 9월 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모인 제5회 노회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고, 이 결의에 따라 1912년 9월 2일 평양에서는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명(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총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 總會)였다.
    총회장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부총회장에는 길선주 목사가, 서기에는 한석진 목사가, 회계에는 방위량 선교사가 각각 선임되었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장로교의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노회 7, 당회가 조직된 교회 134교회, 미조직교회 1,920개 처,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선교사) 목사 77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3,008명, 학습교인 26,400명, 총신자수 127,228명이었다.

     * 1912년 총회 조직 당시의 노회별 교세통계

구분
함경
황해
남평안
북평안
경충
경상
전라

목사
14
10
28
26
12
18
20
128
장로
16
34
96
15
21
18
25
225
조사
15
36
43
35
32
40
29
230
교인수
9342
11439
30000
26948
10075
23985
15439
127228
세례인수
2325
5718
12601
11072
3691
7817
9514
53008
장립집사
0
0
0
0
2
0
5
16
신학도
16
21
54
40
15
13
21
180
예배처소
155
171
232
469
182
457
388
2054
예배당집
130
115
227
189
126
440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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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가 조직 된 후 첫 3회기까지는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1대), 엥겔(2대), 유진 벨(裵裕祉, Eugene Bell) 목사가 총회장을 맡았으나 이후 한국인으로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마펫은 1915년(4대)과 1918년(7대) 부총회장으로, 1919년에는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이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이나 간섭이 심화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인이 아닌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세우기로 하고 마펫을 선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펫은 한국장로교회의 조직과 제도적 정비에도 기여한 것이다.

4. 마무리: 마펫의 기여와 신학, 신앙유산

마펫의 신학과 생활
     마펫은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좀 더 광의로 말하면 건실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설과 신봉했고, 역사적 기독교, 혹은 장로교 전통을 따라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고수하였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를 신뢰했다. 특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중시했는데 이런 신학적 견해는 매코믹신학교 전통을 추수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도’는 그가 늘 강조했던 가르침과 설교의 중심이었다. 마펫은 ‘조선교회에 기함(고전 2:8)’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의 다짐처럼 한국에서 체류하는 45년 동안 십자가의 도를 전한 선교사였다.  
    그는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를 건실한 보수주의신학의 토대위에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에서의 선교를 회고하면서 한국교회 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은 북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또 이해는 미국북장로교회로 볼 때도 현대주의 신학으로 논란을 겪던 의미 있는 해였다. 이 때 마펫은 다시 이렇게 썼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한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펫의 이 진술은 자신의 신학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 신학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당시 한국교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진보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우려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고 그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아아제국 중에서 한국교회가 건실하게 성장한 대표적인 나라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를 거듭하여 우리는 그저 이 백성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일은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마삼락, 『아세아와 선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선교문제연구원, 1976), 84.
 교회성장의 근원적 요인이 성령의 역사라는 점은 드러낸 것이다. 마펫의 아들 휴 마펫(마삼락)은 한국인의 신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The Christians of Korea)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모진 고난을 이기며 환란 중에서도 주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쓰며 전도에 열심이다.” 이것은 그의 선친이 한국에 심어준 신앙의 유산이었다. 휴 마펫은 한국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민족”(a nation on the run to God)이라고 불렀다.
      마펫 선교사는 많은 편지를 남겼다. 실로 그는 ‘편지 쓰는 선교사“라고 불릴 만큼 많은 편지를 썼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46년간 인디에나 주 매디슨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을 마펫의 모친이 1912년 사망 시까지 보관하다가 그 이후는 넷째 아들 하워드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1944년 하워드 집의 화재로 편지가 전소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문서들은 『마포삼열 자료집』 1,2,3,4으로 편집, 출판되었고 마펫과 한국선교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옥성득 책임 편역, 『마포삼열 자료집』 1, 2, 3,4 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은퇴 그 이후, 가계와 신앙 유산
     1934년 1월 25일 은퇴 후에도 평양에 거주하던 마펫은 1936년 7월 3일부터 14일까지 소래로 휴가를 다녀 온 후 열사병에 걸려 언어장애가 왔고, 요양차 9월 24일 한국을 떠났다. 그는 한국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기고 그에게 돌려질 수도 있는 영광을 뒤로 하고 말없이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10월 13일 켈리포니에아 후버에 도착하여 치료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그의 아내 루시아 마펫의 병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10월 25일 켈리포니아 주 몬로비아(Monrovia)에서 75세를 읽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99년 6월 1일 35세 때 의료선교사로 1897년 내한했던 엘리스 피시(Alice Fish Moffett)와 결혼했는데, 두 아들 제임스(James Mckee)와 찰스(Charles Hull)을 남기고 1912년 7월 12일 이질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15년 6월 30일 엘리스 피시의 4촌인 루시아 피시(Lucia H. Fish, 1877-1962)와 재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사무엘(Samuel Hugh, 마삼락), 하워드(Howard Fergus, 마화열), 그리고 토마스(Thomas Fish)가 그들이다. 마펫의 다섯 형제 어머니들이 서로 사촌간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이복형제(half brothers)가 아니라 부모님의 4분지 3을 공유한 ‘3/4형제들’(three-quarter brothers)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둘째 부인 루시아(Lucia Fish)는 1962년 3월 16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펫의 자녀들 중  셋째 아들 휴 마펫(Samuel Hugh Moffett, 1916-2015)은 마삼락(馬三樂)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1916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휘튼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후에는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연경(燕京)대학교와 난징(南京)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나(1948-1950), 1951년 1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5년 11월에는 아버지를 이어 제2대 한국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선교부에서 잠시 일하다가 서울로 전임되어 1981년까지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사 교수로 활동했다. 또 아시아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설립된 아시아연합신학대학(ACTS) 초대학장으로, 그리고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대한성서공회 이사 등으로 봉사했다. 그러다가 1981년 한국에서 은퇴하였고, 곧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1986년 은퇴할 때까지 아시아교회사, 선교, 에큐메닉스 등의 과목을 교수하였다. 2015년 2월 9일 미국 프린스톤에서 9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한 살 아래 동생이자 마펫의 넷째 아들 하워드 마펫(Dr. Howard F. Moffett, 1917-2013)은 한국이름 마화열(馬和烈)로 불렸는데, 그도 1917년 8월 16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미국 휘튼대학과 노스웨스튼대학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고, 1948년 12월부터 1993년까지 45년간 대구 동산병원 의사로 혹은 원장으로 봉사했다. 6.25 전쟁 때는 미해군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9.28서울 수복에 참여했다. 이처럼 한국을 위해 기여한 하워드 마펫은 1993년 은퇴하였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해변가 카핀테리아(Capinteria)에서 노후를 보냈고, 후에는 산타바바라에 위치한 사마르칸트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중 2013년 6월 2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아들 토마스 피시 마펫(Thomas Fish Moffett) 또한 평양에서 출생했는데, 그 역시 휘튼대학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고,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발제 2>

“마포삼열(Samuel A. Moffett)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

                                           박 응 규 교수
                                     (아신대학교/역사신학)

     여는 말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영적 침체현상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어느 때 보다도 보다 강력한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교회역사 속에서 일어난 개혁과 부흥의 배경을 살펴보면, 과거의 역사를 고찰하는 가운데 미래로 전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을 역사신학적으로 고찰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는 작업은 매우 긴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 부흥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평양에서 일어난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을 논할 때,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구조적 틀을 조성한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1864-1936)의 역할과 공헌을 간과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한국의 교회역사가들이나 지도자들에 의해 “한국장로교회의 아버지(혹은, 설계자),” “한국장로교회의 산파”로 존경받는 마포삼열은 1907년 대부흥운동 당시에 안식년을 맞이한 기간이어서, 설교자로나 주역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어도, 영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는 신앙적 기반을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 조성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 이 논문은 졸고, “마포삼열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역사신학논총」 13 (2007): 80-112)을 토대로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마포삼열박사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박사전기」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73), 19;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His Life and Work in the Development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1890-1936” (Ph. D. di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1983), 127, 139. 마포삼열은 1906년 6월부터 1907년 8월까지 두 번째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마포삼열은 평양 지역의 교회개척과 교회성장의 기틀을 확립하였으며,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북한 선교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는 경건주의적 열정을 지니고 “거리의 선교사”로 전도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개혁신앙과 장로교적 특성을 선명하게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영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교회가 성장하고 영적각성을 도모할 수 있는 신앙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William N. Blair, "Precious Memories of Dr. Samuel A. Moffett," 1, He was "the pioneer missionary in North Korea"; 마포삼열박사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박사전기」, 29-34.
 미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로버트 스피어 (Robert Speer)도 마포삼열이야말로 “모든 선교지에서 가장 현명한 선교사” 라고 평가하였다. "Dr. S. A. Moffett: The Eminent Missionary from Madison," Jeffersonville News (February 1907). Samuel A. Moffett Archives at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Robert Speer Library (이후로는 SAM Archives라고 약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19세기 말에 선교사로 파송되는 마포삼열이 평양대부흥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 논의하고자 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당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과의 연관성도 염두에 두고 고찰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 당시에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을 경험한 선교사들은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으로 일어난 수많은 회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J. R. Moose, "A Great Awakening," Korea Mission Field (이후로는 KMF) II: 3 (January 1906): 51.
 “전(全) 교회역사를 통해 가장 현저하게 성령께서 임재한 사건”이요, George T. B. Davis, Korea for Christ, 62. 원문에서는 “the most remarkable manifestation of God's power in the entire history of the church”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현대 선교에 있어서 매우 경이로운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J. Z. Moore, "The Great Revival Year," KMF III: 8 (August 1907): 115.
 한국에서 일어났던 대 부흥운동은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John R. Mott,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1904; idem, Address and Papers, II (1946), 310, 326f; Chang Ki Lee, The Early Revival Movement in Korea (1903-1907): A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Zoetermeer: Boekencentrum, 2003), 69ff.
 그리고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그들이 목격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 대한 소개는 적지 않은 영향과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유산은 한국장로교회의 부흥운동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기에 본고에서는 마포삼열을 중심으로 그 연관성을 천착해 보고자 한다.

            I.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과 평양대부흥운동

    A.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특성

초기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 미국 개신교도들은 거의가 복음주의 신앙, 다시 말해 경건주의와 개혁주의 유산이 결합된 신앙형태를 견지하였고,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 미국의 영적 대 각성 운동의 토양 속에서 배태되었다.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Evangelicalism," in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ds.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on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1), 23.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고, 통일성 보다는 다양성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 특성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중생의 필요성,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 부흥주의와 전도와 선교의 열정, 그리고 성결한 신자의 삶이라는 교리들을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초기 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난해한 작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대체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을 포함하여 “보수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이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을 지칭하는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 홍치모,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51 (1984): 130.

     전성천에 의하면,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는 몇몇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구파 장로교 신학사상이 지배적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극도로 보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Sung C. Chun, "Schism and Unity in the Protestant Churches of Korea" (Ph. D. diss., Yale University Press, 1955), 67.
 구학파 장로교 전통을 “근본주의”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은 미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미흡한 견해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대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 교회에 널리 알려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근본주의 개념자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주의의 도전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구 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와의 연관성을 강조한 나머지 이 두 신학적 입장을 동일하다고 하는 주장은 매우 피상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재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에 대해서 다음의 저서에 상술 되어있다. 박응규, 󰡔한부선 평전: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4), 148-65.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어느 한 유형에 속한 특성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특성들을 공유했다. 종교개혁 신학을 전반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정통교리나 신조를 중시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의 구학파 장로교적 특성도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박응규, “구프린스톤 신학과 한국장로교회,” 「ACTS 신학과 선교」 (2005).
 그런 면에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는 신구학파적인 신학적 전통이 모두 존재했으며 그 근거로는 칼빈주의적 신학, 장로교회 정치형태, 건전한 부흥회, 그리고 융통성 있는 목회자 교육제도 등을 들 수 있다. 한철하, “보수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 한국교회의 경우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상」 7 (1970): 99.
 1918년에 창간된 초기의 「신학지남」에 실린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의 특성이 “신본주의적이요, 복음주의적이요 지정의의 균형이 잡혀 있고, 극히 실용적인 입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이지적 추상성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들”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한철하, “보수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 95.

     1893년 “장로교 정치를 보유하는 선교 공의회”는 미국 북 그리고 남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나중에 호주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다. 공의회의 목적은 장로교 정치와 개신교 신앙을 고수하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1904년 선교공의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한국 장로교회의 교리적 뿌리가 될 수 있는 한국어 교리 문답서를 약 5,000부 출판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가 공식적인 신조로 채택한 12신조는 칼빈주의적이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되었다. 이 신조는 1902년에 공의회에서 선정한 신경준비위원들이 약 3년 동안 각국의 신경들을 수집하고 비교 연구하던 중에 1905년에 인도 장로교회에서 새로 채택된 신경을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 신조가 아시아 각국 장로교회의 공통신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교회에서도 채택되기 위해 제출되었다. 이 신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이 신본주의적 특징과 복음주의적 성격과 실용적 성격을 융합시켰으며, 예정론을 구원론에 포함시킴으로 칼빈 이후의 정통주의 신학보다 칼빈 신학자체에 더 큰 영향을 받았고, 구원에 있어서 칭의의 차원과 함께 성화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을 추구하는 특성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의 내용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도에 대한 열정이 강하였다.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을 통해서 전도운동과 선교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B. 마포삼열과 초기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

초기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 중에서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59년 영국의 런던에서 출생했지만, 뉴저지의 뉴더햄에 이주해 와 1874년부터 화란 개혁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1881년부터 뉴부룬스윅의 화란 개혁신학교에서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았다. 언더우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Lillias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18).
 뉴부룬스윅신학교는 중부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었던 화란 및 독일 개혁주의 교회들을 목회할 사역자 양성을 위해 1784년에 설립되었다. Howard G. Hageman, Two Centuries Plus: The Story of New Brunswick Seminary (Grand Rapids: Eerdmans, 1984), vii.
 펜실베니아와 뉴저지 지역 내의 화란 개혁교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티어도어 제이콥 프렐링하이젠(Theodore Jacob Frelinghuysen)이 목회자 양성을 위해 예비 목회자들을 본국으로 보내기 보다는,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소신이 이렇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Hageman, Two Centuries Plus, 4-5.

