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
이      름: 안명준
작성일자: 2008.01.23 - 11:46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

개척예배 이야기

1980년 4월6일, 부활절 아침에 릭 워렌 목사는 한 고등학교에 마련된 예배처소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일이 이루어지려나 봐!”(새들백 교회 이야기, 57쪽, 이하 ‘새들백’).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문을 연 교회 개척예배에 205명이나 되는 동네 사람들이 몰렸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그는 침례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이미 목회 경력으로 인해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흔하디흔한 박사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그 당시 스무 여섯 살의 새파란 목사에 불과했다. 무슨 연유가 있기에 그는 처음부터 매우 그럴듯한 규모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단 말인가?
1979년 12월 신학교를 졸업한 워렌은 다섯 번에 걸쳐서 여러 신혼부부들이 물려 사용한 간단한 중고 생활도구를 트럭에 싣고 아내 케이와 함께 4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거의 무일푼으로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를 향했다. 정확히 금요일 저녁 5시가 되어 새들백 밸리에 도착한 그들은 우선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갔다. 워렌은 그곳 책임자인 단 데일에게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다. “내 이름은 릭 워렌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당장 머물 집이 필요한데 사실 돈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미친놈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단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글쎄,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봅시다.” 하더니 두 시간 만에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연립주택을 찾아주었다. 그는 첫 달 월세를 무료로 해준데다, 새들백 교회의 첫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움직인 까닭인지 그의 교회 개척에는 도움의 손길들이 제법 있었다. 다른 교회 두 곳으로부터 월 800달러의 후원금을 받게 되었으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서 두 달 치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전화를 받았고, 심지어는 마지막 잔고를 탁탁 털어 유아실 가구를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서 우편함을 열어보니 언젠가 워렌 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어떤 부인이 보내준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바로 가구를 구입하면서 지불한 ‘37달러 50센트’였다고 한다.(‘새들백’ 49). 텔레파시가 통한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돕는 손길들이 주변에서 작용했다는 것은 단지 우연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는 그가 선천적으로 설득력과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겠지만, 그런 일을 위한 준비에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다는 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는 서남침례교 신학대학원 졸업반(1979년)이었을 때 미국에서 가장 큰 100개 교회를 연구했다고 한다.(‘새들백’ 41). 그가 그 연구에서 얻은 대답은 한 교회에서 오래 목회한 목사님들의 교회가 대체로 건강하고 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기 원하시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지 제가 한 곳에서 저의 평생을 바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를 어디로 보내시든지 괜찮습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 간에 저의 일생을 그곳에서 바치게 해 주옵소서.” 그는 신학교 졸업반 시절부터 아주 뚜렷한 목표를 세운 셈이다.
새들백 밸리로 옮겨온 워렌 목사는 개척교회를 드리기까지 12주 동안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기 전에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얼마나 생각해주느냐를 알기 전에는 우리가 얼마나 아느냐에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사용해본 방법 중 이성적이고 관심을 보여주는 대화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빨리 여는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새들백’ 52).

워렌 목사는 매우 원초적 방식이라 할 노방 및 축호전도 끝에 ‘비교인’(the unchurched)을 주요 전도 대상으로 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헌신된 소수의 핵심 멤버들을 중심으로 시작하기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직접 시작하기로 결심했다.”(‘새들백’ 51). <새들백 교회 이야기>를 집필할 당시의(1995년) 장년 신자 5천 명 중에서 4천명이 새들백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하니, 80%가 새신자인 셈이다. 현재 교인 수는 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워렌 목사는 소규모로 성경공부를 시작한 15명과 함께 지역을 대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실시한 지역 설문조사 결과를 놓고 서로 심도 있게 의논했고, 그 지역의 비교인들에게 1만 5천통의 전단을 우편으로 보냈다. 개척예배 바로 직전 주일에는 개척예배 리허설까지(‘새들백’ 55) 할 정도로 그는 준비에 빈틈이 없었다. 그의 교회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워렌 목사의 개척교회와 교회 성장 이야기는 이제 일종의 신화로 자리를 잡았다. 이미 새들백 교회를 주제로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만 하더라도 1995년까지 100편이 넘었으며, 한국어판만 놓고 볼 때 <새들백 교회 이야기>가 1996년에 나온 이래 2005년까지 34쇄에 이르렀고, 2003년에 번역된 <목적이 이끄는 삶>은 2004년까지 91쇄를 넘겼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크고 작은 그의 에세이와 설교집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고 있으며, 새들백 교회에서 개최되는 모든 집회는 초만원을 이룬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한국교회 목사들이 개인이나 단체로 앞 다투어 새들백 교회를 탐방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워렌 목사와 새들백 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것만은 분명하다.

