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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신학 :::


37 22 통계카운터 보기   관리자 접속 --+
Name   안명준
Subject   바르트 신학의 방법론

 2007.11.23 20:14
rhealovetj  
http://cafe.naver.com/kjh791215/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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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序論 - 바르트 신학의 방법론

  

2. 本論 -바르트의 기독론 - 교회교의학 제1권 2부를 중심으로

(1)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인 실재

(2)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인 가능성



3. 結論 - 한국 여성의 입장에서본 바르트의 기독론 - ‘He’의 관념주의


  

  

  

  

  

<참고문헌>

  

  

  

1. 序論 - 바르트 신학의 방법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시되는 하나의 관점 내지는 지평은 희랍의 우주론적 地平이다. 이에 의하면 永遠 전부터 위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삼위일체에 있어서 제2의 신적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선재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性肉身을 거쳐서 그가 누구인가를 진술한다. 이것을 전통적으로는 '위로부터의 방법론'이라 부른다. 혹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추관계에서 본 '啓示의 유추', '관계의 유추', '신앙의 유추'이다.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방법론은 古代 敎會로부터 시작한 가장 오래된 방법으로 현대 신학에 있어서 이 방법의 대변자는 칼 바르트다.

위로부터의 방법론에서 출발한 그의 신학의 흐름을 [교회교의학]이라는 著書를 通해 살펴보고, 기독론을 검토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일단 바르트를 편리하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지어 놓으려 한다. 前期를 [로마서 주석]의 시대라 한다면 후기는 바로 [교회교의학]의 시대였다. 前期가 19세기 하르낙의 문화신교주의와 자유주의적 경향에 반대해서 나왔던 그의 변증 신학의 시대 였다면 後期는 변증 神學의 한계를 겪어 내고 신과 인간의 절대적인 심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啓示가 그의 神學의 중심이 되는 이른바 기독론 중심의 시대였다.

후기 신학의 신학적 입장인 교회교의학의 신학이 이 글에서 연구해보려는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의 [교회교의학]의 구성을 볼 것 같으면, 그의 교회교의학 I/1 전반부 서론을 다룬 후 기독론을 다루고 있다. 교회교의학 전반부는 그의 신학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부분이다. 전반부에는 바르트 신학의 과제, 방법 및 방향이 종합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도 교회교의학을 통해 바르트 신학의 방법론을 살펴봄으로서 그의 신학을 고찰해보려 한다.

먼저 내가 주목한 부분은 '교회교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교의학'을 '신학'으로 바꿔 읽어도 무난할 것 같다. 바르트는 그의 조직신학을 교의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는데, 바르트의 교의학이 신학이라고 한다면 '교회교의학'은 바로 '교회의 신학'이다.

바르트는 그의 저서에서 신학을 교회의 한 기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교의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인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리고 신학과 교회에 대한 과제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은 교회의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인간을 향한 그의 啓示하고 화해하는 은혜로운 전향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 그와의 관계성 속에서 신학은 소위 말하는 다른 모든 학문들과 같이 하나의 특별한 인식 대상에 대한 인간적 노력이 되며, 여기에 있어서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들과 같이 하나의 특별한, 그 자체에 있어서 일관된 인식의 길을 간다. 신학은 모든 다른 학문들과 같이 이 길에 대하여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그 타당성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의학이라는 신학이 단지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들에 대한 학문이어서는 안되며, '교회의 선포가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의 啓示와 일치하는가'에 있어서의 '도그마에 관한 학문'이어야 한다. 또한 교의학에는 기독교 신앙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그의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요 신앙의 학문으로서 교회의 선포를 교회의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비판하고 수정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 바르트는 말씀의 세가지 形態를 분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된 말씀이 원초적인 말씀으로서 선포와 신학의 규범이 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교의학이란 단순히 교회들의 교리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선포와 모든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와 일치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견해는 교의학 과제에 대한 탁월한 능력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인 하나님의 性肉身된 말씀이 신학의 규범과 근거이기 때문에 이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의 사건을 분석함으로 그의 신학을 전개시킨다. 먼저 삼위일체교리로서 시작하는데, 삼위일체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에서부터 출발하여 전개시키는 것도 전통적인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점이다. 여기서 바르트 신학의 중심인 기독론은 삼위일체를 전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회교의학]은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안셀름 신증명]에서 신학적 방법으로 전개한 "Fides quarens intellectum"(지성을 요구하는 신앙)의 신학적 프로그램이 그대로 구현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으로 초기의 實存哲學的인 입장을 떠났고 同時에 신앙이 인식론적으로 합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강조하여 基督論的인 기초 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학체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