     언더우드는 신학교 2학년 때에 “은둔의 나라,” 한국에 대한 친구의 글에 의해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83년 하트포드에서 개최된 신학생들을 위한 연합선교모임에서 평생의 동지, 아펜셀러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는 화란 개혁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받기를 원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 요청하여 선교사로 임명받아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안수 받은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 시절부터 누구보다도 강한 전도의 열정으로 충만한 전도자였으며, 그를 아는 이들로부터도 불타는 구령을 가슴에 품고 다양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설교자로 각인되어 있다.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우리나라 근대화와 선교활동󰡕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10; In Soo Kim, Protestants and the Formation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1885-1920: A Study of the Contributions of Horace G. Underwood and Sun Chu Kil (New York: Peter Lang, 1996), 46-48.  
 이러한 배경을 갖고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야말로 화란 개혁주의의 경건주의적 특성을 소유하고 그리고 한국교회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성장하였고, 1829년에 설립된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맥코믹신학교는 19세기 초엽에 중서부 지역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결과로 배태되었으며, 장로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필요로 했던 시대적 요구를 부응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또한 초기 신학의 정초를 놓았던 존 핀리 크로에(John Finley Crowe) 목사는 1816년에 제 2회 졸업생으로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마치고, 중부 지역에서 목회하는 가운데 프린스톤신학교와 같은 신학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Daniel W. Fisher, “The Story of the Seminary,” in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Historical Celebration (Chicago: Lakeside Press, 1910), 13; James G. K. McClure, The Story of the Life and Work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Chicago: Lakeside Press, 1929), 1-5. 맥코믹신학교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The Indiana Theological Seminary,” “The New Albany Theological Seminary,” “The Presbyterian Seminary of the Northwest,” “The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또한 신학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사이러스 맥코믹(Cyrus H. McCormick)도 장로교 전통을 중시하는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계 이민후손이었고, 장로교 목회자 교육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James G. K. McClure, The Story of the Life and Work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39-47, 51.
 
     신학교의 이름이나 장소가 여러 번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맥코믹신학교는 초기의 신학적 특성과 신학교육 목적을 일관성 있게 전개해 나갔으며, 무엇보다도 학문과 경건에 뛰어난 목회자를 교육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맥코믹의 신학적 토대는 “바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복음주의적 진리, 즉 16세기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재정립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에 기반을 둔 장로교적 신앙원리”에 두었으며, 이런 전통을 굳게 붙잡고, 가르치며, 그리고 변증하는 데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Le Roy Halsey, A History of the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Chicago: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1893), 2, 5-6.
 이렇게 태동된 맥코믹신학교는 “보수주의 신학의 온상지”로서 그리고 “선교사 양성소”로서 유명해졌으며, 그 “훈련과정은 철저한 보수주의에다 청교도적인 엄격성, 그리고 불굴의 기상을 불어 넣어 주는 동시에 경건성을 위주”로 실시하였다. 「마포삼열박사전기」, 58-59.
 
      19세기 미국 장로교단 안에 내재해 있던 구학파와 신학파의 갈등은 결국 1837년에 분열하고 말았고, 그런 상태는 186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두 학파 간의 대립과 분열의 와중에서 맥코믹신학교는 구학파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었다. Lefferts A. Loetcher, The Broadening Church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54), 77-81.
 이렇게 초기부터 맥코믹의 신학적 입장은 구 프린스톤 신학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고, 부흥운동에 호의적인 “온건한 구학파”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마포삼열의 신학도 교리적인 면에서는 구학파적 전통이 강했지만,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는 신학파적인 특성도 공유하고 있었다. 마삼락 박사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마포삼열은 “구학파적인 교리와 신학파적인 복음전도와 선교에 열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종말론적인 입장에서도 “비교조적 전천년설”(non-dogmatic premillennialism)을 신봉했다고 언급하였다. 마삼락과 필자와의 인터뷰, 2006년 10월 5일.  
     
     19세기 중반의 맥코믹신학교는 장로교단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다양한 복음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학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신학적 분위기도 철저한 장로교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면서도, 어느 한 편에 치우치는 것을 상당히 경계했으며, 믿음의 식구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구원에 감사의 마음이 흘러 넘쳤다. 또한 세계 어느 지역에 있는 성도들과도 신앙 안에서 격의 없는 교제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졸업생들은 대부분 복음전도자나 목회자로 활동하고자 준비하고 있었으며, 초기부터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Le Roy Halsey, A History of the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7-8, 10. 맥코믹신학교의 선교지향적 신학교육과 출신자들 가운데 선교사로 헌신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마포삼열박사전기」, 58-64.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파송된 마포삼열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성경전부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오한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성경에 교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잘 개괄되어 있다고 간주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한국장로교회는 이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의 철저한 토대 위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중시하였다. 이런 전통은 교리를 중시하고 신경과 신조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전수해 나가고자 하는 구학파 장로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구학파 사상이 우세한 전통은 프린스톤신학교와 맥코믹신학교의 대체적인 신학적 입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교리적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전도와 선교열정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신학교 출신으로 그리고 신학파와 구학파적 전통을 통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한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는 적어도 두 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적 입장은 거의 동일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맥코믹 출신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린스톤 출신이 더 많아졌더라도 신학적 입장에는 차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한 판단이다. 19세기 미 북장로교회가 중시했던 구 프린스톤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교리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종교적 체험의 의미도 충분히 인정한 신학이었다. W. Andrew Hoffecker, Piety and the Princeton Theologians: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 Benjamin Warfield (Phi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1), 홍치모 역, 󰡔프린스톤신학의 삼대거성󰡕 (서울: 利久출판사, 1983).
 바른 교리의 토대 위에서 비롯된 경건성 추구야말로 한국 장로교회를 향한 중요한 공헌이었으며,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고 파급되었다. 구 프린스톤 신학은 장로교 신학적 전통을 계승해 나가면서도 개혁과 부흥을 추구할 수 있는 신앙의 토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맥코믹신학교나 출신 선교사들에게도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24. 복음주의 신학의 지적 자신감은 개혁파 전통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의 복음주의의 발흥에 영향을 개혁주의 신학의 공헌에 대하여 알리스트 맥그라스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타당성과 생명력의 재발견은 복음주의 신학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였고, 복음주의가 자신의 유산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최근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에 지적 탄력성을 가져다 준 구 프린스톤 학파의 사상과 저작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고 있다.” 알리스트 맥그라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신상길, 정성욱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108.

      이러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공식적인 한국선교의 원리로 채택하는 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화란 이민자의 후손으로 뉴욕주 세네카에서 출생한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1850년 구학파 장로교 전통을 고수하면서 신학교육을 실시했던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하여 초기의 교수들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전수받았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헨리 벤(Henry Venn)과 루프스 앤더슨(Rufus Anderson)이 주창한 원리에 구 프린스톤 신학의 철저한 성경관과 선교와 전도에 대한 열정이 가미되어 재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응규, 󰡔한부선평전󰡕, 117-18.
 
     네비우스는 선교의 원리를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예에서 추출했으며, 선교의 목적은 회심과 영적인 중생이고, 그 방법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성령은 이 모든 과정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주장하였다. 네비우스 자신도 성경을 절대적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며, 모든 사역의 근거로 삼았다. 그런 전제 위에 체계적인 성경공부제도를 강조했고, 초신자들의 훈련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요약, 사도신경, 다양한 기도문들을 가르침으로 구학파 장로교회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으며, 청교도들이 시행한 회심의 경험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믿음을 확인하고 교회의 성도로 인정한 것과 유사한 과정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원리와 일치하고 있다. Young Min Kim, “The Nevius Method and the Early Mission Polic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A Reappraisal in the Light of Recent Criticism” (Th. M. Thesis, Regent College, 1995), 105-108, 141-42.
  

    C. 마포삼열의 서북지역에서의 선교사역: 성경번역과 네비우스 선교방법
 
마포삼열의 선교사역이 한국교회사와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의 선교지역이었던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그런데 서북지역이 기독교 신앙으로 괄목할 만한 교회의 성장을 이룬 배후에는 선교사에 의한 국내 선교 이전에 만주를 비롯한 국외에서 이미 성경번역이 이루어져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한국인 번역자들뿐만 아니라, 권서인들을 통해 한글성경이 유포되어 이미 자생적인 교회가 설립되었던 의주나 소래 등을 비롯한 서북지역에서 이러한 선구적인 선교의 열매가 맺어졌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1882년부터 1887년에 걸쳐 번역 및 출판된 로스역 신약성경과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야말로 한국 개신교회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를 도와 성경번역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이익세, 최성균, 그리고 서상륜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더 많은 한국인 번역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스역 신약성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김정현(J. H. Grayson), 󰡔라요한(John Ross), 한국의 첫 선교사󰡕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82);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서울: 기독교문사, 1985), 409-505,
  
     이덕주에 의하면, 초기 한글 성경번역에 참여한 자들은 “외국인이 31명에 비하여 한국인은 35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외에도 더 많은 한국인 번역인들”이 활동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412.
 이렇게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통하여 모든 백성들이 읽기 쉬운 성경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선교사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권서인들은 번역된 성경이 널리 확산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교 사업이 시작된 이후, 성경번역에 참여한 선교사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배경을 살펴보더라도, 미국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거의 영어권 국가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초기 한글 성경은 영어와 영어성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속한 교단들을 고찰 해보면, 장로교 소속이 20명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장로교 중에서도 북장로교 소속이 10명으로 장로교 전체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번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평양, 서울(다른 선교부와 공유), 평안도, 경북, 충북 지역교회가 전체 장로교 교세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약 74%를 차지하였으며, 장로교적 신학적 배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462-63.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 북장로교 선교부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의 선교활동에 귀한 “통찰력과 동력”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마포삼열이라고 할 수 있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15.
  
     초기부터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에서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주요한 선교의 일환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마포삼열이 한국에 도착한 1890년 북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는 평안도 지역을 전도의 주된 대상지역으로 선정하였고,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공식적인 선교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마포삼열 개인에게도 존 네비우스의 한국방문과 선교방법은 한국선교를 준비하고 시행해 나가는 데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마포삼열의 선교관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통해 보다 심화되었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서 그 방법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적용하였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37; 방위량에 의하면 마포삼열은 아주 탁월하게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시행한 선교사였다. “Dr. Moffett was an outstanding Nevius Man.” Blair, "Precious Memories of Dr. Samuel A. Moffett," 13.
 그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가장 주요한 특성이 성경을 지극히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양하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반과 사경회 운동을 통해 영적인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교회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한국교회는 새신자라할지라도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 진리들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적용하고자 하기에 아주 강한 전도의 열정에 사로 잡혀 있다고 언급하였다. Samuel A. Moffett, "Visions of the Foreign Field-Korea," in Men and the Modern Missionary Enterprise, ed. Charles Edwin Bradt (Chicago: The Winona Publishing Company, 1907), 51-54. 마포삼열은 한국교회의 특성들을 1)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교회” (Bible loving and Bible studying church); 2) “영적 능력과 영적 진리의 인식” (Spiritual power and Appreciation of Spiritual Truth); 3) “강력한 전도의 열정” (Great Evangelistic Zeal)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성경공부반과 다양한 훈련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한국 장로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 교육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동시에 1907년에 이르게 되면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지향했던 자립, 자전, 그리고 자치하는 교회로 발전했음을 마포삼열은 언급하였다. 결국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효과적인 시행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제도와 교회의 조직과 발전을 도모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Samuel A. Moffett, "Conference on Korea: An Educated Ministry in Korea," in Men and the Modern Missionary Enterprise, ed., Charles Edwin Bradt (Chicago: The Winona Publishing Company, 1907), 137-41.
  

        II. 마포삼열의 선교사역과 평양대부흥운동, & 한국장로교회의 부흥

    A. 마포삼열의 선교사역과 평양대부흥운동의 연관성

마포삼열의 선교사역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평양과의 연관성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가 평양을 선교지역으로 선호하고 있었지만, 그 곳을 방문하고 거주하면서 “평양이야말로 이 세상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악한 도시 중의 하나”라고 언급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79.
 또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도 “평양은 한국 내에서 가장 어려운 선교지역 중의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Robert E. Spee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901), 168.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 평양은 어느 지역보다도 영적각성 기운이 확산되고 있었고 마포삼열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가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조선왕조의 기운은 급격히 기울고 있는 가운데, 서북지역의 교세는 점점 확장일로에 놓여 있었으며 영적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본격적인 평양 선교를 위하여, 1893년 1월 23일, 마포삼열, 이길함 (Graham Lee), 그리고 소안련 (William L. Swallen) “세 명의 트리오” (a good trio) 선교사들을 임명하였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69, 70-71.
 