수요자 중심의 목회

한국교회 목사들이 워렌 목사와 새들백 교회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비교인 중심의 전도라는 워렌 목사의 목회 철학을 한번 맛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긴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그래서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좀 야박하게 말해서, 우리는 정치나 경제, 종교를 막론하고 미국의 철학을 배운다기보다는 그들이 이뤄낸 열매만 따먹으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철학이 없으면 무슨 일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에 따른다면 워렌 목사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기본적으로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결론지으면서 나는 이 마지막 충고를 하고 싶다. 당신의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당신의 교회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 계속해서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경작하고 잡초를 뽑고 잔가지를 쳐 주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크기로, 그 교회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속도로 키우실 것이다.(‘새들백’ 439).

워렌 목사가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과 하나님의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투철했다는 뜻이다. 철저한 시장조사, 매우 선정적인 초청장(‘새들백’ 220) 발송, 전도를 위한 신문 광고 비용으로 500달러를 투자하더라고 낭비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에 우리가 동의하든 않든, 그의 목회가 매우 과학적이라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흡사 벤처 기업가가 과학적인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뚫고 대박을 터뜨리듯이 워렌은 목회에서 바로 그런 일을 성취한 사람이다. 구매자의 기호를 정확히 읽고, 거기에 안성맞춤의 교회를 제시한 그의 이러한 목회철학을, 전혀 새로운 건 아니지만 일단 ‘수요자 중심의 목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수요자 중심이라는 워렌의 이런 입장을 나는 일단 적극적으로 지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서 한 수 배울만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청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이런 충고를 건넨다.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많은 목사들에게 있어서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일에 나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를 묻는 대신 그들은 “나는 누구에게 설교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청중의 필요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설교 내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새들백’ 257).

워렌 목사만큼 청중의 요구에 민감한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것을 찾아내는 워렌의 능력 앞에서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청중들은 신학적인 것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의 필요가 일단 채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를 찾는다는 워렌의 주장은(‘새들백’ 257) 매우 정확한 분석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주장이 나에게는 좀 찜찜하게 들린다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건 아마 청중의 요구보다는 늘 성서 텍스트의 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격지심일지 모르겠다. 어쨌든지 수요자의 요구에 모든 목회와 설교의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 바로 워렌의 핵심 주장인 것만은 분명하다.  

