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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안명준
Subject   이상규 박사- 로마 역사가들은 초기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을까?

로마 역사가들은 초기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을까?

 





이상규 교수(고신대) 의 고대기독교산책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포함한 초기 기독교에 대한 기록은 어떤 것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증거는 오직 성경뿐인가? 아니면 당대의 다른 기록들이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셨고,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아가셨다면 그에 대한 성경 밖의 기록이 없을까? 특히 그는 로마제국 치하의 팔레스틴에서 사셨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면 로마의 역사 속에나 빌라도의 보고서 속에서 그가 ‘역사성’을 증거 해 주는 기록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였던 져스틴(Justin, 125-163)은 그 가능성을 인정했다. 150년 경 흔히 「제일변증서」(The First Apologia)라고 부르는 변증서를 써서 황제인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ius Pius)에게 보냈던 저스틴은 예수의 공생애와 죽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빌라도의 임기 중에 남긴 공식 기록을 통해서 확증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혀 있던 못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못 박히신 후에 사형 집향자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제비뽑아 그들 가운데서 서롤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기록되었던 행전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1)

저스틴 보다 후기의 인물인 테루툴리아누스(c. 150/160-250)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말하면서 당시의 공공문서 속에 요셉과 마리아의 명단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예수의 탄생시기에 있었던 인구 조사가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문서 속에 기록되었으므로 이 문서 창고를 뒤지는 수고만 감내한다면 호적 명부에서 요셉이나 마리아의 명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2)

  저스틴이나 테루툴리아누스의 독자들이 실제로 문서고를 뒤지며 예수의 역사성을 성경 밖의 자료로 추적해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변증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 이외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성경 이외의 증거들, 특히 로마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검토함으로서 로마인들은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에 대한 성경 밖의 기록으로는 크게 말해서 이교적 자료(pagan documents)와 유대교적 자료가 있다. 이교적 자료 가운데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은 예수님의 행적과 그 이후의 초기 기독교에 대한 증거와 암시를 주는 소중한 기록으로 간주되고 있다. 2세기 초 트라이얀(Trajan, 98-117)3) 황제의 통치기에 활동했던 3사람의 로마인들의 기록 중 연대순으로는 플리니(AD 111), 타키투스(115), 그리고 수에토니우스(122) 순으로 기록되지만, 그 기록이 담고 있는 역사 내용은 그 반대의 순서이다. 즉 수에토니우스는 49년의 로마에서의 유대인 추방 사건을, 타키투스는 64년 네로의 기독교 박해 사건을, 그리고 플리니는 112년 경 비두니아와 본도지방에서의 기독교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 글에서는 이 순서대로 기술하였다. 어떻든 이들의 기록은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소중한 성경 밖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동시에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1. 로마에서의 유대인 추방에 관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성경 밖의 기록으로서 초기 기독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한 가지 기록으로는 로마의 행정가였던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69- c.140)가 남긴 기록이다. 후에 언급할 역사가 플리니의 친구이기도 했던 수에토니우스는 기사(騎士)출신으로서 하드리안 황제의 비서였다. 따라서 그는 공문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이런 그의 지위 때문에 「열두황제의 생애」(De Vita Caesarum, Lives of the Twelve Caesars)를 기록할 수 있었다. 트라이얀 황제의 친구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그도 다른 로마의 사가들처럼 기독교를 폄하하였는데, 그는 ‘네로의 생애’(Life of Nero)에서 “기독교인들에게 형벌이 가해졌는데 어떤 새로운 악한 미신에 빠진 집단의 사람들이었다”4)고 기술했다. ‘새로운 악한 미신’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시 교육받은 로마인들이 가졌던 일반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고, 신자들을 하나의 집단(a class of man)이라고 말한 것은 수적으로 이미 상당한 집단을 형성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120년 경 줄리어스 시저로부터 12사람의 황제의 전기를 기록했는데,「클라우디우스의 생애」(Life of Claudius)에서 로마에서의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므로 그는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Iudaeos impulsore Chresto assidue tumultuantes Roma
  expulit).5)

AD 49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6) 유대인 추방에 대한 이 짧은 기록은 그 후 많은 역사가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수에토니우스가 말하는 유대인 추방이 언제 일어났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추방된 유대인의 수는 얼마인가? 그리고 난동(disturbances, tumultuantes)을 일으킨 유대인만이 추방되었는가 아니면 유대인 공동체 전부에게 유효한 명령이었는가 등의 문제는 로마에서의 기독교의 기원과 초기 기독교, 그리고 로마에서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7)