     1890년 마포삼열이 평양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교회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10년이 지난 1900년에는 개척되어 설립된 교회가 아주 강력하고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자립하며, 그리고 여주위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벌써 이 시기에 서울보다 더 교세가 강해졌고, 평양은 그야말로 전도활동의 핵심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배후에는 마포삼열의 열정적인 전도활동과 더불어 의주와 평양에 사경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895년 말에 이르게 되면, 평양 부근에 16개의 처소에서 매주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약 30여 개의 장소에서 비정기적이긴 했지만 신앙생활의 뚜렷한 행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길함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5년 12월 27일자 편지. 마포삼열은 평양의 주변 지역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선교사역을 위하여 선교부에 동역할 선교사들을 요청하여 1890년대 말에 노르만 휫트모어 (Norman C. Whittemore), 마가렛 베스트 (Margaret Best), 알리스 피쉬 (Alice Fish), 그리고 윌리암 헌트 (William B. Hunt) 등이 내한하였다. 또한 마포삼열은 평양지역의 한국인 지도자 교육 프로그램 (Leaders' Training Class in Pyeongyang)도 강화하였다. Pyeongyang Mission Korea, "Annual and General Reports, 1898"와 Samuel A. Moffett, "Report of the Training Class, 1896"을 참조하라.
 특히 마포삼열과 이길함의 헌신을 통해 장대현 교회는 자립과 자전, 그리고 자치의 터를 닦아 놓아 장차 일어날 부흥과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127-28.
 마포삼열은 한국인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한석진과 같은 “개혁적인 기질의 소유자”와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는 창조적인 동역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마포삼열박사전기」, 132.
 또한 마포삼열은 한국인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열망하고, 한국인들 속에 함께 거주하며, 그리고 한국인들을 어느 때든지 주저 없이 만나고자 하는 그의 자세가 성공적인 사역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마포삼열이 한국인들과 자신을 “밀접하게 동일시” (close identification)했던 태도의 결과였다. 마포삼열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4년 1월 12일자 편지.

     그러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03년과 1904년의 장대현 교회는 대내외적인 시련들에 직면하였다. 전쟁의 공포가 심화되고 있었고, 경제적 상황의 악화, 그리고 관리들의 점증하는 부패상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런데다가 길선주 장로는 건강이 악화되어 시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는 등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는 침체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대현 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한 스칸디나비아 선교연맹의 프란손 (Franson)의 방문과 수차례에 걸친 설교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적인 각성을 심화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03년 성탄절을 방위량 선교사의 주도 하에 예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냄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지만, 기도회와 겨울 사경회를 비롯한 훈련과정을 강화하며, 교회가 더욱 강건해 질 수 있는 활력을 제공받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들이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이었다.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 Report of Pyeng Yang Station, July 1st, 1903 to June 30th, 1904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4), 11-12. SAM Archives. 이 보고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평양선교부에 소속한 여러 교회들의 상황과 통계 숫자, 그리고 다양한 선교활동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04-1905년에 이르게 되면, 북장로교 선교부는 마포삼열의 주된 선교적 임무를 신학교육 (Theological Instruction)에 두도록 하면서, 장대현교회의 목회를 지속적으로 감독하고 지도하는 한편, 평양 지역의 성경공부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또한 급성장 일로에 있는 교회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많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전력을 다하면서, 평신도 지도자들과 미래의 교회 일군들을 배출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적지 않은 여러 장애요인들과 사역의 지연을 경험하면서도 마포삼열은 평양지역의 교회들의 지속적인 발전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신학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후일에 나타날 사역의 열매를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묵묵히 정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이 단지 교회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평양 거주민들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도록 노력하였다. Samuel A. Moffett, "Personal Report, 1904-1905," 1-3. SAM Archives.
 또한 마포삼열이 평양에서 활동한 사역의 폭은 상당히 포괄적이었다. 장로교 선교사로서 감리교 사역자들과도 협동하는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방위량은 마포삼열의 관용적인 마음(broadmindedness)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While he was a man of strong convictions, a fundamentalist in the right sense of the word, he was not given to criticising other denominations. If he was not much interested in church union plans, it was because he sincerely believed that the Presbyterian Church stood for true and right principles that needed to be stressed everywhere. He cooperated from the beginning in our efforts to establish territorial division with the Methodists.” William N. Blair, "Precious Memories of Dr. Samuel A. Moffett," 5-6.
 평양지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에게도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어로 된 소책자들을 배포하기도 하였고, 극소수이긴 했지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1904년 6월에는 동경의 혼다 목사 (Rev. R. Honda of Tokyo)가 일본복음주의연맹 (the Japanese Evangelical Alliance)의 인사를 장대현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전했으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혼다 목사는 당시 장대현 교회에 일본인 성도들이 지대한 관심과 격려 속에 출석하고 있음을 듣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마포삼열의 보고에 의하면, 1904-1905년 기간에 적어도 일본인 청년 한 사람이 마포삼열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청년의 번역을 통해 기독교 소책자들을 발간하여 한국에 거주하던 일인들에게 배포하였으며 일본어 예배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 Report of Pyeng Yang Station, July 1st, 1903 to June 30th, 1904, 15; Samuel A. Moffett, "Personal Report, 1904-1905," 4. SAM Archives,

     1904년 9월 22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 (Horace N. Allen)이 한국에 도착하여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20주년을 기념하는 선교모임이 열렸다. 주요한 선교회의는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이 사회를 보았고, 오전 경건예배를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의 인도로 마친 후, 마포삼열 선교사의 “한국의 복음화에 있어서의 정책과 방법들” (Policy and Methods in Evangelization of Korea)을 비롯한 특강들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 우리는 초기 한국선교의 단면도를 발견할 수 있다. 마포삼열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사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선교방법들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 항목으로 진술하고 있다:
 
첫째로 복음의 메시지를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널리 선포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의 우선성이다. 우리 모두에게 궁극적인 권위는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어야 한다.... 셋째는 세례문답이다. 초신자가 죄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열망하고 죄로부    터 구속함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에, 교회는 그가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경건한 기독교인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넷째는 회심자에게 열정적인 전도의 정신을 심어    줄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가 지속적으로 그러한 사명에 불타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남녀 신자들을 초기 단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권    면하도록 하되, 돈을 사용하는 것은 삼가고 주의 사역에 재정적인 동기로 참여하지 않도록 한다.... 이와 같은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과 열정적으로 진리를 전하는 데에 동참하게 함으로 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한국의 복음화로 이어질 것이다.... 진정한 열심은 또 다른 열심을 낳을 것이고 확신은 또 다른 확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섯째는 성경공부 즉 사경회제도이다. 복음을 전하는 신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발전을 위해 우리 선교활동의 주요한 사역인 성경공부와 예배보다 한국 상황에 더 적합한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조사, 전도자, 그리고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과 훈련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전도사역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믿기로는 교육선교 사역은 교회 안    에서와 교회로부터 시행되어야 하고, 복음전도 사역의 결과로서, 그리고 전도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역은 결국 지리적으로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데에 강력한 동인(動因)이 될 것이다....  Samuel A. Moffett, “Policy and Methods for the Evangelization of Korea,” The Korea Field 13 (November, 1904), 193-198. 마포삼열의 특강 전문이 The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 37:5 (May 1906): 1-8 에도 게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서의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과 정책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반영하고 있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정초를 놓는 과정에서, 마포삼열을 비롯한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의 업적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한 목회사역과 신학교육,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定礎)”라고 언급할 수 있다. 이호우, 󰡔초기 내한 선교사, 곽안련의 신학과 사상󰡕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5), 80.
 마포삼열은 1890년부터 1934년까지 평양에 머물면서, 서북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설립과 부흥의 초석을 놓는 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평양신학교를 세워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과, 숭실전문학교 등을 세워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은 복음전파 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그야말로 “한국 기독교의 센터”가 되었다. L.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1832-1910 (4th ed.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87), 316.

     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교나 성경학교에서도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평양, 선천, 안주, 그리고 재령 등지에서 확산되고 있어서, 마포삼열은 1906년 정월에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한국 나라가 아닌, 한국 백성들을 통해 의도하신 귀한 일을 성취하시려는 ‘추수의 때’(a harvest time)가 도래했습니다. 우리 사역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고도 중요한 ‘성경공부반/사경회’를 통해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 마포삼열이 A. J. 브라운에게 보낸 1906년 1월 31일자 편지. SAM Archives. 마포삼열은 신학반 (Theological class)이 끝나는 동년 6월 1일에 안식년을 맞아 1년 간 프린스톤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미국에 머물게 되는데, 이듬해인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기간에 그는 숭실대학과 평양신학교 건물을 건축하기 위한 모금활동과 하와이와 미국 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회연합과 개척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결국은 마포삼열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에 진력하면서도, 기독교 교리와 신앙고백에 토대를 둔 바른 신학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사경회를 통해서, 철저한 말씀에 대한 연구와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복음전도의 열정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기도 속에서 사경회운동이 결국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영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현장에서 설교자로 많은 은혜와 감동을 주었던 방위량(William N. Blair)도 사경회의 유익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것[사경회]은 회중에게 고도의 부담을 주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케 하는 식의 부흥사에 의한 전문적인 부흥회보다 훨씬 더 낫고 오래 지속되는 것 같다. 물론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식의 부흥회도 없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나는 교회 생활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성    경공부와 개인 전도사역이 잘 맞물릴 때 교회가 부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William N. Blair, Gold in Korea (New York: Central Distributing Department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46), 114.


박용규도 사경회와 부흥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저녁에는 부흥회를 열어 상한 심령, 깨어진 심령들이     주의 말씀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다시 한 번 이 세    상을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영적 힘과 능력을 간구하여 은혜를 받고서 그들은 세상을 향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을 체계 있게 연구하는 사경회에서 출발한 것이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0), 662.


결국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나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중시하면서도 경건주의적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의 전통을 아름답게 조화시키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가 활화 되었던 사건들이었다.
 
    B. 마포삼열의 전도열정과 서북지역의 신앙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미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구령의 열정을 소유한 채, 순회전도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마포삼열은 선교사로서 가장 고귀한 특권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복음을 온 마음과 생명을 다해 전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선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이 생생하고도 실제적인 복음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하고, 죄와 구원에 대한 철저한 인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역설하였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 부차적인 선교방법만을 시행해서는 안 되고,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고 자신의 선교관을 언급하였다.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in Counsel to New Missionaries: From Older Missionaries of the Presbyterian Church (New York: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1905), 60-62.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은 선교지 현지에 적합하고 토착적 교회와 지도자를 세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적용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 특히 서북지역에서 대부흥운동과 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는 기반의 역할을 다하였다. 철저한 성경공부제도를 근간으로 자립, 자전, 그리고 자치를 지향하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능케 한 기반이었다. 결국 언더우드의 주도적인 활약에 힘입어 한국교회에 적용된 순회전도제도와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그의 신학적 입장과 선교전략에 부응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언더우드를 통한 화란 개혁주의적 경건주의적 특성과 초기의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과 구령에 대한 열정이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속해 있던 화란개혁교회 선교부를 통해 파송받기를 원했지만, 재정상의 이유로 거절되었고, 후에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1884년 7월 28일에 한국 최초의 “목회 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임명하고 한국으로 떠나도록 결정하였다.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16.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순회전도를 모든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이해했고, 이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원리에도 명문화되었다.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건주의운동의 강한 영향을 받은 화란     개혁교회와 개혁교회 신학교 뉴브룬스윅(New Brunswick) 출신이었고, 부    흥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길함(그레함 리), 방위량(블레어), 소안론(스왈른), 곽안련(클락), 마포삼열(마펫) 모두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구학파(Old School)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부흥운동에 있어서는 구학파와는     달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347-48.
 

    마포삼열이 평양에 도착한 직후, 착수한 것은 바로 전도활동이었다. 가가호호 방문하고, 개인전도, 노방전도, 사랑방전도, 그리고 문서전도 등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줄기찬 전도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기독교 복음을 듣고 배우고자 하는 신도의 수가 증가일로에 놓이게 되자,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마포삼열이 착안해 낸 것이 “사경회반”이었다. 이 제도에 마포삼열은 교육사업의 일환으로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성경반에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반에 걸친 필요한 사항을 비교적 정연하게 교육하였으며, 성경반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점증함에 따라 선생도 증원이 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체제가 정비되었다. 마포삼열은 전도와 교육을 병행시키면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 부흥의 기운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성경 공부반에서는 주로 성경을 가르쳤으나, 아울러 교리문답 교육도 실시하였다. 이것은 세례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증가일로에 있는 새로운 신자들을 교육시켜 기독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이 있었다. 후에는 성경반이 교역자 양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시대적 요청을 효과적으로 수용하는 신학교육으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성도들의 성경교육과 신앙증진을 위한 교회의 성경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마포삼열박사전기󰡕, 265-66. 이러한 성경반 혹은 사경회 제도는 1907년 대부흥운동 훨씬 이전에 마포삼열에 의해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성경공부를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소그룹으로 나누어 실시한 것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점화시킨 티어도어 제이콥 프렐링하이젠의 목회방식과 흡사한 면이 많다.

     마포삼열이 1907년에 기고한 “선교지 한국의 비전들”이라는 글에서 “한국은 국토 면적이 미국의 캔사스 주와 비슷하고 인구 1200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거대한 교역국이나 군사국가가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위대한 영적 강대국, 아마도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영적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전망하였다. “We do not expect little Korea, in area the size of Kansas but with twelve millions of people, to become a great commercial nation such as China is, or a great military power such as Japan has become, but we do expect it to become a great spiritual power, perhaps the great spiritual power of the Far East.” Samuel A. Moffett, "Visions of the Foreign Field-Korea," in Men and the Modern Missionary Enterprise, ed., Charles Edwin Bradt (Chicago: The Winona Publishing Company, 1907), 50.
 