방법론적 설교

이런 정도만 말해도 이제 우리는 워렌 목사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청중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의 해결 방안들을 찾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의 모든 설교는 삶의 방법론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러한 방법론에 치우쳐 있는지는 그의 설교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해서 한번 들어보면 그대로 나타난다. 예컨대 이웃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가장 중요한 설교 레퍼토리이다. 월간지 ‘그말씀’ 1997년 9월호부터 99년 2월호에 실린 워렌 목사의 ‘야고보서 시리즈’ 설교 제목을 잠시 돌아보자.(이하 ‘그말씀’에 실린 워렌 목사의 설교를 인용할 때는 연도와 월만 기재함).
“문제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방법”(97/9), “마음을 정하는 방법”(97/10), “행하는 믿음을 개발하는 것”(97/11), “성경으로 축복받는 방법”(97/12), “대인관계를 바르게 하는 방법”(98/1), “참된 믿음을 갖는 방법”(98/4), “입술을 다스리는 방법”(98/7), “다툼을 피하는 방법”(98/9), “남을 판단하기를 그치는 법”(98/10), “인생의 미래를 맞이하는 법”(98/11), “돈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법”(99/2).
야고보서 시리즈 설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설교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귀착된다. <인생의 난제와 해답>(김연택 역, 이하 ‘인생’)에 실린 설교 제목을 간단히 열거하겠다.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인가? 실패에서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영적 침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보통 이상으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있을까?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위기에서 어떻게 담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이 혼란 속에서 나 자신을 건져낼 수 있는가?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고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워렌 목사의 설교가 철저하게 삶의 방법론에 치우쳐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 이상 그의 설교 제목을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들은 분명히 청중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설교 제목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방식의 설교가 새들백 교회에서 아무리 유용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과연 성서 텍스트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서 좀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설교에서 성서 본문이 제시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백화점 진열대 위의 상품처럼 단지 나열될 뿐이지 주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이게 바로 내가 그의 많은 설교를 읽었어도 쓸 만한 설교를 한건도 건지지 못한 이유이다. 내 마음이 닫혀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의 설교가 불량품인지는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 예컨대 그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주님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방법을 차례대로 제시했다. 당신이 누구인가 아십시오.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것인가를 아십시오. 당신이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십시오.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십시오. 당신 혼자서 모든 일을 하지 마십시오. 개인기도 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삶을 즐기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당신의 스트레스를 그리스도에게 맡기십시오.(‘인생’ 13-27). 워렌의 설교에서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 나열식 설교 형태는 별도의 글쓰기에서 충분히 다루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미 지구촌 교회 이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졸고 “설교인가 예화인가? 말씀인가 교양인가?”(기상 2004년5월)에서 어느 정도 짚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기로 하겠다. 다만 설교 행위의 주석과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그의 이러한 나열식 설교는 초코 없는 초코파이와 같다는 사실만 일러두겠다.
워렌의 설교가 주석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방법론적이라는 사실은 서로 맞물려 있는 사태이다. 그가 말씀을 주석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방법론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삶의 방법론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성서 텍스트를 주석할 필요가 없다.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방법들을 적당하게 편집하는 것으로도 청중의 요구 매우 효과적인 대답을 줄 수 있는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에게는 성서 주석과 신학적 해석이 사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청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 ‘어떻게’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는(‘새들백’ 259) 워렌의 확신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에게도 공통된 현상이지만 왜 그들은 성서 텍스트를 주석하지 않고 단지 거기서 삶의 ‘노하우’만 찾으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기독교 영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불가사의다.
그들이 성서를 주석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기독교와 복음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지만, 어쨌든지 그들은 이미 기독교 신앙의 도사(道士) 연 하면서 더 배우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자부하는 것 같다. “참된 믿음을 갖는 방법”이라는 워렌의 설교를 보자. 그는 거기서 상투적인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 후에, 결론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행함이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천국에 대한 확신이라고 설명했다.

나 자신이 어떻게 확실히 알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자신이 정말로 신자인지 아닌지 의심이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고 교회에도 나가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도 읽고 성경공부반에 참석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만약 오늘밤에 죽는다면 당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십니까?((98/4).

그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워렌 목사의 이런 넘치는 확신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과 하나님에 관해서 모르는 게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몇 가지 종교적 규범과 명제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욱 확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렌 목사가 나를 향해서 “당신, 오늘밤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으로 확신하시오?”하고 묻는다면, 나는 십중팔구 우물쭈물할 것 같다. 이래갖고 목사 노릇하겠나.
돈을 관리하는 요령(99/2)으로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아홉 가지 방법(05/4)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아주 구체적인 삶의 방법을 워렌이 실제로 확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청중의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뿐인지 분간할 수는 없다. 아마 그가 확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진정성이 없다면 결국 청중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확신에 진정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 방법론적 설교에 진정성이 더하면 더할수록 기독교 신앙의 왜곡도 그만큼 심각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이런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 지금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워렌 목사의 설교에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 조금 더 깊숙이 살펴보자.  

사적인 영역으로 추락한 복음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하 ‘목적’) 32과 “하나님이 주신 모습으로 섬기기”에서 이렇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현재의 모습을 발견하라. 자신의 현재 모습을 용납하고 즐기라. 자신의 모습을 계속 개발하라. 또한 그는 “균형 잡힌 삶이 아름답다”는 설교에서 이렇게 3단계 방법을 제시한다.

