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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
Subject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종교개혁사상/맥그래스/조애성경연구원
종교개혁사상 요약/조애성경연구원

Ⅲ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1. 르네상스의 개념
오늘날 불어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가 14,15세기 이탈리아에 있어서 문학과 예술의 부흥을 지칭하는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의 저술가들은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 운동을 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회복’,’부흥’,’각성’,’재개화’등 이다. 어떤 학자는(Jacob Burckhardt) 르네상스가 근대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자신을 처음으로 개인(indivisual)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하였다. 중세의 집단체 의식이 붕괴되고 르네상스의 개인 의식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탈리아가 이러한 새로운 운동(르네상스)의 요람이 되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첫째, 중세의 가장 중요한 지적 동력이었던 스콜라 신학이 이탈리아에서는 결코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14세기에 이탈리아에는 지적 공백 상태가 존재했었다. 이러한 공백을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메꾸어 나갔다. 둘째로 이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었으며, 셋째, 경제적 번영은 여가를, 따라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욕구를 창조해 냈다. 넷째,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희랍어를 말하는 지식인들이 서방으로 탈출하여 왔다. 이렇게 하여 희랍어의 부흥은 불가피한 현상이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희랍 고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 났다.

2. 인문주의의 개념
인문주의(humanism)라는 용어는 희랍과 라틴의 고전 문학에 강조점을 둔 교육의 한 형태를 지칭하기 위하여 1808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인문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문주의는 고전 학문과 언어학에 몰두한 운동이었다. 둘째,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이었다.

1) 고전 학문과 언어학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 학문이 융성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희랍과 라틴 고전들이 원어로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다. 그러면 왜 인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고전들을 연구하려고 했던가? 그 이유는 당시의 작문과 연설에 있어서 웅변술의 향상때문 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작품들을 기록된 웅변의 표준으로 간주하고 영감을 얻고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것들을 연구했던 것이다. 즉, 고전연구가 목적 그 자체라기 보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고전에 대한 학식과 언어학적 능력이란 고대의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다.

2)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
인문주의 운동은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 철학은 스콜라 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인문주의가 어떤 일관된 철학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 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P.O Kristeller) 그는 인문주의가 일차적으로 웅변술의 향상에 관심을 가진 문화적, 교육적 운동으로 본다. 이러한 웅변술의 모델로써 고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다양한 이념들을 가졌다.(플라톤주의자/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지식의 회의적 태도/확고한 신념 등) 인문주의는 이념들의 실제적 내용보다 어떻게 이념들이 획득되고 표현되는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3. Ad fontes (아드 폰테스) – 근원으로
인문주의의 문학적, 문화적 프로그램은 ad fontes (‘근원으로’의 뜻, ‘원래의 자료들로’)즉, 근원으로 되돌아 가자는 슬로우건으로 요악할 수 있다. 원문을 직접적으로 접하기 위하여, 중세의 주석들(법률에 관한 것이든, 성경에 관한 것이든)이라는 ‘여과장치’는 제거되었다. 기독교회에 관해 적용하자면, ‘근원으로’라는 슬로우건은 교부의 저술과 또한 최고의 권위인 성경으로 직접 되돌아 가자는 것을 의미했다. 후기 르네상스의 독자들은 자신들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는 마음으로 성경의 원문에 접근했다. 그들은 이러한 만남이 그 당시의 교회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거부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근원으로’는 단순한 슬로우건 이상으로 중세 후기 교회의 상태에 절망해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생명선이었다. 혼란한 카톨릭교회와 부패한 상황가운데, 사도시대, 즉 기독교회의 황금시대가 다시 한번 현존하는 실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마 현대의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흥분과 기대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종교개혁 직전의 유럽의 사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대감을 재포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4. 북유럽의 인문주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아니라, 주로 북유럽의 인문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북유럽의 인문주의 운동이 어떠한 형태를 취했던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1)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북유럽에 있어서의 수용
북유럽의 인문주의는 그 발달 과정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방법과 이념들이 북유럽에 확산된 세 주요한 경로들이 확인되었다. 첫째, 북유럽의 학자들이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연구를 하거나 또는 외교적 사절단의 일원으로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르네상스의 정신도 함께 가지고 갔다는 점이다. 둘째,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외국과의 서신 왕래를 통하여 르네상스의 이념들을 전파했다는 점이다. 셋째, 이탈리아의 출판사에서 출판된 책들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념들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2) 북유럽 인문주의의 이상
크게 세가지의 주제들이 북유럽의 인문주의를 지배했다.
첫째, ‘고대의 방식에 따른 작문과 연설에서의 웅변’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북유럽의 인문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개인뿐만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교회와 국가 모두)가 개혁될 필요성이 있다는 인식이다. 셋째, 16세기 초에 있어서 북유럽의 인문주의는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쟁의 참화에 대한 반동으로 강한 평화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 전쟁의 재앙에 시달렸던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권력 확장을 위한 교황의 정치적 책략들에 대한 반감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5.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에라스무스는 북유럽의 다른 모든 인문주의자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인물로서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저서 ‘엔키리디온(Enchiridion)’은 그가 진정으로 보물로 여겼던 교육받은 남녀 평신도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평신도들의 자의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주었다. 이 책은 1503년 초판, 1509년 재판, 그리고 진정한 충격을 준 삼판은 1515년에 출판되었다. 그후로 이 책은 거의 경서가 되다시피 했으며 다음 6년 동안에 23판이 출판될 정도였다. 취리히와 비텐베르크에서의 개혁이 ‘엔케리디온’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난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간과할 수 없다. 에라스무스의 성공은 또한 급진적인 새로운 이념들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인쇄술이 갖고 있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자신들의 이념을 선전해야 할 차례가 왔을 때 루터나 쯔빙글리에 의해서도 결코 간과되지 않았다.