    C. 마포삼열이 한국장로교회 부흥에 미친 영향

    1) 평양 선교본부 활성화와 만주 선교사역과의 연관성 확립
만주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가 한인 번역자들과 협력하여 개시한 성경번역을 위시한 권서들의 활동을 한반도 전체로 파급되어 갈 수 있는 선교적 통로를 구축한 배경에는 서북지역의 선교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 차례 방문했던 언더우드, 마포삼열, 게일, 그리고 아펜셀러의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부로 하여금 서울 북방의 선교지를 설정하도록 제안했던 언더우드와 그것을 실현시킴으로 평양대부흥운동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마포삼열의 역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마포삼열은 누구보다도 의주와 평양에서 영적인 추수의 때가 무르익었고 사역자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음을 절감하였다.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0년 8월 27일자 편지; 마포삼열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0년 9월 15일, 1891년 3월 21일자 편지, SAM Archives.
 또한 마포삼열은 만주에서 존 로스와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국경지역에서의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특히 마포삼열은 의주를 비롯한 서북 지역을 전도 여행함으로 북한지역에서 복음 전파의 무궁한 잠재력을 발견하였다. 의주는 만주 봉천에서 사역한 존 로스 선교사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널리 확산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신도들이 있었기에 이들의 학습과 세례와 지도자 양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로스와 함께 동역하며 권서로 활동했던 백홍준이 있었고, 그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석진을 만남으로 귀한 동역자로 삼아 훗날, 평양 선교와 널다리골 교회를 개척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마포삼열은 의주와 평양, 선천, 그리고 황해도 재령 등지를 방문하면서 그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복음의 확산현상을 목격하면서 자발적 교회의 생성과 한국인들에 의한 교회 개척이 서북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번져 가리라 기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서북지역뿐만 아니라 북한 및 한국 전체 지역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과 확신을 소유하게 되었다. Samuel A. Moffett, "Evangelistic Tour in the North of Korea," Church at Home and Abroad 10 (October 1891): 330.
 
    
    2) 복음전도의 우선성과 사회개혁적 사역의 중요성
마포삼열은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영혼을 사랑하고 복음전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기도했던 인물이었다. 기도를 통하여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지속적인 교제 없이는 성령의 능력이 선교사의 사역에 나타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자신과 동료 및 후배 선교사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사랑으로 선교지 백성을 대하면서 그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를 개개인이 믿고 변화되도록 힘써야 하며, 선교사들의 모든 노력은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the evangelization of the people)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64, 66.
 그의 아들, 마삼락(Samuel Hugh Moffett)도 부친의 선교신학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학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Samuel H. Moffett, “Theology and Missions,” Ashland Theological Seminary Journal (1985): 20; 김승곤, 『사무엘 H. 마펫의 선교 발자취』 (서울: 미션아카데미, 2018), 49에서 재인용.
 그런 면에서, 그는 진정한 신자이자 목회자이었고, 또한 설교자요 전도자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한 인물이었다.  
     마포삼열은 철두철미하게 복음전도에 우선성을 두는 선교사역을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교육을 비롯한 사회적 차원의 다양한 선교사역의 중요성도 충분히 숙지했고 실시하였다. 그러나 모든 선교활동의 초점은 “영혼을 구하고, 영혼을 양육하는 사역”(the work of soul-saving, of soul-developing)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역설하였다.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67.
 이러한 주장과 함께 개혁이 구원이 아니고, 문명이 기독교가 아니며, 그리고 교육이 중생을 대치 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복음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메시지이며, 단순한 도덕적 개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복음전파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해 나가는 것이 모든 다른 사역보다 우선순위에 놓아져야 하며,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선교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마포삼열은 그의 글에서 이탤릭체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One must clearly see that reformation is not redemption.... Civilization is not Christianity... Education is not Regeneration.”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68-69, 73.
 이러한 그의 선교관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이 시행했던 학교나 다양한 기관들을 설립하여 선교방법들을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전도에 역점을 두는 자신의 선교방식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마포삼열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0년 10월 22일자 편지.
  

      3) 평신도 지도자 육성, 자립교회 및 장로교 신학교육의 기반 조성
마포삼열은 이러한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신앙을 토대로 복음전도에 열정적인 토착교회를 세우기 위해, 한국어 사용을 매우 강조했고, 선교지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동역자들로 삼았으며, 그리고 자립하고 자전하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마포삼열의 전도사역을 비롯한 다양한 선교방식에 대해 방위량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Although in earlier years, Dr. Moffett was an outstanding itinerating missionary, visiting all sections of Korea, giving out tracts and preaching everywhere in South and North Pyongyang Provinces, his great ambition was to establish churches... He was gradually forced to give more and more time to educational work; to establishing primary schools and academies for boys and girls. He founded bth the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in Pyongyang, which have furnished so many strong leaders for the Korean Church.” Blair, "Precious Memories of Dr. Samuel A. Moffett," 11-12.
 이러한 배경에는 마포삼열이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시행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결과였다. 1909년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마포삼열은 “우리 선교 사역의 두 가지 대 원칙, 곧 사경회 체계와 자급의 씨앗은 네비우스로부터 왔다”고 진술한 바 있다. 옥성득 책임 편역, 『마포삼열 자료집 2』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51.
 “최대한의 본토인에, 최소한의 선교사”라는 네비우스와 로스의 선교방법과 정신은 한국의 신자들을 잘 훈련시킴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사경회 체계였다. 옥성득 책임 편역, 『마포삼열 자료집 2󰡕, 55.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인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체계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시행함으로 한국교회의 자립을 이룩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마포삼열은 “다양한 훈련과정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영향력이 있고 독특한 선교사역”이라고 간주하였다. 마포삼열이 브라운 (A. J. Brown)에게 보내는 1903년 8월 5일자 편지.
 
      마포삼열은 확장되어가는 사역을 “영수”(안수받지 않은 장로)와 “조사”(안수 받지 않은 목회자)를 초기부터 세워, 장차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출현이 가시화 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129-30.
 그는 1901년 1월부터 장로교 공의회의 허락을 받아 이길함과 함께 김종섭과 방기창에게 최초로 신학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점차적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포삼열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901년 2월 6일자 편지.
 마포삼열은 그의 선교사역 초기인 1890년대 초반부터 사경회 운동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구현하는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시행했으며, 사경회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우수한 자는 신학반에 입학해 성경과 교회 치리에 관한 것을 공부한 후에 전도인으로 임명받아 사역했다. 이러한 신학반은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으며, 결국은 “한국장로교회의 모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평양신학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하라. 조경현,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단을 중심으로』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11).
 
      또한 마포삼열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우선적인 과제라는 인식하에, 그는 사역을 하는 자체가 보다 나은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고 또한 완성하는 것이라고 동역자들을 독려하였다.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68, 73.
 이러한 그의 노력을 통해 대부흥운동의 발원지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 첫 독노회가 조직되는 데에도 산파역할을 감당하였다. 마포삼열은 “평양선교를 전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육성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공헌을 감안하여 마포삼열은 최초의 독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마포삼열은 한국에 적합한 사경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들을 창안하여 효과적으로 적용하였다. 대부흥운동 직후인 1908년부터 한국교회에 시행되기 시작한 제도들 중에 날연보와 권찰제도가 있었는데,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날연보제도를 통해 마포삼열은 전도의 열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정신을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권찰”(leader of tens)제도는 마포삼열이 미국의 존 와나메이커가 봉사했던 필라델피아 주일학교에서 시행된 것을 본받아 교회의 모든 교인을 10명 단위로 나눈 후 권찰이 각 그룹을 관장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권찰은 자기에게 할당된 자들의 영적 유익에 관한 모든 일을 파악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 교회의 장로와 목사에게 알리며 사역에 동참함으로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Jong Hyeong Lee, “Samuel Austin Moffett,” 135-36.
 
     뿐만 아니라,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 여성 성도들도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봉사와 전도의 역할에서 그 사회성이 고양되었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평양의 교회부흥에도 지대하게 기여하였다. 여자 신학교를 통해서 여성 전도자를 양성했으며, 다양한 사역에 여성들의 비중이 매우 컸다. 이러한 결과, 조선 시대에 교회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주된 영역이 되었고, 여성들도 교육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박성배·강석진, 『한국교회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 (용인: 킹덤북스, 2021), 108, 167-74.

     또한 대부흥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던 기간에 한국교회 안에 교회연합적인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의 연합은 한국에서의 복음화를 앞당기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언더우드는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한국에 연합기독교회가 세워진다면, 이 나라가 빨리 복음화 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합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 이루어가야 할 사안입니다. 걸음마다 내딛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완성될 수만 있다면 기독교의 역량이 크게 증가할 것입니다.”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선교편지(1885-1916)」 김인수 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486-87.
 마포삼열은 연합운동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연합이 장로교회의 원리와 가르침에서 벗어나면서까지 시도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교육 분야나 대학과 관계된 분야에서는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마포삼열이 A. J. 브라운에게 보낸 1906년 1월 31일자 편지.
 

       닫는 말

마포삼열은 한국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신학적 토대, 즉 개혁신앙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준수하면서도, 개혁주의적 경건주의를 한국의 상황에 맞게 조우시킴으로 당시의 영적 침체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는 신학적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목회지와 선교지에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법들을 시행함으로써 영적 침체와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포삼열은 한국장로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할 수 있는 토대를 놓았으며, 수많은 목회자들과 동역자들을 양성하는데 누구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사역에 앞서, 스스로가 경건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함으로 진정한 신자요 목회자요 또한 전도자가 되지 아니하면 결코 사역의 열매가 맺어질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 Samuel A. Moffett, “Prerequisites and Principles of Evangelization,” 74.
 
      마포삼열의 사역을 통한 영적 각성의 불꽃은 개혁신학적 토대 위에서 목회와 선교에 전념하는 가운데, 대중 집회가 아닌, 교회라는 테두리 속에서 타올랐다. 그런 면에서 마포삼열은 그의 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을 바탕으로, 시대적인 변화와 새로운 선교지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의 영적 침체와 사회적 위기 속에서 개혁신학의 틀 위에 경건주의적 열정을 융합시켜 교회와 성도가 개혁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가운데 평양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으며, 한국장로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정한 영적 각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짐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 속에 펼쳐 가심을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일어나는 항구적인 개혁(reform)으로부터 부흥(revival)의 열매가 맺어질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전망을 마포삼열의 삶과 사역을 통해 인식하게 되고, 한국장로교회의 부흥을 위한 초석을 든든하게 놓았다.


                                   참고문헌
A. 1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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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의 신학과 그 의미

                       이승구 (합동신학대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일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진술로 이상규, “박형룡의 신학과 김재준, 한상동, 한경직,”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서울: 생명의 양식, 2007), 203을 보라. 이상규 교수님은 “1920년대까지는 선교사들의 신학이 있었을 뿐”이라고 단언하신다. 초기에는 그것이 정상임을 잘 논의하신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2), 204; 김영재, 󰡔한국 교회사󰡕 (1992, 개정 3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9), 165도 보라. 그러면서 “선교가 시작되던 해로부터 1920년대 중엽까지는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에서 지배적인 신학으로 통하였다”고 하면서 김의환, 󰡔도전 받는 보수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70), 49에게 찬동하면서 말씀하신다(󰡔한국 교회사󰡕, 181).
아마도 1924년에 프린스턴에서 Th. M.을 하고,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1927년에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남궁혁 목사(1882-1950)가 1925년부터 가르치다가 학위 후인 1928년에 한국인 최초로 평양신학교 전임 교수가 되어 「신학지남」 편집을 감당한 것과 1928년에 프린스톤에서 신학 석사를 하고 온 이성휘 목사(1889-1950)가 1928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것(그는 1934년에 하노버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 또한 숭실전문(1916-20) 출신으로 남경의 금능대학(1921-23)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1923-26)과 남침례교신학교(1926-1927)를 하고 1927년 7월에 귀국하여 1928년부터 가르치던 박형룡(1897-1978)이 1931년 4월에 변증학 담당 전임 교수가 된 것, 1933년에 철학 박사 학위 받은 것, 그리고 1935년에 󰡔기독교 현대신학 난제 선평󰡕을 낸 것, 감리교의 정경옥 교수의 󰡔기독교 신학 개론󰡕이 1939년에 출판된 것 등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전통적인 교회사 책들과 이승구,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99-100을 보라.
한국인 최초의 신학 저서는 1902년에 한국인 최초로 감리교 목사가 되어, 1902년에 해난 사고 당한 아펜젤러를 이어 1903-1914년까지 정동 교회를 담임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 1895-1927)이 1907년의 「신학월보」에 매달 내었던 “셩산유람긔”를 모아 1912년에 낸 󰡔성산명경(聖山明鏡)󰡕 (조선야소교회, 1912)과 1916-1920년에 감리교 신학교의 「신학세계」에 연재하던 “종교변증설”을 낸 󰡔만종일연󰡕이라는 책이다(1922). 이에 대해서는 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231을 보라.
 그런 점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마포삼열 같이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선교사들 중의 한 사람의 박용규는 초기 한국 선교사 가운데 언더우드, 게일, 그리고 마포삼열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라고 한다. 박용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과 한국 장로교”, (available at:   http://www.1907reviv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43).
 신학은 초기 한국교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 듯이,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1864-1939)은 미국 인디아나 주 매디슨(Madison) 시 출생으로,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장병일(?), 󰡔마포삼열 박사 전기󰡕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1973), 37.
 “19세기 인디아나 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04), 474.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권태경은 자연과학으로 석사학위를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권태경,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1864-1939): 에딘버러 선교 보고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과 학문」 31 (2014).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57에 석사 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54쪽에서는 졸업 후 대학에 머물러 있으면서 존스 홉킨스에 진학하여 박사 과정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54).
가장 정확한 것의 하나는 김선욱이 제시한 연보인데, 이에 의하면 1884년 6월 12일에 학사 학위를 하고(화학 학사, 최우등 졸업), 1885년 6월에 석사 학위를 한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다(김선욱, “평양 숭실대학교와 마포삼열”, 󰡔마포삼열󰡕 [서울: 숭실대학교 출판국, 2017], 19).
 동기생이 된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의 형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진학하여 하노버 대학교의 신학부라고 할 수 있는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1888). 신학교 졸업후 마포삼열은 “미주리 주 애플튼 시의 제일장로교회에서 약 1년 간 시무”하다가, 1889년 3월 6일에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청원하였고,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5.
 4월 15일에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6; 손영규, “복음의 특명 사신들 - ‘마펫’ 선교사 가문”.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이 한국에 입국했다”고 지적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474f.를 참고하라. 김영재 교수님은 1893년부터 1901년까지 40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일했는데 “그 가운데 16명이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고, 11명이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고 간하배 목사님의 논문(Harvie M. Conn,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art 1.”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9 (Nov., 1966): 24-57)을 인용해 말씀하신다(김영재, 󰡔한국 교회사󰡕, 183).
Robert Culver McCaughhey, “A Survey of the Literary Output of MacCormick Alumni in Chosen,” BD thesis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1940), 87을 인용해서 1888년 졸업생으로 기보(奇普, Daniel L. Gifford, 1861-1900), 배위량(裵偉良, William Martyn Baird, 1862-1931), 마포삼열(1864-1939), 1892년 졸업생으로는 이길함(李吉咸, Graham Lee, 1861-1916), 소안론(蘇安論, William L. Swallen, 1865-1954), 모삼열(牟三悅, Samuel F. Moore, 1860-1906), 1894년 졸업생으로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 1867-1929), 1897년 졸업생으로 노세영(盧世永, Cyril Ross, 1867-1963), 1900년 졸업생으로 편하설(片夏薛, Charles F. Bernheisel, 1874-1958), 1901년 졸업생으로 방위량(邦偉良, William Newton Blair, 1876-1970)와 박위렴(朴緯廉, William M. Barrett, 1872-1956), 1902년 졸업생으로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계인서(Carl E. Kerns, 1876-1953), 곽안련(郭安蓮, Charles Allen Clark, 1878-1961) 등을 말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473을 보라.
 그해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서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6. 요코하마의 배에서 그는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를 만났었다고 한다(66-67).
 (그의 26세 생일인) 1890년 1월 25일에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이르렀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7. 전기에는 그의 생일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20일이라고 하고 있다. 오기였을까?
 