1단계, 목록을 작성하십시오. 우리 삶에서 균형 잡힌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십시오. 2단계, 행동의 계획을 기록하십시오. 균형 잡힌 행동을 하기 위해서 계획을 짜야 합니다. 3단계,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자리 잡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분을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리포트’ 247 이하, 요약)  

아마 어떤 사람들은 워렌의 이런 설교를 괜찮다거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건 기본적으로 설교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건전한 인간관계, 세련된 삶의 미학, 그리고 더 나가서 그런 것을 성취하기 위한 성공전략은 굳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전달될 필요가 없는 교양 학습일 뿐이다. 성경구절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들어가면 그게 주례사이건, 건강 강좌이건, 시트콤이건, 만담이건, 약장사건 아무 상관없다는 이런 태도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는 “인간관계와 성공전략”이라는 제목이 어떻게 들리시는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제목은 내 큰 딸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금년 가을학기에 개설된 교양 선택과목이다. 이 과목의 교수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커뮤니케이션, 갈등, 스트레스 대처 등 인간관계의 기본 기술을 익힌다. 2) 참된 사랑의 특징을 파악하고 성숙한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힌다. 3) 가정 및 직장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방법을 배운다. 4) 나의 성격유형(MBTI)을 발견하여 나의 성격유형에 맞는 진로 및 직업을 찾고, MBTI를 통한 좋은 인간관계 형성 방법을 찾는다. 참고 도서는 다음과 같다. 환상적인 가족 만들기,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 사랑의 기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실패에서 성공으로, 유능한 상담자.
설교 제목이나 내용으로도 꽤나 쓸 만하게 보인다.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면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하는 이유는 워렌의 설교와 대학 저학년의 교양과목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놀랍고 끔찍한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에 몰두하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 설교가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보기에 이건 기독교 신앙의 타락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도 삶의 방법들이 필요하긴 하다. 집, 자식교육, 고부간 갈등, 직업, 부부의 성격차이, 주식, 보험, 온갖 스트레스, 불면증, 신경성 소화불량 같은 일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건강하게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목사의 충고나 교훈, 더구나 워렌의 경우에서 보듯이 목사가 주관적으로 제시하는 몇 가지 처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제 삼자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에 작용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설교는 분명히 처세술이나 삶의 요령이 아니다. 바로 이 길목에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길을 잃는다. 설교자가 청중의 일상을 설교의 매우 중요한 변수로 간주해야 한다는 사실과 일상의 변화는 성서 텍스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정확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에 양극단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청중의 일상이 무의미한 설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중의 일상이 범람하는 설교이다. 워렌은 당연히 후자의 극단으로 빠져든 설교자이다. 친절한 워렌 목사가 청중들에게 이미 세세한 삶의 방법까지 타일러주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거의 폐쇄된 셈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워렌의 설교는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철저하게 사(私)적인 영역으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이건 방법론에 치우친 설교에서 이미 예견된 결과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영이 사람의 말에 의해 제한되는 설교는 결국 잔소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괜찮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남의 장기판에 끼어드는 공연한 훈수로 떨어진다. 그냥 터놓고 생각해보자.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인생에 승리가 보장되는 것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뉴올리언스에서 생명을 잃고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지 못했기 때문인가? 우리의 인생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훨씬 심층적 힘에 의해 진행될 뿐이다. 이건 삶의 외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불교 신자들보다 더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기독교 국가가 더 평화 지향적이고, 이슬람 국가가 파괴적이라는 말도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설교하는가, 같은 곤란한 질문은 사양하겠다. 나에게 대답이 궁핍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여기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긴 사연이 담긴 질문이기 때문이다. 수능 수험생들을 위해서 철야기도회를 마다하지 않는 한국교회에서 내 말은 아마 체험이 없는 신앙이라는 핀잔을 듣기에 안성맞춤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무당이나 개인의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재테크 강사와 설교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평에서 생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게 곧 구원 사건이며, 그것이 곧 복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는 곧 복음 사건 앞에서 개인이 책임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다. 그 복음은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60년 전에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주장한 본훼퍼는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성실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야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산다.(옥중서간, 원래 이 책의 원제는 ‘항거와 순종’이다.).

내가 보기에 워렌은 본훼퍼가 지적한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의 구도에 철저하게 묶여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자동판매기처럼 청중의 사적인 종교적 요구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복음적인 설교자는 결코 아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삶을 파괴한 미국의 부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워렌도 물론 이런 유형의 목사인데, 우리는 복음을 사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설교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저간의 문제를 야베스에 관한 워렌의 설교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야베스의 기도

워렌 목사는 “평범한 사람이 탁월한 삶을 살아가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대상 4:9,10에 등장하는 야베스를 언급하고 있다. 워렌에 따르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탁월해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리포트’ 208).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정상에 서려고 하는 바람에 지금 이렇게 우리의 삶이 극한의 경쟁 구조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설교자가 그런 삶의 패턴을 부추긴다는 것은 오직 수요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겠다는 계산에서 나오게 된 반신학적인, 반성서적인 설교의 한 전형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우주와 맞먹는 존재론적 무게가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래서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마땅히 귀 기울여야겠지만, 그게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야망을 선동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귀를 틀어막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야베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야베스의 친구들은 평범한 삶에 만족했지만,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인생에 있어 어떤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저를 축복하시길 원합니다. 저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당신이 필요합니다.”(‘리포트’ 210).