바르트 기독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보기에 앞서 言及하려하는 것은 이미 [Church Dogmatics]라는 영어판 preface에 나와있듯이 바르트 특유의 서술 방법을 이해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신이 설명하는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유사한 단어와 문장들을 여러번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그의 이론의 틀을 잡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오토 베버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라는 著述에서 시도하고 있으나 역시 부족한 감이 없지는 않다.

좌우간 바르트 신학의 방대함과 그의 특유한 서술 방식을 유의해 두면서 '말씀의 성육신'인 그의 기독론에 관해 考察해 보도록 한다.

  

2. 本論 : 바르트의 기독론 - 교회교의학 제1권 2부를 중심으로

  

바르트의 기독론은 '말씀의 성육신'이라는 제목으로 정의된다. 말씀의 성육신이란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뜻하는데, 이러한 인간되심은 바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유이다.

여기서 啓示란 '하나님 말씀이 인간이 된다'는 것이자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데 있다는 성서를 중심으로, 영원한 말씀의 육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啓示와 그리고 그 사건안에서의 하나님은 자유하신 우리의 하나님임을 증명해보려 한다.

그러기에 앞서 '실재'와 '가능성'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에 대해 보도록 한다. 실재와 가능성이란 '啓示의 실재'와 '啓示의 가능성'으로 '실재에 근거해서만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라는 것은 바르트의 全著作에 나타난 공통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성육신' 신학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예수 그리스도, 啓示의 객관적인 실재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는 성서에서 증거된 '啓示'의 주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요약해보자면, 성서안에 증거된 啓示는 주이자 아버지인 하나님의 啓示로부터 출발하여, 아들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성령에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만족되는 하나님의 啓示이다. 하나님은 啓示의 영원한 주체이다. 그는 결코 술어나 목적어로서 우리를 증거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啓示로서의 '말씀의 성육신' 예수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啓示로서의 성령을 부으심을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질의에 있어서 우리가 질문해야될 가장 옳은 형태의 질문은 바로 "하나님의 啓示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자유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증거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인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이 질의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루어나가야 할 두 가지 대답들을 결정적으로 지적한다. 즉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신성과 인간의 인간성과 죄성 등에 의해 방해받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안에서 자유한데, 이것이 바로 기독론과 성령론의 중심적인 내용이다.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접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啓示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실재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기독론에 있어서의 접근도 실재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즉 먼저 사실에 관한 질의를 놓고 다음에 질의에 관한 해석을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를 이해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 이러한 실재의 tablet으로부터 실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하나님의 자유- 그 자신(즉 그의 실재)을 드러내기 위한-는 그 안에 세워져있고 유지되며, 만약 그러하다면 신적인 필요성으로서의 유일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에 의해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일회적인 현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말씀 혹은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되었고 나사렛 예수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 사람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 진술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그것의 위치와 중요성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의 인식이 요구된다.

첫째, 주석적인 질의에 있어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러한 두 次元의 진술은 신약 성서 안에서는 그렇게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독론 교리는 삼위일체론처럼,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에 관한 분명한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논의'는 부족한 듯한 곳에 있다. 아마도 교의학의 一般的인 작업은 교회,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 같다.