      이렇게 한국에 온 언더우드의 인도 하에서 6개월 동안 계속해서 서상윤에게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8; 권태경,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에딘버러 선교보고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리고『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60-66.
 1890년 8월부터 1891년 가을 동안 여러 차례의 서북 지역을 탐방하면서, “1890년 8월부터”라고 하면서 의주까지의 탐색 여행이 “교회 설립을 위한 정지 작업”이라고 평가한 전기 작성자들을 생각은 의미 있다. Cf.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12. 또한 1890년 8월 28일 아펜젤러, 허버트와 함께 평양을 처음 방문했다고 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04), 677도 보라.
1891년 4월에는 마포삼열, 기일, 서상윤이 의주에 가서, 23세의 한석진, 김정현(金定鉉), 김석례(金錫禮)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마포삼열이 베풀었다고 한다(󰡔마포삼열 박사 전기󰡕, 212). 사실 이 여행은 평양, 의주, 봉천을 거쳐 로스 목사와 4일을 지내고 온 긴 영향 중 일부였다(이영헌, 󰡔한국 기독교사󰡕 [서울: 컨콜디아사, 1978], 98;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74f., 그런데 그는 의주에서의 세례식 등은 1892년에 빈톤[C. C. Vinton]과 함께 의주에 방문했을 때라고 한다, 676). 그리고 “그 후 선교사의 주관 하에 외문 외에 넓은 기지를 마련하고 그곳의 기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12). 그 때가 1891년이라고 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75f.도 보라.
1892년 한 해 동안에 마포삼열이 평양을 여섯 번 방문했다는 백낙준의 말을 전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76, n. 32도 보라.
 조선의 서북 지방, 조선 말 서북 사람들의 처우와 의식을 잘 말해 주는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증보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185를 보라.
 특히 평양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그는 평양지역 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회 한국 선교부는 평양에 선교 지부 설립을 결의하고 마포삼열과 이길함(李吉咸, Graham Lee), 소안론(蘇安論, W. L. Swallen)을 평양에 파송하여 지부 건설을 하도록 위임하였다.” 권태경,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1864-1939): 에딘버러 선교보고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0), 221;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79;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개정판 (서울: 기독교문사, 2011), 192-93, 317f.
 이렇게 시작된 마포삼열의 평양 개척 역사, 특히 조사로서 동역자 역할을 잘 감당한 한석진(韓錫晉)과 함께, 그의 귀한 사역은 선교사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일하려던 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사정을 잘 아는 최치량과 최치헌 등이 한석진의 생활을 도왔다고 한다(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35).
 최치량(崔致良)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최치량의 회개와 활동에 대해서는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10-12를 보라. 아마 초기 선교사들도 이 변화 이야기를 말하기를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Cf. D.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 Review N. Y, 1898. Chapter XII: “What the Gospel did for One Man.”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1893년 2월 5일 오후 2시 30분에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 평양에서 첫 번째 예배였다고 한다. 그 때 20여 명의 교인들이 마루에 앉아 찬송을 부르고 서상륜이 설교를 했다. Sallie. F. Swallen, Dear Sister Jennie (Seoul, Korea, 1893);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04. 당시 평양 주민이 10만명이었고 한다.
 마포삼열은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당시 외국인은 집을 매매할 수 없었기에) 한석진의 이름으로 집도 두 번이나 구했지만 평양 시민들의 반대로 다시 돌려주고 다시 떠나 왔다고 한다. 이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04-105를 보라.
 
      그렇게 4월 9일에 다시 서울로 갔다가 1893년 5월에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84에서는 1893년 6월부터 예배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교사 없는 상태에서 한석진의 노력으로 1893년 5월에 20여명이 예배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193, 318도 보라. 더 정확한 것은 그 이전부터 모이다가 그것이 교회로 발전했다고 보아야 한다. 엘린우드에게 보낸 6월 6일자 서신에 “한씨가 작은 집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고, “지난주에는 한 씨 집에 조용히 모였고, 저는 약 20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마포삼열 자료집 1󰡕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408f.).
 최치량 집 근처의 방을 얻어 예배를 드려 오다가, 결국 최치량과 의논하여 “널다리 골에 홍종대(洪鍾大) 소유의 큰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하여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05, 212; 손영규, “복음의 특명 사신들 - ‘마펫’ 선교사 가문”. 이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찾기 어려웠다. 󰡔마포삼열 자료집 1󰡕, 467의 사진 설명은 1892년에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아마도 그 이 후일 것이다.
 주일 예배한 것이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의 시작이었고,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386과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1010의 연보에서 1894년 1월 8일을 널다리골 교회의 설립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318. 이는 아마도 다음에 언급할 세례식을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박용규 교수님은 그런 입장에서 “최초의 일곱 명의 세례자들이 중심이 되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교회가 창립되었다”고 기록했다(681). 그런데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84에서는 1893년 6월부터 예배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설립일은  그 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1893년 11월 14일자 편지로 “내일 평양으로 떠나려고 한다”고 했고(󰡔마포삼열 자료집 1󰡕, 446f.), 기퍼드(Gifford) 목사님께 보낸 11월 24일자 편지에서는 지난 수요일에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고, 지난해 성탄절 때에 토착교회가 서 (상윤) 씨와 홍 (정후) 씨를 서리 집사(temporary deacons)로 선출했다고 하고 있으니(󰡔마포삼열 자료집 1󰡕, 448-51), 이미 1년 전부터 교회로 모이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12월 28일자로 기퍼드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밤 유익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대부분이 정기적인 출석자인 12명이 참석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마포삼열 자료집 1󰡕, 458f.). 널다리골 교회의 시작을 1893년으로 제시한 이상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73, n. 26, 270 등도 보라. 그리고 세례일은 1894년 1월 7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 각주를 보라.
 11월 15일쯤에 서울에서 다시 돌아온 마포삼열은 그 다음 해인 1894년 1월 7일에 8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시행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12, 116에서는 채필근 편, 󰡔한석진 목사와 그의 시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1), 54에 근거해서 7인이라고 했고,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80-81도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했고, 심지어 󰡔마포삼열 자료집 1󰡕, 467의 사진 설명에서도 7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1894년 1월 7일에 있었던 “8명에 대한 세례를 하나님이 한석진과의 기도를 받아 주심으로 이해했다”(Samuel Austin Moffett, “Letter to Ellinwood, January 12, 1894," 󰡔마포삼열 자료집 1󰡕, 474-75)는 기록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진 설명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례로 “널다리 교회가 조직되었다”는 말은 가능할 수 있다(467).
이 널다리골 교회에 깁종섭(金宗燮)이 출석하였고, 그의 인도로  얼마 전에 회심한 한약방을 하며 선도수련을 하던 그의 도우(道友) 길선주(1869-1935)도 1896년 초겨울부터 참여하였다. Cf.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507. 길선주는 다음해인 1897년 8월 15일에 이길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508; 이상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269), 1898년에 영수(領袖)로 활동하고, 1901년에 장로가 되고(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개정판 [서울: 기독교문사, 2011], 323; 이상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270, 그런데 이억주는 1900년이라고 했으니 [508] 이것은 잘못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1902년에 조사(助事)가 되었다(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508; 장대현 교회와 황해도와 평안도 도조사가 되었다고 하는 이상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271도 보라).
 이후 성도의 수가 늘어나 1899년에는 장대현에 새로 예배당을 세우고 마포삼열이 제1대 담임 목사님으로 섬긴 것이 그의 사역의 초기 모습이다.
      그 이후 장대현교회는 남대현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개척하였는데, 산정현교회는 마포선교사의 기부로 크게 지어졌던 것을 위시해서 평양을 중심으로 1천여 교회와 3백여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 힘쓴 것, 후에 언급할 평양 신학교 사역, 특히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맥큔,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며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쓴 것,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 의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잘 인도한 것, 1932년 이후 신사 참배 문제 때문에 일본 통치자들과 충돌하면서도 “숭실 전문, 숭실 중학, 숭의여자 중학은 폐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마포삼열의 초지”였고,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80. 결국 1937년 10월 29일자로 폐교계를 당국에 제출했다고 한다(28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낸 것은 그의 큰 기여였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암살 기도를 피해 그러므로 전기 작성자들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났다고 기술했던(󰡔마포삼열 박사 전기󰡕, 377;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93) 것은 잘못된 정보라고 여겨진다. 그가 1936년 7월에 일사병과 언어 장애가 발생하였고 치료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92-93), 실제로 미국으로 은밀히 간 것은 일제의 암살 시도에 대한 정보를 들어서라는 것이 이제는 다 알려졌다. 이를 강조하는 김훈,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 「기독공보」를 보라(available at: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noemisuh&logNo=220278704057.
 (1912년에 이질과 셋째 딸 사산 8일후 출산 휴유증으로 상처하고, 1915년에 재혼한) 아내 루시아 피쉬 마펫(Lucia H. Fish)과 이 부인들에 대해서는  박신순, “앨리스 마페트와 루시아 마페트”, 󰡔마포삼열󰡕, 371-473을 보라.
 막내 아들 톰을 남겨둔 채 [1936년에] 급히 미국으로 가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몬로비아(Monrovia)에서 1939년 10월 25일에 쓸쓸히 숨을 거둔” 일, 10월 25일이라는 일자는 김선욱, “평양 숭실대학교 마포삼열”, 22, 94에서 제시한 것이다. New York Times 1939년 10월 26일 기사에서 어제 사망했다고 했으니(김선욱, “평양 숭실대학교 마포삼열”,366) 김선욱 교수의 말이 정확할 것이다. 이전에는 73년 전기에 따라 10월 24일로 다들 언급하고 있다(󰡔마포삼열 박사 전기󰡕, 381; 김 훈,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 「기독공보」).
 그리고 2006년에 마포삼열 목사 부부의 유해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카펜테리아 공원묘지(Carpinteria Cemetery, 1501 Cravens Ln, Carpinteria, CA 93013)로부터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으로 이장되고, 그의 흉상이 세워진 것(2006년 5월 9일) 등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김 훈,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 Cf. https://en.wikipedia.org/wiki/Samuel_Austin_Moffett.
 자신의 “진짜 고향”(the real home)인 한국, 특히 평양에 가고자 하던 그의 소망은 <1936년 12월 13일자 인디아나 주 매디슨에서 마포삼열이 평양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와 이를 소개하는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93, n. 149, 364f.를 보라.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마포 목사님의 신학이 초기 한국 교회에 미친 의미를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이하에서 나는 마포삼열도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가장 기본적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마련해 주어 한국 장로교회가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가지게 한 것과 학교를 통한 성경적 신학을 전파한 것과 교회 중심의 실천적 신학을 제시한 것을 높이 사면서, 그러나 세대주의적 가르침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 것과 교회 예배에 의식에 대한 깊은 인식의 부족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려고 한다.

