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박형용박사- [합신총회40주년기념 다시 읽는 합신의 역사] 기억하고 감사하며 옷깃을 여미자
이      름: 안명준
작성일자: 2021.06.08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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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신총회40주년기념 : 다시 읽는 합신의 역사] 기억하고 감사하며 옷깃을 여미자_박형용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2021년 6월 2일017

기억하고 감사하며 옷깃을 여미자

박형용 목사, 전 합신총장, 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들은 초창기 쓰임 받으셨던 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는 총회 40주년 기념대회를 2021년 6월 14일(월)에 역삼동에 소재한 화평교회에서 열기로 하였다. 지난 40년간 합신 총회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그리고 비교적 짧지 않은 지난 40년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합신 교단을 합신 교단 되도록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많은 선배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합신 총회 초창기에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많은 선배 사역자들은 이미 하나님 품으로 가셨고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4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하고 축하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우리들은 초창기 쓰임 받으셨던 그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불혹의 나이 40주년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땀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초월해서 살 순수는 없지만 역사에서 배워 하나님의 도움으로 더 나은 역사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은 잘못을 재연하게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금년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교단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들어 낸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합신 교단은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불혹(不惑)의 나이가 된 셈이다. 불혹은 미혹되지 않는 나이요, 의심하지 않는 나이(the age free from vacillation)라는 뜻이다. 그리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합동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서울교회당에서 시작한지 41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합신 총회 교단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제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합동신학대학원이 없으면 합신 총회 교단도 없고, 합신 총회 교단이 없으면 합신대학원도 존속되기 힘들었을 정도로 두 기관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합신 총회 40주년 그리고 합동신학대학원 41주년

금년 2021년은 합신총회 교단으로는 40주년이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는 41주년이 되는 해이다. 합신총회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1년 앞서 간다는 사실 자체가 합신총회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얼마나 끈끈한 관계인지를 증거 해 준다. 합동신학대학원이 합신총회보다 1년 먼저 가는 이유는 1980년대의 교회의 형편과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한국의 정치상황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사회 정치 못지않게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과 총신대학교의 형편도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979년 9월 대구 동부교회에서 회집된 총회는 주류측과 비주류측 그리고 중립측으로 삼분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측은 양쪽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총신대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주류측 인사들의 횡포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총신대학교 신대원 교수 네 명이 사표를 내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합동신학원이 설립되었다.

합동신학원은 1980년 11월 11일에 남서울교회당을 근거로 설립되었다. 체육관에서 간선으로 선출된 전두환 정부는 집권 초기인 1981년 초에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한 교단에 한 신학교만 허용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신학교는 교단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80년 11월 11일에 설립된 합동신학원은 날개도 펴보지 못하고 정부시책으로 존립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 교계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79년 합동 총회의 분열로 중립으로 남아 있었던 교회 리더 목사님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중립 측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들이 더 이상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화합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총회를 형성하여 합동신학원을 돕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중립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파)라는 명칭으로 1981년 9월 22일 남서울교회당(홍정길 목사)에서 그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교단이 합동신학원보다 일 년 늦게 출발함으로 금년이 합동신학대학원은 41주년이 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은 40주년이 되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교단 설립을 주도하신 지도자들

우리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교단 설립을 위해 희생하신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의 개혁 총회 교단의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필자는 독자들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 당시 수고하셨던 리더들의 성함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원한다. 이는 그들의 희생과 노고에 대해 감사하기 원하는 마음과 또한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했는지에 대해 배우기를 원해서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교단의 창립총회 소집 선언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장로회 합동측 교단이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며 발전하던 중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장로교 헌법을 부재상태로 몰아넣으므로 말미암아 교단이 불법과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는 사분오열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교단의 개혁과 화합이 절망적임을 알고 우리는 장로교 정치원리인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의 소신에 따라 총신이사회의 불법적인 교권간섭을 거부하고 합동신학원을 설립한 교수들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총회를 소집할 것을 합의하였다”(총회소집선언문 중에서, 합동신학보 제 2호)라고 읽는다. 그리고 총회의 임원들이 명시되어 있다. 회장 김태운 목사, 부회장 서은선 목사, 서기 김규섭 목사, 부서기 김병원 목사, 회계 임만호 장로, 부회계 윤병양 장로, 총무 황진원 목사.