둘째, 문제의 본질에 있어서 신약성서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진술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신약 성서 증언들에 속해 있는데, 그러한 證言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의 관계에서 볼때 부차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성육신이라는 것도 신약 성서에서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 종교들과 신화들에서도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전에 나누어지거나 분류된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위의 진술들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성서의 성육신은 바로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이해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이름에 의해 인식되는 단순함과 유일회성의 실재에 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신약 성서 내용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물론 무엇보다도 그의 God-manhood의 진실을 포함한다.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啓示의 객관적인 실재를 알려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진술의 위치와 重要性에 따라 위의 진술은 두 가지로 분해된다. 즉 '하나님 아들이 나사렛 예수가 되었다'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이다. 전자는 요한복음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공관복음에 가깝다. 물론 兩者의 입장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 전자를 보자.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하나님이나 혹은 하나님 아들인 말씀에 관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떤 특정한 개념을 가지고서 그 다음에 이 개념이 예수 안에서 확증되고 성취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것은 바로 가현설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이다. 이럴 경우 인간 예수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에 생각된 '그리스도나 로고스 혹은 중보자'만이 중요한 것이 된다. 요한의 입장은 후에 유티케스와 후기 루터로 이어진다.

後者의 경우 강조점은 나사렛 예수이다. 그러나 인간의 理想化와 神話를 문제삼고 이에 의해 나사렛 예수가 어느 면에서든지 신적인 자격으로 높이어진 것 같이 다루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유대교적인 에비온주의의 위험을 내포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이 무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공관복음적인 입장은 후에 네스토리우스와 칼빈에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언급해두려는 사실은 바로 이 두가지 성서적 유형 사이에서는 어떤 사상적인 종합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각기 유형의 統一性을 가지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통일성을 가지는 것이어서 신약성서 자체의 본래적인 내용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지 인간적인 진술로는 통일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두 관점의 異端的인 antithesis에의 가능성은 항상 있어 왔다.

아무리 이러한 antithesis가 인간의 현명함으로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원래적인 신약 성서의 틀을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러한 틀에서는 antithesis가 해결되지 않은 체로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번째의 통합적인 말씀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신성과 인성에 관한 antithesis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 啓示의 목격자로서의 성서에의 복종이란 단지 세번째 말씀을 거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알아야하며, 그러면서 아주 충분하리만큼 그 이름과 그리고 두 가지의 이중적인 말씀인 신성과 인성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啓示의 객관적인 가능성


성서의 목격에 의하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사실이다. 이 이름의 bearer로서 첫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말해지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고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화합 안에서 그는 신적인 啓示의 객관적인 실재가 된다.

그의 실존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유이다. 혹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다. 이제는 신적인 啓示의 객관성 안에서 예상되며 토대가 되며 그리고 가져올 수 있는 객관적인 가능성을 우리의 지식 범위 안에서 전개해보도록 한다.

이러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유안에서 그의 啓示가 인간과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 즉 이 이름에 의해 암시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 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啓示가 되는가?"에 관한 질문이며 이 답은 성서를 통해 찾아야 한다. 성서 이외의 다른 자료는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啓示 그 자체는 '하나님은 숨어있고 인간은 눈먼 존재'라는 걸 아는데 있어서 요청된다. 바르트가 본 바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숨어 있고 인간은 그를 볼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설정하는 啓示와 啓示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함께함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며, 이러한 일들은 한계를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인간에게 보여진다. 다시 말하지먄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은 오직 啓示 뿐이다.

더 심오한 질문이 가능하다. 즉 "하나님이 그의 啓示 안에서 얼마나 인간을 위해 자유로울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얼마만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啓示가 될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유일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우리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의 啓示를 요구하는 한에 있어서 啓示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정확하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한다. 啓示의 가능성은 實際的으로 예수 안에 있는 그것의 실재로부터 읽어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자 하는 '個人的인 해석'은 단지 이러한 실재에 관한 한 개인의 읽기와 해석일 뿐임을 언급해두면서 다섯 가지로 말해보도록 한다.