‘엔키리디온’은 모두가 교부들의 저술과 성경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당시의 교회가 개혁될 수 있다는 매력적인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새로운 평신도적 경건에 이르는 길로 제시되었으며 이러한 경건의 기초 위에서 교회는 갱신되고 개혁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에라스무스는 장차의 기독교의 생명력이 성직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성직자들은 교육자들로서 이들의 기능은 평신도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를 교회, 즉 의식과 사제, 또는 제도들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에라스무스의 ’엔키리디온’이 갖고 있는 혁명적 성격은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인식하는 것이 교회의 부흥을 위한 열쇠라는 그의 대담하고 새로운 주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접할 수 있어야만 했다. 부정확한 불가타(Vulgate)번역이 아니라 희랍어 원어로 신약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당시에는 가능하지 않던 두 가지 도구를 요구했다. 희랍어 원문의 획득과 이러한 원문을 다룰 수 있는 언어학적 능력이었다. 희랍어 신약성경에 대한 로렌조 발라의 15세기 주석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기 시작했고 희랍어 원문의 획득은 첫 희랍어 성경이 1516년 바젤의 프로벤출판사에서 에라스무스에 의하여 출판되었고 수정판은 152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성경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신약은 네 가지 사본만을 참고했고 계시록은 한 가지 사본으로 번역했고 빠진 다섯 절은 라틴어 성경에서 보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은 문학적 이정표임이 드러났다. 이제 처음으로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희랍어 원문을 후에 라틴어 불가타 번역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교의 한 결과는 성경의 ‘공식적’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의 신뢰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믿음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경’과 ‘불가타 본문’이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질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불가타가 희랍어 신약성경의 번역에 있어서 많은 점에서 대단히 부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중세교회의 많은 관습들과 신념들이 이러한 불가타 번역판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럽게 여겨졌으며, 이와 반대로 개혁자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으로 받아들여 졌다. 에라스무스는 교부들(암브로스, 어거스틴, 제롬 등)의 저술들을 연속 간행해 냄으로써 편집 작업의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것은 그 시대에 가이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 몇 가지 사례들
   결혼을 성례에 포함한 부분 : 결혼이 sacramentum(엡5:31~32)이라고 말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말씀이 에라스무스는 로렌조 발라를 따라 원래의 희랍어는 단순히 ‘신비’
   (mystery)를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도대체 결혼을 ‘성례’라고 언급하고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었다. 중세 카톨릭신학자들이 전거로 사용했던 고전적인
   증거 귀절들 중의 하나가 이렇게 하여 실제적으로 무용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
   이다.
   고해성사에 대한 부분 : 마4:17을 ‘회개를 행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했으며 이것은 고해성사에 대한 명백한 언급으로 여겨졌었다. 에라스무스는 또 다시
   발라를 따라 이 희랍어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로 옮겨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달리 말하면 불가타가 고해성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던 반면
   에라스무스는 이 말씀은 심리적 태도, 즉 참회의 상태에 관한 언급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시 교회의 성례 제도를 정당화시켜 주던 중요한 근거가 도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부분 :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자’라고 인사함으로써
   은총의 저장소라는 이미지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나 발라가 지적
   하듯이 이 희랍어는 단순히 ‘은총을 입은 자’ 또는 ‘은총을 발견한 자’라는 의미일 뿐
   이다. 다시 한번 중세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이 인문주의자들의 신약성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반박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신약성경 연구의 발전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초대교회의 관습과 믿음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번역을 통해 중세의 첨가물들을 붕괴시키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문주의자들의 성경 연구는 초대 교회의 사도적 단순성으로 되돌아 가기 위한 개혁자들의 투쟁에 있어서 우군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6.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 평가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종교개혁에서 두 집단을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르틴 루터의 지도 아래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진행된 개혁운동과 훌트라이히 쯔빙그리의 인도 아래 스위스 취리히에서 전개된 개혁운동이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이 두 집단은 대단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집단은 루터파와 개혁파교회의 설립으로 귀착되었다. 비록 이 두 집단이 각자의 개혁프로그램의 근거로서 거의 동일한 신학적 자료들(성경과 교부들)에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다른 방법들을 사용했으며 그에 상응하는 다른 결과들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집단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차이들 중의 하나는 서로가 인문주의에 대해 대단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1) 인문주의와 스위스 종교개혁
스위스의 종교개혁의 기원은 15세기 초반에 비엔나와 바젤대학에서 형성된 인문주의자 그룹들에게로 소급될 수 있다. 이들 인문주의자 그룹의 일원이었던 쯔빙글리가 취리히의 설교자로 초빙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면서 광범위한 인문주의적 원칙들에 의거한 개혁프로그램을 착수하였다. 그는 특히 성경과 교부들에 근거하여 교회와 사회를 전체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이념들과 방법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하에 그는 종교개혁은 교리가 아니라 주로 교회의 윤리와 생활에 관심을 두었고 종교개혁을 교육적 과정으로 여겨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통찰에 근거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15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쯔빙글리는 이러한 관념을 탈피하고 종교개혁을 인간적 허약성을 제압하는 신적 행위로 파악하게 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유일한 지적 동력이었던 인문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다. 쯔빙글리의 초기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인문주의적이며 스위스 인문주의와 에라스무스의 전형적인 통찰들에 근거하고 있다. 스위스 종교개혁에 대한 인문주의의 영향은 가이 결정적인 것이다.