그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본문은 야베스가 ‘어떤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 주님을 필요로 한다는 언급이 없으며, 그걸 암시하는 대목도 전혀 없다. 다만 그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물질적인 복과 생존의 안전을 기도했을 뿐이다. 워렌은 역대상 1-9장에 열거된 600명의 족보 이름 중에서 야베스에게만 저자의 코멘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침소봉대하는 이유를, 더구나 다른 인물들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름의 코멘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애써 못 본채 하며 그가 야베스를 이렇게 치켜세우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외친다. “도전, 꿈, 야망이 없는 인생은 지루합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야망이 필요합니다.”(‘리포트’ 211). 그는 지금 ‘막 나가자’는 걸까? 꿈과 야망이 없으면 인생이 지루하다는 건 그가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다.
이제 나는 시나브로 워렌의 내면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울러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실체도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한국의 대중적인 목사들이 일 년 365일이 부족하다는 듯이, 한국 땅이 너무 좁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면하지 못하는 징벌을 받은 사람처럼 교회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시킨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망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루함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나는 그들이 보여준 신앙적 몸짓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할 때가 있었지만, 이제 비교적 솔직한 워렌 목사 덕분에 그들에게서 솟아나는 광기에 가까운 신앙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야망과 꿈이 없는 인생이 지루하다니, 유구무언이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과 직결되니까 한 두 마디 보태야겠다. 내 생각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으며, 교회도 없고, 비전도 없고, 야망도 없다. 아니 욥기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정당성과 신앙에 대한 해명 자체도 해체된다. 신학의 깊이로 들어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 세계를 그저 직관해보라. 생명의 근원은 우리가 아무 일 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그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잘 때도 숲속에서는 생명의 힘들이 요정과 함께 움직이고, 바다 속에서도 역시 생명들이 약동하며, 심지어는 땅속의 용암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이름 없는 풀과 꽃의 탄소동화작용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기본적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야망과 꿈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한가를,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얼마나 고약한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그런 거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비전과 야망이 중요한 거 아닌가, 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좀 답답하긴 하지만, 그게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좀 천천히 걸어가시라. 하나님이 이미 필요한 만큼 구원 역사를 추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좀 긴 호흡으로 눈여겨보시라. 서로 다른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고, 같은 귀를 가진 사람은 이미 나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자.  
그렇지만 이왕에 야베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무래도 한국교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한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겠다. 2001년에 번역 1쇄가 나온 뒤 믿거나 말거나 2002년에는 158쇄를 찍었다고 한다. 이는 곧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꾐에 빠져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 박사처럼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런 얄팍하고 자기중심적인 복음주의 신앙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복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이지도 않고, 최소한 상식적이지도 않다. 월가의 주식투자에 성공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바로 오늘의 야베스가 당연히 드려야 할 기도라고 주장하며, 교통 체증으로 인해 비행장에 제 시간에 댈 수 없게 되자 비행기를 연착시켜 달라고 기도한 다음에, 비행기가 연착한 덕분으로 어떤 여인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고 자랑하는 윌킨슨의 간증은 단지 종교적 이기주의를 합리화하는 요설(饒舌)에 불과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에 워렌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52쪽). 동명이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윌킨스와 워렌 두 사람은 야베스를 신화화하는 데 서로 배포가 맞을 것 같다.
그들이 야베스를 신화화한다는 말은 야베스에 대한 성서의 진술을 자신들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오도하고, 부분을 전체로 오역했다는 뜻이다. 이게 우리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며 함정이다. 사실 성서는 오용될 가능성의 폭이 상당히 넓다. 성서에서 히틀러의 제삼제국 이념도 가능하고, 반북친미 구호도 가능하고, 박태선과 문선명의 도그마도 가능하며, 기업 살리기 이론이나 신자유주의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워렌도 성서를 크게 오용하고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성서와 복음을 끝없이 소비하고, 더 정확히 말해서 괴롭히고 있다.