1. "하나님이 그의 啓示 안에서 얼마나 인간을 위해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첫번째 추론은 하나님 편에서의 啓示는 마치 啓示 중 하나가 우리를 만난 것처럼 하나님이 그 스스로도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고 우리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될 때이다. 하나님이 인간이며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예수의 실재는 하나님이 그와 인간 사이에 한계를 그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한계 지음은 그 자신의 실존과 그 실존과는 동일한지 않는 實存 사이에서 표현된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동일하지 않음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하나님의 위대성은 창조물에 대한 그의 겸비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가장 일반적인 진리이다. 물론 이러한 진리는 啓示를 통해서야만 하며, 중요한 사실은 우리를 자유케하기 위해 자신의 겸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때, 그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안에서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도 그는 하나님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를 중재자요, 하나님 그리고 우리 세계 안에서 실재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가능성은 그의 啓示의 가능성으로,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과 그의 하나님됨과 그의 인간됨에 가장 일반적인 의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유하다'는 것인데, 이 자유는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요, 하나님 성령도 아닌 '그의 아들이 인간이 된다'는 방식으로 드러내는데에서 나타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 완전하며, 불완전한 것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하나님이다. 말씀 혹은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진술은 그러므로 제한없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성령과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神聖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다,

아들의 실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한 본성이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의 본성의 연합의 관점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가지 실존에 의하여 확증되고 그리고 이 세가지 상호 내적 연합의 관점에서 말씀 혹은 아들도 아버지 혹은 성령이 없는 인간이 되지 않고, 말씀의 아들되심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사역처럼,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존재의 양상에 있어서 말씀과 아들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증거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하나님 말씀 혹은 아들을 필요로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리를 증거하러 와야 했다. 왜냐하면 이미 영원전부터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그는 우리를 위해 예비되고 열려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말씀 혹은 아들 안에서 우리와 연합하게 된다. 그의 말과 아들 안에서의 하나님은 그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과 동일시되며, 그는 우리를 위해 자유할 수 있다.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으로부터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이 참으로 합법적이며 순수하며 필연적인 'appropriation'(충당, 도용)이라는 것인데, 성서로부터 끌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啓示의 목적을 위해서이며,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이 啓示가 될 수 있음과 인간이 되어야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해한다. 이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啓示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로부터 결론짓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 하나님 아들 혹은 말씀이 최소한 우리에게 알려진 형태로서 내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형태들로의 유추에 의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서 - 자유하다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요, 그러므로 그의 啓示의 방법이다. 우리는 즉시 그것이 인성이라는 사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존재의 형태는 우주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의 실재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알려 진다. 그러나 마치 신비처럼, 啓示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본질과 역사를 침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살고 죽는 그러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정확한 관점 안에서 인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啓示된다. 이러한 likeness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초할 수 있는데, 그가 우리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보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양면이다. 또한 보여짐에 있어서 기억해야할 사실은 영원한 하나님 말씀의 '숨겨짐'과 '겸허'와 '수난'이다. 그러나 로고스의 숨겨짐, 겸허, 수난은 그의 드러남과 높임을 이끌며, 그리하여 啓示의 완성에로까지 이끌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내려오심, 그것 자체는 우리와 유사한 형태를 가정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미 그의 감추어짐 안에서 드러났으며, 감추어짐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으로서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서 믿어지게 되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로부터, 우리는 啓示가 하나님편에서 가능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유한데, 즉 그의 말씀(아들)이 동시에 인간이 됨에 의해, 그리고 그가 영원히 그 스스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서 진정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 남음으로 인해, 겸허, 고난, 굴욕은 신성의 위대함에 있어서의 소실이 아니라, 그것의 목표 실제적으로 그것의 승리의 조명으로서 여겨진다는 사실을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 신성의 위대함의 숨겨짐에 관해 얘기해야겠다. 육신됨에 의해, 말씀은 종의 형태로 숨겨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식능력의 관점에 의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신적인 형태와 비교될 수 있는 '객관화 externalisatinon'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됨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엇보다도 그의 신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감추어짐과 드러냄, 성육신과 부활의 계승(연결)은 감추어짐과 성육신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말씀의 신성 안에서 적어짐과는 관계가 없다. 말씀의 성육신은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말씀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의 육신되심은 '말씀'과 '말씀의 말씀화와 육신화'를 동시에 남겨둔다.