            1. 마포삼열의 성경중심의 복음주의 신학 토대를 마련한 공로

1890년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서 시작된 것을 알려진 Samuel A. Moffett, “Evangelical Work,” Quarto Centennial Paper, 18을 언급하는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167를 보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316에서는 1890년 10월에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890년에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한 것을 언급하는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30을 보라. 그 다음해에는 18명이 공부했다고 한다.
 사경회는 한국 초기 교회의 큰 특징중하나였다. 1894년 평양에서는 청일 전쟁 이후에도 사경회를 계속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사경회 중심의 한국 교회가 있을 수 있는 토대를 잘 마련해 준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한국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에 논의하겠지만 성경을 재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이는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처럼 성경을 배우고 성경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교회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에서 이루어진 사경회 모임에 대해서 마포 목사님은 1910년 에딘버러 선교 보고에서 다음 같이 보고한 바 있다:

이러한 성경 사경반과 양육반은 교육과 양육 그리고 그 교회 전체를 하나의 전도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게 하였다... 중앙에서 주관한 사경회는 처음에 단지 일곱 명의 남자로 시작했는데 점점 더 커져서 서울에서는 500명이 모여 공부하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800명이, 재령과 평양에서는 각기 1,000명이 모여 배우게 되었으며, 선천에서는 심지어 1,300명이나 모이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여성들을 위한 사경반은 송도, 부산, 대구, 공주, 평양, 선천 등지에서 열렸는데 150명으로부터 700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선교부의 선교 보고에 의하면, 공부반이 262개 있고 거기에 13,967명이 등록하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볼 때 그 수는 2,000개가 넘을 것이고, 참석자는 100,000명 이상의 남녀가 거기에 참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선교부에서만 그 참석자가 7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Samuel A. Moffett, “The Place of the Native Church in the Work of Evangelization,” A Paper Read at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Union Seminary Magazine 12 (October-November, 1910), 229-30.


성경에 대해서 열심 있었던 한국 교회에 대한 생생한 보고였다. 이런 열심은 역사 마포 목사님을 비록한 선교사들이 강조한 성경에 대한 강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포삼열의 전기 작가들은 “실지로 1898-1907년까지의 급속된 교회 성장은 이 사경회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79. 비슷한 평가로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168.
 이전에 국외에서 번역된 로스 역(누가복음, 1882년 3월, 요한복음, 1882년 5월, 누가복음과 제자 행적, 1883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1884년,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 갈리디아서, 에베소서, 1885년, 예수셩교젼서, 1887)과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44 (날자가 부정확하다);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서울: 컨콜디아사, 1978), 63-64;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30-37;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04), 305-309;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101-14를 보라.
 1883년 4월 29일에 세례 받아 일본에서 세례 받은 첫 한국인이 된 이수정 역(복음서와 사도행전만 가진 현토(懸吐)한한(韓漢)신약전서, 1884,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 1885)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42;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68;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38-42;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323-2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115-26을 보라.
 번역의 문제(“지나친 사투리와 그 난해성”)를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200.
 생각하면서, 국내에서 다시 번역하기로 하여 1887년 2월에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신약성경을 189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번역한 것, 이를 지적하는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서울: 컨콜디아사, 1978), 103; 좀 더 자세한 논의로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43-54;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565-69를 보라.
 그리하여 신약의 공인역이 1906년에 출간된 것을 생각할 때,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03;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5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155;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572. “민중이 성서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민중을 위한 훌륭한 한글 성경 번역이 완료되었던 것이다”(572-73])는 박용규 교수의 평가를 보라! 신약 성경 전체의 번역과 보급 이후에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던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에서 주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1906년에 나온 신약 성경은 1907년까지 877,712권이 간행되었고, 고종을 비롯한 수백만 명이 읽었다고 한다(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03).
 그리고 구약은 1910년 4월 2일에 완료하고, 1911년 5월 성서주일에 출판 감사예배가 드려졌음을 생각할 때,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575;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55-58;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103;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156. 특히  1907-1910년 사이에 이눌서 선교사와 이승두, 김정삼의 마지막 작업이 중요했다고 한다(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57, 358f.). 이렇게 출간된 구약도 1년 사이에 8,000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58). 이것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개정하여 1937년에 번역을 완료하고 1938년에 출판된 것을 개역(改譯)이라고 한다.
각 역본 번역자들에 대한 전체적 정리로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73f.를 참조하라.
 이런 사경회는 아직도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 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포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 교회[조선교회=한국 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그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Moffett, “The Place of the Native Church in the Work of Evangelization,” 228.
이 당시 밴더빌트(1910-1913)와 예일(19013-1914)에서 공부하고 온 감리교의 양주삼은 「신학 세계」 창간호 (1916)부터 2년간 “구신약 전서 총론”이란 글에서 모세오경에 대한 편집설을 소개하고 있던 때였다. Cf. 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251f.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인 「신학월보」는 1900년 12월부터 나왔고, 1901년에 한국인 최초의 신학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죄의 도리”가 탁사 최병헌에 의해 기고되었고 그 의미를 논의한 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120-24를 보라. 또한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황해도 신원교회를 목회하던 김종호 목사가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을 한 것이 1916년 6월 황해노회에서 문제된 것을 보면(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396f.) 이런 자유주의적 해석이 주변이 나타나고 있던 때라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당시 선교사들에게도 그러했고 당시 한국 교회에게도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좀 더 넓은 의미를 쓰여진 1973년도의 그의 전기 작성자들도 “마포삼열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못 박은 데는 그 성서의 권위와 유일한 규범이라는 의미가 그 밑바닥에 깔려져 있다”고 하였다(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77). 계속해서 진술하기를 “그는 지나칠 정도로 성서의 권위와 그 절대성을 내 세우고, 여기에다 신성성을 부여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성서를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비평하거나, 이를 부장 또는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을 극구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마포삼열은 성서를 절대화했다고 보겠다”고까지 말한다(178). 1973년 전기를 쓰신분들의 성경 비판적 태도는 “비록 신화적 표현하기는 하지만 샤머니즘의 신화적 전통에서 살아 온 한국민에게는 아필할 수가 있었다”(178)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마포 삼열은 “1902년 1년간을 거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모든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였다”고 말한바 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00.
 사실 1930년대에 신사참배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힘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에서 주어진 것이다.
      1934년의 북장로교 선교회 희년 성회에서도 다음 같은 보고가 나왔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가르침에 독특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부여한 것이 지난 50년 동안 한국 복음화의 탁월한 요소였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본 선교회는 우리의 사명이 죄로부터의 구원과 은혜를 통한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의 초자연적 계시를 선포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면서, 성경이 우리의 모든 사역에서 탁월한 위치를 점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곽안련,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421, 강조점은 덧 붙인 것임.


     이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니, 신학 전반이 복음주의적 건전성을 가지도록 노력한 것도 마포삼열 등의 큰 기여이다. 그는 바울을 언급하면서 “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 다른 것은 참 복음이 아니다.... 조선 교회여,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고 단언하였다. <선교 70주년  기념 설교집> (서울: 총회 종교 교육부, 1955), 61-63, 󰡔마포삼열 박사 전기󰡕, 325에서 재인용. 이에 대한 정기 작성자들을 비판적 논의(327)와 비교하라.
 
      1907년 독노회 조직 후 신격과 규칙 제정에 관하여 논의하여 1910년에 받아들인 (1904년 인도장로교회의) 12 신조를 채용할 때도 이것에 대해서 남 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던 브라운(G. T. Brown)은 “한국 교회가 인도 교회 신앙 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서방의 선교회와의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형제 교단과의 관계도 각제 되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Mission to Korea, 72,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350에서 재인용).
 이것이 “대한 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 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요리 문답 책을 더욱 교회 문답으로 삼느니라”고 선언하였다. <독노회 및 제 1회 총회록>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1962), 󰡔마포삼열 박사 전기󰡕, 253f.에서 재인용,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강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방위량 선교사는 한국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이 점을 잘 강조해서 지적해주었다(Herbert E. Blair, “Development of the Korean Church,” in The 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Seoul: YMCA. Press, 1934], 121). 또한 이은선, “한국장로교단들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의 수용,” 「한국개혁신학」 51 (2016): 174-213; 그리고 이상웅,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종말론 전통”, 「한국개혁신학」 70 (2021): 218-64, n. 14을 보라.
그러나 과연 한국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에 온전히 충실하였는지는 다시 물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마포 목사님 등은 성경이 가르치는 요소를 다 중요하게 여기면서 강조하였다. 특히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한국 교회의 큰 전통은 마포삼열의 어릴 때부터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46-47, 318, 358을 보라: “한국 선교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의 근원은 기도에 있었다. 실로 그의 생애는 기도에서 승패를 본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의 기도를 보고 배웠다.”(47).


                      2. 학교를 통해서 성경적 신학을 전파한 공로

또한 초기부터 마포삼열은 학교를 세워 교육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80년 1월에 한국에 온 후 6개월의 한국어 공부 후에 처음 감당한 일이 (언더우드가 1886년에 세웠던) 예수교 학당(경신학교의 전신)을 감당한 일이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67-81, 263.
 그가 맡으면서 성경 공부를 위주로 한 한문 교육을 하였고, 예수의 생애와 십계명을 교육하고, 주일학교를 병행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79.
 
      또한 1893년부터 평앙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져서 널다리 교회가 설립되고 얼마 안 돼서부터 숭실학교의 시작을 1894년으로 확언하는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99도 보라.
 “이영언(李永彦)을 교사로 삼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숭덕(崇德) 소학교의 전신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3백여 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평양에 ‘3숭(三崇)’으로 불리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역시 마포삼열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설립되었다. 또한 숭의여학교(현재,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교의 전신)도 마포삼열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손영규, “복음의 특명 사신들 - ‘마펫’ 선교사 가문”.
 숭실 대학은 작게 시작하였지만 1901년에는 한국식 2층 교사도 마련하고, 배위량(裵緯良, William M. Baird)을 교장으로 하고 그의 서기요 학교 학생이던 최광옥(崔光玉, 1879-1910)이 숭실학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1909년에는 한국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73. 백낙준, 󰡔한국 개신교사: 1832-1910󰡕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419에서는 1908년에 1회 졸업생 2명이 졸업하였다고 한다. 이에 동의하면서 김선욱도 1908년을 말하고 있다(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37).
 
       이 모든 학교들이 성경적 신학을 한국 교회에 뿌리 내리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의 결과 1911년 8월의 <조선신교육령>과 10월의 <사립학교 규칙> 제정으로 조선 총독부가 학교 교과목을 관리하려고 하고 특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반대오 인한 어려움으로 있었다. 특히 <사립학교 규칙>이 제정된 후인 “1912년에는 1, 362개교(일반 817, 종교계 545), 1919년에는 742개교(일반 444, 종교계 298)로 확실히 감소되었다”(박혜진, 󰡔일제하 한국 기독교와 미션스쿨󰡕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32). 이런 상황에서도 선교사들은 성경 가르치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해서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73-75, 282를 보라. 또한 1915년 3월의 <개정 사립학교 규칙>이 준 어려움, 특히 “성경 교육을 정규 시간에서 빼고, 종교의식 즉 예배를 철폐하라”는 규정의 문제, 이로 말미암아 장로교 계통의 학교들이 잡종(雜種) 학교가 된 내력에 대해서는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378-81;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32를 보라. 또한 “일제는 기독교계에서 만든 사립학교들을 통제하고 초등교육의 연수를 줄이고, 중등교육을 격하하려고 했다... 강점 이전에도 사립학교에 대해 통제를 가했지만, 강점 이후에는 갈들이 본격적으로 되었다”(55)는 지적과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한국의 대학은 전문대학으로 모두 강등될 참이었다”는 김선욱의 주장도 보라(45).
이 과정의 어려움과 그 극복 과정을 잘 제시한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249-53;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63-71; 그리고 박혜진, 󰡔일제하 한국 기독교와 미션스쿨󰡕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을 보라. 이 모든 것을 살펴 볼 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있지 않았으면 우리나라 교육이 더 잘 발전했을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1903년 10월에 시작된 숭의여학교의 경우 학생들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매일 성경 수업과 예배시간이 있었다. 숭실학교 역시 매일 1시간씩 예배와 성경수업이 있었으며, 숭실대학에서의 성경수업의 경우에는 학년별로 나누어 구약과 신약을 가르쳤다. 1909-1910년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1학년은 마태복음과 이사야, 2학년은 요한복음, 빌립보서 및 잠언, 3학년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구약의 소선지서를 가르쳤고, 4학년은 로마서와 시편, 다니엘서를 수업하였다. 숭실대학교, 2007, 38. 권태경, “마포삼열의 교육 사상 연구” 「신앙과 학문」 32 (2015년 11): 6-7.
 
      그러므로 마포삼열에게 있어서 교육은 “복음과 복음 사이에 있는 교육, 그 교육 자체가 이미 복음 전도의 한 과정”이라고 한 1973년 전기 작성자들의 평가는 옳다고 여겨진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262.
 오랜 후에 숭실대학과 마포삼열의 관계를 다룬 글에서 김선욱 교수도 “복음전도를 먼저 이루고 이를 통해 교회가 형성된 이후에 학교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숭실학당, 그리고 숭실대학도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분석하였다.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마포삼열󰡕 (서울: 숭실대학교 출판국, 2017), 25,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30쪽도 보라.
 실제로 숭실에 책임을 감당한 배위량 선교사도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 교사라면 우선 학생들을 복음 전도자들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일에 실패한다면, 그가 교육가로서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는 선교사 교사로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리쳐드 베어드, 󰡔윌리엄 베어드󰡕 (서울: 한국 기독교 문화연구원, 2016), 220.
 
      마포삼열과 거의 같은 정신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마포삼열도 다음과 같이 명확한 입장을 잘 표현하였다.