목적이 이끄는 삶

목회자로서 꽤 괜찮은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워렌 목사가 기독교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컨대 그는 ‘준법시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설교한 적이 있다.(05/7). 그거 맞는 말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준법시민이라는 말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는 게 잘못이다. 워렌이 미국 중산층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일종의 ‘시민종교’를 지향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의 실정법을 위반한 결과였다는 기초적 사실관계마저 모른다는 건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할 설교자로서 함량미달이다. 하기야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라이즈 업 코리아’라는 행사를 개최하는 마당에 워렌만을 탓할 수는 없다. 복음과 국가 이념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기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용호상박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목사와 장로를 비롯해서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기독교의 기초를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또는 잊고 싶어 하는 분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제안 드리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가능한대로 우리 모두는 기독교의 초석으로 돌아가는 재교육을 정기적으로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워렌 목사의 설교에서 기독교와 성서의 기초가 부실하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다윗에 관한 바울의 설교를 아래와 같이 인용한 적이 있다.

30여 년 전에 나는 사도행전 13장 36절의 짧은 구절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구절은 내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일곱 단어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절이지만 물건에 찍는 뜨거운 철 도장처럼 나의 삶에 이 단어들이 새겨졌다. “다윗은 그의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겼다.”(NASB). 이제 나는 왜 하나님이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이라고 부르셨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이다.(‘목적’ 415).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워렌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다윗 왕조 중심의 역사 기록을 금과옥조로 여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왕이면 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사람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성전건축의 자격까지 상실한 다윗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을 중심으로 일어난 왕자의 난도 결국 다윗의 책임이다. 내가 보기에 사울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하나님의 목적보다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그렇게 해석된 그 신뢰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게 한 단 하나의 이유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은 분명히 다윗에 대해서 워렌이 인용한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옳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유효한 건 결코 아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다윗을 예로 든 것뿐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워렌의 또 하나의 다른 해석을 보자. 그는 바울이 “나는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고전 9:26)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은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것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나 죽는 것도 모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워렌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목적’ 416). 매우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리시는가? 이게 성서 해석의 기초를 모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아전인수이다. 바울은 살아있는 동안에 사도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철저하게 왕따 당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 활동에서도 전반적으로는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게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도 실패한 분이시다. 성서가 말하는 승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역설과 반전이라는 구도로만 그것을 우리는 조금 따라갈 수 있을 뿐이지 워렌이 부심하고 있는 그런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볼 때 워렌은 성서 텍스트의 실질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도구적 실용주의

어떻게 보면 내가 지금 지적 오만에 빠진 채 워렌의 설교에 있는 ‘옥에 티’를 부풀려서 이전투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워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코가 석자인 마당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형식이나 내용에서 도구적 실용주의라 할 워렌의 설교를 흉내 내고 있는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자들이 내 관심이다. 비록 그런 방식이 일시적으로, 또는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에서는 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심리 작용으로, 또는 인간 삶에 필요한 일종의 도구와 소품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설교가 왜 미국과 한국교회 안에서 그렇게 힘을 얻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글쎄, 그게 나도 궁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에 바로 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성찰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 설교자에게 불요불급한 일들은 뒤로 접어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차제에 나는 동료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요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상담은 정신 분석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라.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윤리 선생들이, 건전한 인관관계는 대학교 교양과목 선생들이, 그리고 사회복지는 정부나 시민단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교회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그들을 돕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다. 물리학은 그들 전문가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목사는 모든 일에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뇌라 할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 조차 버거운 과업이며,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치열하게 투쟁하고 참여해 온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과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오늘의 교회 안에 살려내는 일만 해도 숨 가쁘다. 이 말이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분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여기서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워렌 목사와 새들백 교회는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르겠다. 전통예배의 리터지를 파기하고 현대 음악의 찬송가로(‘새들백’ 317) 청중들의 정서에 어필하거나, 양복과 넥타이가 아닌 평상복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신자들에게 설교 개요 노트를 제공하거나, ‘밑줄 쫘악’((97/8, 98/5, 05/9)이라는 순발력 있는 멘트 등,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교회의 활력을 제고했다 하더라도 복음이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도구적으로 소비될 뿐이라면 결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전승된 종말론적 생명의 신비는 형해화하고 말 것이다. 독자들도 이런 조짐을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눈치 채고 있으리라. <기독교사상 200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