2) 인문주의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16세기 초반 독일에서 인문주의는 상당히 중요한 지적 동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가 루터에게 끼친 영향은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대학의 신학자였으며 그의 지적 세계는 스콜라 철학의 사유방식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저술들에 대한 주의 깊은 독서를 통해 루터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스콜라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했으며 개인이 자신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임무는 이러한 신학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루터는 생각했다.

쯔빙글리가 교회의 윤리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여긴 반면 루터는 개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교회의 신학이라고 생각했다. 스콜라 주의와 싸우기 위하여 루터는 성경과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에게 매우 의존했다. 물론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새로 출판된 희랍어 신약성경과 인문주의 편집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출판된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이용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단순히 인문주의의 열매를 이용했을 뿐이다. 즉,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도구-히브리어 지식, 어거스틴의 책들, 희랍어 신약성경, 본문 비평양식 등-을 사용하였다. 반 스콜라주의적 태도 때문에 인문주의자들은 루터를 지지하고 동조해 주었지만(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루터는 인문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던 것이다.
3)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사이의 긴장
인문주의가 종교개혁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인문주의자들과 개혁자들은 다같이 성경과 교부들에 근거한 좀 더 단순한 신학을 옹호하여 스콜라 신학을 배척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와 개혁자 사이에는 몇 가지 긴장들이 있다. 첫째, 스콜라 신학에 대한 태도이다. 인문주의자들은 난해성과 세련되지 못한 문체로 인해 스콜라 철학을 배척해지만 개혁자들에게는(특히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 이 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둘째, 성경에 관한 태도이다. 모두 성경이 교회의 개혁에 이르는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그 웅변성, 단순성, 그리고 고대성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와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 위에 정초시켰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ura)라는 구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 오직 성경 외에는 어떤 것에도 조회할 필요가 없다는 종교 개혁의 근본적 신념을 표명하고 있다. 스위스 개혁자들은 성경을 주로 윤리적 지침으로 여겼던 반면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약속의 기록으로 였다. 셋째, 교부들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이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교부 시대의 저술들은 기독교에 대한 단순하고 알기 쉬운 형태를 제시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 고대성과 웅변성 때문에 권위가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특히 오리겐과 제롬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개혁자들은 교부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명백하게 신학적인 기준을 사용했고 이러한 기준에 의해 어거스틴을 가장 탁월하다고 여겼다.

넷째, 교육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인문주의는 본질적으로 학예 과목들의 개혁에 근거한 교육적, 문화적 운동이었다. 그래서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교육자들이었다. 반드시 종교 개혁의 종교적 이념들에 찬성해서라기 보다는 그 교육적 이상들에 강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혁자들은 교육 방법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서, 종교적 이념들을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반면, 전문적인 인문주의 교육자들은 이념들을 가르치는 것 보다는 일차적으로 교육 기술의 발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수사학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인문주의는 연설과 작문에 있어서의 웅변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수사학이 연구되었다. 개혁자들은 저술을 통하여,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이념들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수사학은 종교 개혁의 이념들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기초하여 스위스 종교개혁은 비텐베르크에서의 개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인문주의자와 개혁자들을 구별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꼭 같은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긴장은 1525년에 최고조로 달하고 또한 완전히 명백해 졌다. 이 해에 쯔빙글리와 루터 모두 에라스무스를 공격하는 글을 썼다. 이 두개혁자 모두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가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다는 에라스무스의 교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저한 낙관주의적 견해로 이끄는 것으로 보고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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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25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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