교육은 교회를 세우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말씀의 능력을 통해 교회를 발전시키는 데 이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중략) --- 선교부의 교육 사업은 타협함 없이 기독교적이어야 하며, 기독교인을 위하고 교회를 세우려는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기독교만을 실제로 그리고 일관되게 교육하고 학생들과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기독교가 현저히 드러나게 하려는 교육 기관만이 기독교 학교로 존재하고 또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마포삼열, “1927년 9월 15일자로 뉴욕의 국제선교위원회에 보낸 보고서”, 󰡔마포삼열󰡕, 35, 290-91.


참으로 마포 삼열은 계속해서 “교육부 당국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학교에 대해서는 교회 혹은 선교부에서 통제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다. 김선욱, “평양숭실대학과 마포삼열”, 62.
      
       일반 학교에 대한 생각도 이러하니 신학교에 대한 마포삼열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더 현저하다. 그러므로 1900년에는 북장로교 선교 본부에서 허락을 받고, 선교사 합동 공의회에서 의논하여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하기로 결정하고, 󰡔마포삼열 박사 전기󰡕, 227, 268.
 1901년 5월부터 평양 자기의 사랑방에서 당시 장대현교회(평양중앙교회) 시무 장로였던 방기창(邦基昌), 김종섭(金宗燮) 2명의 학생을 데리고 자신과 이길함 선교사가 신학 교육을 시작한 신학반(theological class)에 대한 마포삼열의 생각은 매우 강하였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322에서는 1901년 5월 15일로 제시한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227에서는 1902년이라고 부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 46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한 것은 단순한 오기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엄밀하게 이것은 이전의 신학반 하던 것을 지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학반은 1889년 1월에 언더우드 목사 주관 하에 한 달간 서울 정동에서 한국인 학생 8명을 대상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매년 겨울을 이용해 한 달간 한국인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신학반이 운영되었는데, 1891년부터는 기포드가 신학반 책임을 맡았다. 1891년 12월에 있었던 신학반에는 백홍준(의주), 김관근, 양순백(구성), 최명오, 우종서, 서경조(장연), 서상륜(서울) 등 16명이 참석하였다. 강의는 선교사 기포드(Daniel L. Gifford, 奇普), 마펫(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게일(James Scarth Gale, 奇一) 등이 맡았다.”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 새문안 교회 이야기,”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85755&C_CC=AH; cf. 채필근 편, 󰡔한석진 목사와 그의 시대󰡕, 115). 초기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반 운영이 1901년부터 평양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후에 평양에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1902년에는 평양 공의회가 양전백 장로, 길선주 조사, 이기풍, 송인서를 신학생으로 천거해서 허락을 받아 1903년 봄에 평양신학교 신학생은 6명이 되었다. Cf.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28.
 1903년 겨울, 봄, 여름에 평양 공의회는 잠정적으로 채택한 교과 과정으로 이들 여섯 명을 한 반에 모아 1년간의 가르침을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는 내용을 다음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교의 발전 - 목사 후보자로 주후 일천 구백 일 년 평양 중앙교회당 장로 이 인이 입학하고, 일천 구백 삼년에 사 인이 더 입교하여 합 육 인을 집합 후 오개 년에 시험적 교수학과 중 제 일년 급과목을 교수하기를 시작하였고, 매년 삼개월간은 재학하여 공부케 하고 구개월간은 무교에 종사케 하여 교회를 주장케 하고 사경을 인수케 하며 정한 과목에 대하여 자택에서 자습을 하여 연구케 한 후 차시 귀교 시에 시험을 수케 하더라. 편집위,『총신대학교 백년사』(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2), 142-43. 이 제도는 1919년까지 계속되었다(김영재, 󰡔한국 교회사󰡕, 189).


그 후 1904년에 평양공의회의 추천으로 마포삼열 목사님께서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평양 선교사 공의회에서는 마포삼열 목사를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추천하였고, 당시 교수로는 언더우드,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 등이 있었다고 한다(손영규, “복음의 특명 사신들 - ‘마펫’ 선교사 가문”).
 수고하였다(1904-1924). 평양신학교 초기 교수진을 보면, 북장로교회의 마포 교장과 소안론(蘇安論, W. L. Swallen) 두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한 학기 씩 가르쳤는데, 남장로교회의 최의덕(崔義德, L. B. Tate)과 북장로교의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호주 장로교회의 부두일(富斗一, W. R. Foote), 북장로교의 노세영(盧世永, C. Boss), 곽안련(郭安蓮, C. A. Clark), 사우업(史佑業, C. E. Sharp)이 수고했고, 평양의 다른 선교사들은 성경 시험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그 외 방위량(方緯良), 모삼열(牟三悅, Samuel F. Moore), 편하설(片夏薛, C. F. Bernheisel), 안의와(安義窩, J. E. Adams) 선교사 등이 교수하였다.
      이들이 초기 800여명의 목사를 교육시켜 한국 장로교회가 성경적 신학에 근거하게 한 것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마포 선교사가 한 가장 큰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초기 5년 제 교육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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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구분                                   과목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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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과목        삼복음합, 창세기, 소요리문답, 신도요론(신학), 구약사기, 구약지리,
                  구약총론, 강도법, 음악,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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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간 열람과     만국통감 1, 2권(강), 천도강대(天道講臺), 복음강대, 기독실록(基督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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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과목     사도행전, 출애굽기, 신도게요(信道揭要), 신도요론(神道要論), 인죄학(人罪學),                 교회사기(상고), 신약지지(新約地誌), 신약총론, 도덕학, 심리학, 강도법, 음악,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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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간 열람과      민수기~ 사사기(강), 갈라디아서 ~ 만국통감 3, 4, 5권,
                    뇌초가보교기(腦草可保敎記), 신도요론(1권), 구속정의
                     시비학체요(是非學體要), 사도사기(使徒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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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과목         고린도전서, 에베소인서, 이사야서, 성례, 신도요론(求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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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간 열람과
                    룻기 ~ 이사야(강), 고린도후서~마태복음, 신도요론(2권), 영구사기(강),
                    로득개교기략(路得改敎紀略)(강), 구세약설(球世略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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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과목              요한복음, 로마인서, 시편, 예레미야서, 교회사기(更正前, 更正時),                             목사지법, 말세학, 권징조례, 예배모범, 신도(神道), 국어, 음악
-----------------------------------------------------------------------------5학년간 열람과
                      구약 약백기(約百紀)에서 아가, 애가로 서결(西結)(강),
                신약 아각서(雅各書)에서 유다서까지(강), 미국사기(강), 양교변증(강),
                 신도요론(3권), 고성임죄(古聖任罪), 마적론도탐원(摩笛論道探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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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과목       히브리서, 묵시록, 이미기(利未記), 다니엘서, 교회사기(更正後), 전도회사기,                   성신지사(聖神之事), 목사지법, 교수법, 음악,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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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간 열람과     구약 하서서(何西書)에서 마납기(馬拉基)(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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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1> 평양신학교 5년제 교과 과정 장로회신학대학교, (2002), 117.



1907년에는 학생 수가 75명이 되었고, 6월 20일에 장대현 교회 예배당에서 제 1회 졸업식을 하였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230; 김영재, 󰡔한국 교회사󰡕, 개정 3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9), 163. 이 졸업식에서의 7인 졸업과 독노회 결성, 그리고 1912년 9월 1일에 있었던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 1회 총회 등의 의미에 대한 논의로 이승구,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회 100주년과 한국 개혁신학의 과제”,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93-94를 보라. 7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포 삼열과의 관계성과 그들의 신앙에 좋은 논의로 마포 삼열, “한국에 있어서 교육 받은 교역자들” (1907년 2월 14일) (󰡔마포삼열 박사 전기󰡕, 232-37에서 재인용)을 보라. 장로교 공의회와 독노회와의 관계성과 배경 설명으로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8-49를 보라.

      1908년 마포삼열 교장은 신학교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사를 건축하기 위하여 준비하던 중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던 맥코믹(Mrs. Nettie F. McComick) 여사가 5,500불(만 1천원)의 기부금을 보내주었다. 교장은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5천 평을 마련하고 정초예배를 드리고 몇 달 만에 완공되어 마포삼열의 집에서 이곳으로 학교를 옮겼다. 맥코믹 여사는 기숙사를 지을 때에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다시 10,000불을 보내 주었고, 1920년부터 학생수는 날이 갈수록 더해 맥코믹 여사는 1922년 35,000 불(7만 여원)을 또 보내주었다. 그녀의 큰 지원으로 1922년 5월 15일 정초식을 가지고 새로운 양식의 신학 건물을 지어 평양의 대소집회가 이곳에서 열릴 수 있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37-38, 244, 270, 271.
 
      1915년에는 250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하였고,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348. 이것을 두고 노해리 선교사가 편집한 History of the Korean Mission, 440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1916년이 되어 정교수 5인으로 교수회를 조직하게 되었을 때 실천 신학과 종교교육은 곽안련, 교회사기와 헬라어는 왕길지 (도서 관리도 감당), 구약문학과 주해는 어도만(W. C. Erdman), 조직신학은 이눌서, 신약 주석은 학감인 나부열이 담당하였고, 마포삼열은 교회학과 선교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1.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 47을 인용하는 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125에서는 구약을 나부열 선교사가 감당했다고 한다.
 1920년에는 일 년 두 학기 체제가 되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3; 김영재, 󰡔한국 교회사󰡕, 189.
 1925년 10월 30일에는 2 대 교장 라부열(Stacy L. Roberts)에게 이임하였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4. 많은 분들은 마포삼열이 1924년까지 교장을 했다고 한다(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125;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477).

      이렇게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당시 가장 큰 신학교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초기에 성경에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학교라고 평가된다.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박윤선은 자신이 졸업한 평양신학교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기는 하였지만,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고 한다. 박윤선, “한국에서의 칼빈주의” (1958),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9 (Nov., 1966): 51;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 (서울: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146.
 1930년대에도 그랬다고 하면 1901-1930년까지의 평양신학교의 신학의 방향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교회 중심의 신학을 하여, 성경대로 살려는 열심의 실천을 낳은 공로

마포삼열은 참으로 교회 중심의 신학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교회 세우는 일 일 위주로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의 전기 작성자들을 이것을 강조한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11-21, 226, 240-41, 315, 361.
 그러므로 그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선교사로 왔고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하였고, 한국 교회를 염려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나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21.
 또는 “그는 자나 깨나 한국 교회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 것이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1.
 빈말이 아니다. 신학 교육을 할 때도 “교회의 요청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에 부응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41, 269.

      더구나 많은 한국 교회는 이런 정신을 잘 본받아서 “선교사들의 직접적 개입이나 어떤 원조 없이도 자기네끼리 힘을 모아 교회를 이루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03.
 1890년 6월에 7일부터 17일까지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18.
 7명-10여명의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서울에 와서 선교사 수양회(Missionaries’ Conference)에서 강의했던 산동지역 지푸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가 중국에서 실천해 보려고 이를 시사하는 John L. Nevius, The 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 (Sanghai, 1886; New York: P& R, 1899).
 한 자립(self-support)과 자전(self-Propaganda), 자치(self-government)의 노력이, 네비우스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열매를 거둔 것이다. 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Spence J. Palmer, Korea and Christianity (Seoul: Hollym Corp., 1967), 27; 김영재, 󰡔한국 교회사󰡕, 개정 3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9), 125 등을 보라. 마포 목사님은 이 정책의 활용이 한국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이익”을 주었다고 하였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206, n. 25에서 재인용).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경공부 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곽안련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99의 지적을 보라. 같은 점을 지적하는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rsbyterian Church,” 29;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20-21도 보라. “자립, 자치, 자전은 성경공부를 실천했을 때 오는 부차적인 결실이었다”(Clark,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 242-43, cited in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23, n. 263).
 1907년 독노회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가 세워진 후에 두 차례에 걸쳐 201명에서 세례식을 할 때 길선주 목사가 주관하고 마포삼열 목사가 보조자로  있었던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이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255.
 이미 1917년에 모든 선교사들은 이선으로 후퇴하자는 제안을 마포삼열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373.

      또한 배운 말씀대로 살려는 것이 강조되었고, 실천되었다. 원수진 사람들도 화해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기도 하고, 배운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실천되었다. 이에 대한 좋은 예 제시가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01에  제시되어 있다.
 또한 마포 목사님은 “교회 문제를 사회나 외부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 357.
 성경대로 실천하려고 한 대표적인 예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교회 헌금을 착복한 협의가 있는 사람과 사기와 위조 협의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서 출교된 일이다. The Korea Field (November, 1902), from Annual Report of Dr. Samuel A. Moffett (Sep., 1902), 74를 인용하고 있는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01을 보라.
 그리하여 1912년 제 1회 총회 때에 북평안 노회의 보고에 의하면, 책벌한 자가 303인, 해벌한 사람이 150인, 출교한 자가 50명에 가깝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1회 회록, 50,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214, n. 48, 359에서 재인용.
 마포 목사님에게서 배운 것에 얼마나 철저하려고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포삼열에게도 구약적 기질이 있었다”(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201)는 식으로 표현한 73년도 전기 작성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성경에 철저하지 않은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히려 뒤에 잘 표현한 바와 같이 “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치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시범적 문제”(202)라고 한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것이 상례였음을 곽안련의 다음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술의 마시는 사람이나 주류를 판매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지 못하며, 첩이나 남편으로서 비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안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교 후에 그러한 죄를 법하는 사람은 먼저 훈계를 받고 다음으로 직분 정지를 당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출교 당한다. 권징은 미국 교회들에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곽안련, 󰡔한국 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 149,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39에서 재인용.