만약 말씀의 전환이 하나님이라는 다른 실재로의 전환이라 할때, 말씀의 성육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啓示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啓示는 말씀의 현재로서 드러나야하며, 하나님화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육체적 실재안에서 감추어짐을 통해 낮아져서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하나, 정확하게 하나님으로서 현재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제한되지 않은 진정한 현재에 의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기뻐한다. 우리는 필요한 것으로 이러한 실재를 인정한다.

가현설과 에비온주의자는 신약 성서 증언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버리거나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주어진 실재안에서 가능성은 실현된다. 즉 그것이 啓示의 가능성이며, 啓示의 필연적인 형태이다.

5.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啓示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말씀이 인간이 되는 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스스로가 되는 바대로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말씀 스스로가 그의 啓示안에서 된 바이다. 몸은 인간, 인간성, 인간화를 포함하긴 하나, 다른 요소들로부터 얻어진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몸은 근본적으로, 마지막으로, 배타적으로 인간에 대한 진실된 개념인데,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분시킨다. 그것만이 진정한 인간의 개념을 결정하는데, 그 또한 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있다. 그러나 몸에 관한 인간의 해석은 이미 얻어진 것이 아니라, 啓示된 말씀과 하나님의 선고에 의해 끌어온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몸으로 두는 것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선고를 채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을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미 그를 통해 영원한 속제(redemption)를 만났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몸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정하는 것이 이러한 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행위는 이러한 실재안에서 그는 영원성에 있어서 '그'일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도 '그'이다. 그는 또한 우리가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 또한 몸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고, 인간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啓示의 객관적인 가능성이다. 그것 자체-실재임으로-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를 인간이 됨으로 숨기기 원하셨으나, 인간으로서 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숨김으로부터 부수고 나오셨다. 그의 인성은 장벽이기도 하고, 열여진 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가 된다. 즉 그가 진정한 인간으로 죽었으며, 동일한 인간으로서 죽은 후 삼일만에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啓示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안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냄에 의해 그는 하나님과 인간 두가지가 다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이라는 것은 인류학적이 측면이 아니라, 그의 이해가 하나님의 판결(verdict)에 의해 낙인된 인간이며, 하나님과 대면하는 인간, 그리고 몸이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는 신적인 결정안에 그의 자리를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며,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육신으로 감추고 드러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러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에게 투영함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이상의 것을 요약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어떻게 하나님의 啓示가 되는가?"를 이해해보자면, 이 사실은 단지 啓示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啓示의 가능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啓示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안에서 우리와 만남으로서 가능하다"고 질의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러한 啓示의 가능성을 위의 다섯 가지 안에서 발견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는 다른 실재로서 동일시되는 '겸비'에 의해서

②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 혹은 말씀과 동일시된다는 사실과

③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우리와 유사한 실재의 세계에 속함과

④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감소'없이 속함으로서

⑤ 사람됨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됨'에서 우리는 啓示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데, 단지 실재로부터 거슬러 읽어오면서 가능하다.

본질적으로, 'Cur Deus homo?'(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Credo ut intelligam(신앙과 지성)이라는 프로그램의 합법적인 실행이다.

  

3. 結論 - 한국 여성의 입장에서본 바르트의 기독론 - 'He'의 관념주의

  