그리고 총회준비위원회의 위원들의 명단은 노진현 목사 우상열 목사, 임창희 목사, 김상도 목사, 박도삼 목사, 김갑석 목사, 장경재 목사, 김경호 목사, 유재서 목사, 윤남중 목사, 박윤성 목사, 정성규 목사, 전종순 목사, 양세록 목사, 이은익 목사, 윤낙중 목사, 홍정길 목사, 나응찬 목사, 유순복 목사, 정만환 목사, 조성근 목사, 천병전 목사, 신영구 목사 등이며 창립총회 소집을 위해 후원한 교회들은 내동교회(김태운 목사), 서문교회(서은선 목사), 이리중앙교회(김규섭 목사), 남서울교회(홍정길 목사), 화성교회(장경재 목사), 강남은평교회(옥한흠 목사), 새순교회(윤남중 목사), 송월교회(박도삼 목사), 인천동부교회(황진원 목사), 서울중앙교회(신영구 목사), 충신교회(조성근 목사), 동흥교회(김경호 목사), 삼례동부교회(이은익 목사), 여수제일교회(정성규 목사), 부평동부교회(우상열 목사), 부평중앙교회(김원준 목사), 송탄제일교회(박영식 목사), 김천교회(김대해 목사), 평화교회(김상도 목사), 새중앙교회(김형대 목사, 노진현 원로목사), 오산제일교회(김병원 목사)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합동신학보, 제 2호).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계시지만 합동신학보에 의지하여 그 명단을 제시했고, 이 면을 활용하여 명단에서 빠진 리더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개혁총회 교단의 설립과 발전을 위해 초창기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초창기 개혁 총회 리더들은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롬 11:36)”과 “성경의 객관적 권위(딤후 3:16-17),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으로써의 교회(엡 1:22-23)를 인정하며, “적극적인 문화관(창 1:28)”과 “사회봉사(약 2:22; 요일 4:20-21)” 등을 신봉하는 교단이 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개혁파 교단의 리더들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며, 교회의 통치자라는 바른 교회관의 확립과 모든 사역자들은 특권의식이나 주장하는 자세보다는 섬기는 자세를 가지고(막 10”45)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받들도록 힘쓰고, “자신의 정화와 개혁(딤전 4:16)을 통해 진리운동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회개와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화목과 합동운동(엡 4:1-6)을 펴 나아가는 데 최선을 다한다.”(개혁파 총회소집선언문에서, 1981년 9월 22일)라고 천명한다. 우리는 초창기 개혁 총회 리더들의 소망이 우리들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980년대 중반 합신 본관 앞에서, 좌로부터 장경재 목사, 전호진 교수, 오병세 교수(고신), 박윤선 교수, 신복윤 교수, 박형용 교수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1979년 9월 총회에서 합동측 교단이 분열되어 주류측과 비주류측 그리고 중립측으로 분열된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합동신학원을 돕기 위해 230여개 교회로 구성된 중립측은 1981년 9월 22일 “개혁파 총회 소집 선언문”에서 “첫째 우리는 총회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파)라 하며 총회의 역사성에 의거하여 제 66회 총회로 소집한다.”라고 교단의 이름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으로 명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총회를 가리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이라 부르지 않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분열된 비주류인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 교단과의 합동 문제와 관계가 있다.

1984년 9월 18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총회가 인천 송월교회에서 회집되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측과의 합동문제로 찬반이 갈려져 정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개혁 측 총회가 정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1985년 3월 25일에 전주 서문교회(서은선목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와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가 합동을 한다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정회상태에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은 교단 전체가 합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요, 일부 노회와 교회가 합동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주에서 합동한 총회가 그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이라고 붙였다. 이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교단이 두 개가 존재하게 된 셈이다.

구 합동측과 관계된 교단의 판도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원래 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전 보수측)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교단의 크기로 계산하면 합동측이 가장 크고, 보수측과 개혁측 일부가 합친 신생 개혁측이 그 다음으로 크고, 원래 개혁측은 작은 교단이었는데 그 일부가 보수측과 합동함으로 더 작은 교단이 되었다. 교단의 크기와 활동 때문에 세상의 매스컴들은 개혁측 하면 당연히 보수측과 합동한 개혁측을 가리키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10여년 지속되다가 결국 원래 개혁측이 1998년 83회 총회에서 총회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합동신학대학원과 관계된 총회의 명칭이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으로 사용되고 있다.

합동신학원의 태동과 박윤선 원장

합동신학원이 1980년 11월 11일 개원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맞는 학기가 1981년 1학기이다. 그런데 1981년 1학기 등록 학생의 수가 그때의 학적 기록을 보면 1981년 1학기 신입생으로 입학한 학생 수는 41명이었고, 2학년은 97명이었으며, 3학년은 64명으로 총 202명이었다. 그리고 1982년에 입학한 신입생은 70명이었다. 필자가 이 통계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당시 학업하기에 대단히 열악하고 장래가 보장되지도 못한 합동신학원에 몸을 담은 초창기의 학생들의 결단과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치하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전도사들이 합동신학원에 다닌다고 합동측 교회에서 파면되는 경우가 많았다. 초창기의 학생들은 그들의 주님에 대한 헌신과 바른 신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합동신학원을 택했고 그 결과 많은 고생을 하였다.

초창기의 합동신학원의 상황은 다음의 예로 상상해 보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합동신학원이 시작된 장소인 남서울교회의 홍정길 목사는 1980년 11월부터 1985년 3월까지 자신의 방을 합동신학원을 위해 내놓고 자신은 떠돌이 신세 역할을 했다. 남서울교회의 담임목사 실은 대략 6평쯤 되었는데 그 6평방이 합동신학원의 총장실, 교수실, 사무실, 도서관, 휴게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형편이었지만 우리는 매일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윤선 원장의 말은 이를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다. 합동신학원의 개원 후 첫 가을학기를 맞이하면서 기자와의 면담에서 기자가 “앞으로 어떤 교육을 펴 나가실 계획이십니까?”라고 질문하자 박윤선 원장은 “외모로 볼 때는 초라하고 교사도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빈핍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하지 않고 오직 영적 차원에서 부요하여지는 것을 목표로 하여 교육하겠습니다. 편리주의나 안일보다는 고난 중에서 진주를 찾는 운동이 되어나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피상주의 보다 내실주의를 파수하여 은밀한 데서 참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정밀하게 하는 학교가 되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경건주의 보다는 경건함에 있어서 인정받는 신앙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학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 지는 신앙가요 전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합동신학보, 제 2호, 1981년 9월 5일)라고 합동신학원의 각오와 미래를 말씀하셨다.

금년 우리는 합신 총회 40주년을 기념하여 개념대회를 할 것이다. 우리는 불혹의 나이 40세가 된 합신 총회의 현재가 있기까지 많은 선배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성도님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합신 총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꿈을 꾸었던 합신 총회의 오늘과 내일이 우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들의 옷깃을 여밀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