이런 사실을 바라보면서 박용규 교수가 하고 있는 다음 같은 좋은 관찰을 보라: “객관적인 말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태동시킬 수밖에 없고 따라서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게 만들며, 교리주의적 보수 신앙을 심어주어 말씀을 이질화시키는 어떠한 자유주의 도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어 주었다.”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1784-1910󰡕, 639. 그러나 온전히 성경대로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발견하고, 그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문제 1: 한국 장로교회 안에 세대주의의 뿌리가 내리게 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포 선교사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이 또한 뿌려 놓은 문제를 지적하자면, 여기 언급하는 두 가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세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A Historical Outline, Part 1,”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9/1 (1966): 50-53; 서정운, “마포삼열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장신논단」 55 (1989): 32-57; 박응규, “From Fear to Hope: The Shaping of Premillennialsim in Korea, 1884-1945,” Ph. 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8)=Ung Kyu Pak, Millennialism in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New YTork: Peter Lang, 2005); 박응규, “일제하 한국교회의 종말론 형성에 관한 연구”, 「역사신학 논총」 2 (2000): 176-98; 박용규, “한국교회 종말신앙: 역사적 개관,” 「성경과 신학」 27 (2000): 200-201; 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2004); 임웅기, “세대주의 종말론이 이단 발생에 미친 영향” 2014. 01. 27자  「기독교 포탈뉴스」 (available at: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67); 그리고 김영재, 󰡔한국 교회사󰡕, 191-92.
 마포삼열이 매코믹 신학교 재학 때인 “1886년 여름 25일 동안 소위 헐몬산 집회에서 251명의 학생들이”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의 설교를 들었고,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61. 이 모임에서 마펫을 포함한 “21명이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고, 26일 째에서 100명이 해외 선교에 봉사 및 협력한다고 결단했다고 한다(61f.).
1829년 세워진 매코믹은 1884년까지 56년 동안 617명의 종업생 중 17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 했었었는데, 1886년부터 3년간 17명이 파송되었고(그 중에 Sameul Moffett 외에 William Baird, Samuel Gifford, Graham Lee, William Swallen, J. Edward Adams, William Blair, 그리고 Charles Allen Clark이 있다), 1929년까지는 253명의 선교사를 배출 할 수 있었다고 한다(58, 60, 63).
 이 무디의 열정적인 설교에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자원했다고 하니, 마포삼열이 무디가 가진 세대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마포삼열의 첫 부인이었던 앨리스 피쉬(Alis Fish)는 ‘산타로사 신학교’와 필라델피아 여자 의과 대학과 샌프란시스코의 쿠퍼 의대를 졸업하고 무디성경학교의 단기 훈련과정과 스코필드 성경통신과정(Schofield Correspondence Course in the Bible Study)을 하고 1896년에 북장로교 해외 선교사로 지원한 분이니 이를 잘 언급한 박신순, “앨리스 마패트와 루시아 마페트”, 375-77을 보라.
 당연히 세대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점이 한국 초기 장로교회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요소라고 여겨진다.
      특히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의학을 공부한 후에 “토론토 대학교 YMCA의 파송으로 1888년 12월 16일에 내한하여 2년 후인 1891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가 된” 박용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과 한국 장로교”, (available at:   http://www.1907reviv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43
 게일(James Scarth Gale, 奇一, 1863-1937) 선교사가 자신의 어학적 재능으로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오히려 방관한 책임이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 교육을 감당한 마포 선교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일 선교사 같이 신학 공부를 하지 않는 그러나 어학적 재능이 뛰어난 선교사는 자기 생각대로 활동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들이 잘 통제할 수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일은 1909년부터 “종말론과 구약석의”(Eschatology and Old Testament Exegesis)를 가르쳤다 한다. 또한 기일은 언더우드와 더불어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신약 부분을 한글로 번역했고, 그래서 1917년에 인쇄했다고 말하는 R. Rutt,  A Biography of James S. Gale and A New Edition of his History of Korean People (Seoul: Royal Asiatic Society, 1972), 63에 근거해서 이를 언급하는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369도 보라.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세대주의를 널리 확신시킨 저작인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E. Blackstone, 1841-1935)의 Jesus is Coming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여 이 책이 한국에서 나온 최초의 종말론 저서였다고 한다. William E. Blackstone, Jesus is Coming, re-revised ed. (Chicago: Fleming H. Revell, 1908), 기 일 역, 『예수의 재림』 (경성: 조선야소교서회, 1913). 역자 서문은 그의 한글 선생인 이창직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블랙스톤은 “장차 교회가 휴거되고 난 후에 이 땅에 남아 맹렬한 진노를 경험하게 되고, 후에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라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Blackstone, 『예수의 재림』, 2-3.
 휴거를 강조하는데서 잘 나타나지만 그리스도의 비밀 재림과 드러남이라는 이중 재림론을 명시한다. 즉, “처음에는 공중에 비밀리에 강림하시어 그의 성도들을 끌어 올리시어 혼인 잔치를 하시는 동시에 지상에서는 유대인들을 다시금 돌아오게 하기 위해 7년간의 대환난 기간이 있을 것이고 그 끝에 지상 재림(나타나심 appearance)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Blackstone, 『예수의 재림』, 60-65, 83.
 또한 블랙스톤은 7년 대환란을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 예언의 마지막 한 주간에 해당하는 시기로 해석하고, Blackstone, 『예수의 재림』, 83-84, 181.
 이는 메시아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시는 시기이며, 이 시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고, 적 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Blackstone, 『예수의 재림』, 89-96.
 이스라엘이 다시금 고토로 돌아오고 예루살렘과 새 성전을 세우고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와 복을 누리게 될 것을 강조하면 설명한다. Blackstone, 『예수의 재림』, 131-68, 181-84. 또한 222-24, 257-66도 보라.
 
     또한 배위량이 번역한 브룩스(James H. Brookes, 1830-1897) 목사의 『주재림론』(Till He Come)은 1891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 책의 9장에서 브룩스는 재림을 논하면서 “그 백성을 위하여 오심”과 “저희들과 함께 나타나심”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구별된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James H. Brookes, 『주재림론』 (1895, 3rd edition), 배위량 역 (경성: 조선야소교서회, 1922), 109, 116-17.
 따라서 교회는 대환난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하늘로 휴거되고 대환난은 오로지 “유대인에게 상관”된다고 한다. Brookes, 『주재림론』, 113-14.
 세대주의의 7 세대론을 분명히 하면서 교회시대 역시도  “무섭게 캄캄하고 비길데 없는 환난의 재앙으로 마칠”것이라고 말하고, Brookes, 『주재림론』, 149.
 주님의 지상재림 후 천년왕국 때에도 비중생자가 함께 존재하므로 “이 시대도 전시대와 같이 사람의 실패로 마칠” 것이라고 한다. Brookes, 『주재림론』, 155-56.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소안론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의하면 4장 1절의 “이 일후에”라는 구절을 교회의 휴거(“예수께서 교회를 데려가심”) 후라고 단언하고, 4장-19장을 7년 대환난기로 보고 교회는 그 환난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세대주의적인 도식을 철저하게 따른다. 소안론, 『믁시록 공부』 (경성: 조선야소교서회, 1922), 43-45; idem, 『계시록대요』 (경성: 조선야소교서회, 1936), 50-51.
 또한 7년 대환난 시기는 교회와는 관계없고 “유대인 교회 때”라고 설명한다. 소안론, 『계시록대요』, 51.

      평양신학교에서는 브룩스가 초안한 나이아가라 성경 컨퍼런스에서 수용한 14개 신조를 이눌서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였다. 이눌서 역, “신앙의 원리”, 「신학지남」 5/1 (1922): 12-20.
 이눌서가 종말론 교과서로 사용한 가옥명의 내세론에서도 그리스도의 공중 강림시 신자들이 공중에 끌어 올려져(携擧) 혼인잔치를 하는 사이, 지상에서는 7년간 대환난(전 3년 반, 후 3년 반)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일어나고 그 때에 유대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환영할 것이며 비로소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한다. 價玉銘, 『神道學』, 三冊 (南京: 榮光報社, 1926), 가옥명, 『내세론』, 정재면 역 (평양: 장로회신학교, 1931), 48-50.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상당히 세대주의를 용인하는 성향을 보였다. 예외적인 분이 구레인(John C. Crane, 1888-1964)과 후에 프린스톤으로 가서 가르친 함일돈(Floyd E. Hamilton, 1890-1969) 같은 분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이상웅, “구례인(John C. Crane, 1888-1964) 선교사의 종말론”, 「개혁논총」 55 (2021): 41-72를 보라. Cf. John C. Crane, Systematic Theology: A Compilation from the Works of R. L. Dabney, R. A. Webb, Louis Berkhof and Many Modern Theologians, 3 vols. (Gulfport: Specialized Printing 1953).
 그러므로 상당수의 한국 목사님들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이었다. 이를 잘 드러낸 논구로 이상웅, “해방 이전 한국 장로교 목사들의 종말론”, 「조직신학연구」 37 (2021): 94-12을 보라. 또한 길선주의 세대주의적 말세론에 대한 좋은 분석으로 이덕주,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511-17, 특히 514를 보라. 1974년을 재림 가능성을 말한 것과, 모세 때의 첫 희년으로부터 3,500년 후인 2002년의 천년 왕국 시작된다는 주장 등을 잘 비판하면서도(284) 다른 긍정적인 면을 잘 논의한 이상규, “부흥의 인물 길선주”,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 266-89도 보라.


                 5. 문제 2:  예배에 대한 강조와 예배 문제의 소홀성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어에 아주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로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 교회의 예배가 일종의 부흥회적 예배에 있도록 방치한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디의 부흥집회에 익숙한 선교사들이니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한국 사람들이 예배할 때 그저 부흥회적 예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 분들은 엄숙하게 예배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예배의 규정적 원칙(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등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엄숙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나아갔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한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주일 예배 방식을 제시하는 책인 󰡔위원입교인규됴󰡕(爲願入敎人規條)에는 주일 예배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순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어로 바꾸어 인용하였다).

1. 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2. 기도를 할 것이요.
3. 성경을 볼 것이요.
4. 교우 중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기도할 것이요.
5. 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6. 성경의 뜻을 풀어 가르칠 것이요.
7. 기도할 것이요.
8. 연보를 드릴 것이요.
9.  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마포삼열, 󰡔위원입교회규됴(爲願入敎人規條)󰡕 (경성: 조선야소교서회, 1895), 13-14. 이 일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한 한경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본 초기 한국 장로교 예배 이해”, 「신학과 실천」 66 (2019.09): 47-74도 보라.


이와 같이 비교적 간당한 방식으로 주일 예배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예배 시의 기도문 예시는 좀 더 엄중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어로 고쳐서 제시한 다음 예를 보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를 내시고 다스리시는 주님!
오늘 우리 죄인들이 모여 하나님을 공경하고저 하오나 어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 수 있사오리오마는  우리 주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 얻기를 바라고 성신의 감화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알기를 바라나이다. 또 어떤 나라이든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은혜를 많이 베풀고 그 사람들이 평안히 지내고 복 받기를 바라옵나이다. 또 우리나라에 예수교가 왕성하야 우리 왕과 원과 백성까지 하나님의 명을 좇아 우리나라로 평안히 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옵고, 어서 속히 온 천하 사람이 다 죄를 회개하야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교에 들어와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강림하야 하나님의 나라 세우기를 바라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야 비옵나이다. 아멘. 마포삼열, 󰡔위원입교회규됴(爲願入敎人規條)󰡕, 8 (현대어로 고친 것임).


기도는 비교적 상당히 바르게 하면서도 예배 전체가 성경 전체의 의도에 온전히 일치하게 하는 것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1년 53주간에 걸쳐 마태복음(3주), 누가복음(23주), 요한복음(27주), 사도행전(12주), 에베소서(4주)의 주요 내용을 매주 공부해 나갈 수 있게 주일 성경공부의 범위를 정해서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신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그 만큼 복음 제시가 급선무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국 교회 안에 시편 찬송이 사용되지 않고, 근자에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시편 찬송이 마련되고 그래서 마치 시편 찬송의 사용이 불필요한 것이 나가는듯한 인상을 받게 한 토대가 초기 선교사들의 부흥회식 예배의 용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엄숙하게 예배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여 더운 날에도 예배 때는 부채질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던 마포삼열 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33.
 마포 목사님의 한계가 이런 것에 있었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마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마포삼열 목사님의 큰 기여를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적 복음을 전해 주시고, 모든 것에 대한 성경의 토대를 분명히 하여 주신 그 큰 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동료였던 곽안련 선교사의 말과 같이, 그는 과연 “한국교회를 낳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동료였던 곽안련의 말과 같이, 그는 과연 “한국교회를 낳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편, 󰡔마포삼열 박사 전기󰡕, 19, 편찬위원장 계일승의 말에서 재인용.
 한국 선교 50주년 즈음에 50년 동안의 선교 사역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는 루터나 칼빈과 비슷하게 말했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이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에로 이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머지를 행하셨습니다.” S. A. Moffett, in H. A. Rhodes=노해리(盧解理), ed., Fiftieth Anniversary Cerebration of the Korea Mis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Seoul: YMCA Presss, 1934), 36f.,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215에서 재인용.
 그러나 세대주의의 뿌리가 한국 교회에 내리도록 한 책임과 부흥회식 예배가 그저 용인되게 한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로부터 우리들은 우리 선교사들이 해외에 파송되어 사역할 때 교회 전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앞으로 가징 바람직한 교회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사역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크게 받아야 한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선교사들은 참으로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들은 신학을 한 사람답게 참으로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에게 온전하고도 바른 신학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도 받게 된다. 잘못하면 부실한 신학적 토대 위에 교회가 상당 기간 있으면서 잘못을 극복하는 과제를 가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런 문제가 덜한 사역을 하였으면 한 나라의 교회가 더 든든한 토대에 서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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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20 -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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