여기까지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그의 신학의 방법론과 방법론의 중심인 기독론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그의 교회교의학이란 저서를 연구해보면서 내가 놀라마지 않았던 사실은 그의 용어 선택의 획일성이다. God, He, himself, his 등 마치 신학의 용어에 있어서 주체는 He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바르트 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바르트 이전의 전통파 신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의 급진적인 정치 신학의 흐름 속에서도 He가 지배함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he의 사용은 인간의 인식 구조와도 직결된다는 의미에서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역시 '호칭'의 문제이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 중에 의례히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되는 획일화를 볼 수 있다. 물론 "왜 내가 호칭에 주목하는가?"에 대한 비판이 있다면 이 비판은 '하나님 아버지'가 가져다준 호칭이 하나님의 남성성과의 관련성에 의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이야기할때 보다 분명해질 것이며, 이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면 위의 질문은 해소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려보려 했을때, 가장 압도적으로 형상되는 이미지는 역시 키크고 웅장한 체격을 소유한 무사와도 같은 하나님 내지는 흰 옷에 흰 수염을 달고 지팡이를 쥐고 있는 노인네와 같은 모습이다. 두 형상에서 알 수 있는 공통된 인식은 역시 하나님은 남성성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교회에서 듣게 되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성서에서 반복하여 이야기되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러한 우리의 하나님 형상을 고정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예수의 남성성으로 태어남은 하나님 형상의 남성지향성을 더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에서의 학습에 의해서만 신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일생동안 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없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수의 신앙인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 만약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전반부에서 밝혔듯이 그의 신학이 "교회를 위한 학문이요, 신앙의 학문으로서, 교회의 선포를 교회의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비판하고 수정했을때" 생기게 될 결과를 상상해보라. 교회는 하나님의 남성성에 의해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할 새로운 기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은 또다시 고정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He로서 그리고 성육신한 남성이 啓示로 실재했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그의 [교회교의학]의 신학은 교회에서 거부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라는 것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사회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라면 말이다. 아마도 교회라는 것이 사회와는 분리된 종파와 같은 형태의 것이라면 교회교의학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분리된 자들끼리의 화합은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啓示란 무엇이며, 그것의 啓示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자의성을 가진 자신의 논리를 하나님의 啓示의 실재를 통해 그대로 끌어온 바였다고 주장할때 과연 그것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성서로 돌아가서 '성서'와 '믿음' 그리고 '恩寵'에만 의존해보라고 할 것인가? 도대체 성서에 무엇이 쓰여있길래 말인가? 더구나 바르트적 입장에 의하면 성서도 批評的인 視覺에서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축자영감설로 보는게 더 妥當하지 않은가?

최근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다수의 교회 교인들이 여성 안수에 반대하는 이유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여성이여 잠잠하라'라는 句節을 인용한 것을 볼 때 저렇게 놀라면서도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啓示와 나와 같은 한국의 소수의 여성들이 생각하는 啓示의 차이는 무엇일까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啓示가 아닌가. 차라리 성서에 있는 모든 말씀들에서 啓示성을 버리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여성으로서 啓示를 찾을 때, 예수의 객관적인 啓示가 전제되어야 겠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성 개인들의 삶이다. 서남동과 같은 제1세대 민중 신학자들이 얘기한 바 '민중들의 사회전기'가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의 억압받는 삶 자체가 하나의 신학의 객관적인 실재와 가능성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실재와 가능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전제해두고 여성들의 삶의 客觀的 實在性과 가능성을 주요한 뼈대로 만들어 바르트의 기독론을 수정시켜간다면, 바르트 신학에서도 현대 신학으로의 가능성이 매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보다 바르트 신학을 미완성인 체로 남겨두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가는 것이 '신학함'에 있어서 더 완성도가 높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바르트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그 자신 특유의 신학으로 만들어 나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바르트 신학의 자리는 너무도 애매하다. 보수진영에서는 과격하다고 보는가하면, 진보진영에서는 너무도 보수적이라 비판을 받는다. 자기만의 색깔이 없는 신학은 더 이상 신학으로서의 과제가 없다. 이제는 가난이라던지 여성, 계급, 인종과 같은 기본적인 색깔을 지닌 신학이 대두해야 한다. 그러한 색깔이 保守性을 띤 것이든 아니면 進步性을 띤 것이든간에 뭔가 확실한 역동성을 던져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본다. 신학이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역동적인 힘과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

1.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II], 연대 출판부, 1987

2.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대한기독교서회, 1983

3. 김영한 ,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1987

4. 오토 베버 저 , 김광식 역,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대한기독교서회,1983

5. 대한기독교서회 편집 , [기독교대백과 사전],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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