  문제는 수에토니우스의 이 짧은 글에서 말하는 크레스투스(Chrestus)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8) Chrestus가 Christus의 오기인가 아니면 Christus와 무관한 Chrestus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9) 만일 수에토니우스가 말하는 크레스투스가 예수 ‘크리스투스’(Christus)를 칭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AD 49년에 로마에는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49년 유대인 추방사건이 발생한지 약 70년 후에 기록된 이 글에서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크레스투스(Chrestus)를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칭하는 크리스투스(Christus)의 오기라고 믿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로마 역사가의 ‘역사적’ 언급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기간(41-54) 중에 복음 전파와 관련하여 로마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된 유대인들과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다(행 13:49-51, 14:19-20).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의 기록, 곧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 지라.”라는 기록이 말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저명한 신약학자인 부르스(F. F. Bruce),10) 초대교회사가인 헨리 차드윅(H. Chadwick), 피츠마이어(J. A. Fitzmyer) 등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Christus의 오기라고 믿고 있다.11) 특히 부르스는 이 사건을 기술한 수에토니우스가 AD 49년의 로마의 치안기록에서 언급된 크레스투스를 그로부터 70년이 지나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로마에 거주했던 한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하고 있다.12)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크레스투스가 크리스투스를 칭하는 것이라면 AD 49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기독교도로부터 제기되는 문제 때문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이 중 일원으로 이곳을 떠나 고린도로 간 것으로 보인다.

  40년대 말에 이탈리아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면 로마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사실 로마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AD 30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순례자들 가운데,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행 2:10)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일한 유럽 인들로서 이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되고 후일 로마교회 설립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후대의 교회의 전통과는 달리 로마교회는 바울이나 베드로에 의해 시작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40년대 후반까지 베드로는 팔레스틴을 떠나지 않고 있었고(갈2:11), 바울은 60년대 초까지 로마에 도착하지 않았다(행 28:14). 로마교회에 대한 베드로나 바울의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지원하고 후원했을 것이지만 그 기원은 30년대 유대에서 로마로 이주해온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수년전에 로마에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AD 60년 경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남쪽 지방인 보디올(Puteoli)에서 그리스도인을 만났다(행 28:13). 이곳은 로마로부터 약 4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영접을 받았다(행 28:14). 이보다 약 3년 앞서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했는데, 이 글에는 로마에는 이미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이 글에서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롬 1:8)고 말하고 여러 차례 바울은 그들에게 가고자 했던 점을 상기시켰다(롬 1:13, 15:22-24).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언제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는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에는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는 거류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부터 간헐적인 이주가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62년에는 폼페이(Pompey)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팔레스틴 지방으로부터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에서의 유대인 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들은 후에 자유인으로 해방되었다. 그 결과 로마시내에는 다수의 유대인 회당이 있었는데, 캄펜세스(Campenses)회당, 아우구스텐세스(Augustenses)회당, 아그리펜세스(Agrippenses)회당, 서버렌세스(Suburenses)회당, 볼룸넨세스(Volumnenses)회당, 히브리(Hebrews)회당, 감람나누(Oliver Tree) 회당 등이 있었다.14) 이러한 사실은 로마에 정확하게 수를 추정할 수는 없으나 다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 신앙운동과 관련하여 유대인 공동체에는 소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사건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 로마의 화제에 대한 타키투스의 기록(c. 115-117)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 55/56-117)는 로마의 역사가로서 원로원 귀족 출신으로서 황제 너르바(Nerva)에 의해서 97년에는 최고행정관을 지냈다. 트라이얀황제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플리니가 비두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직후 트라이얀황제에 의해 112-113년에는 아시아지방 총독을 역임했다. 타키투스는 수많은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의 생애 여정을 헤아리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가 어디서 출생했는지 알 수 없고, 흔히 그는 현재의 벨기에 지역제정 담당관이었던 코넬리우스 타키투스(Conelius Tacitus)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이 점도 분명치 않다.

  타키투스는 주후 14년에서 68년까지의 로마제국의 역사를 14권의 책으로 기록한 「역사」(Historiae)를 남겼는데,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시기인 29-32년 어간의 역사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타키투스가 115년-117년경에 쓴 것으로 판단되는 「연대기」(Annals)15)에서는 AD 64년에 발생한 로마에서의 화재와 기독교 박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네로는 소문을 막기 위하여 군중들이 그리스도인들(Christiani)이라고 부르는 일단의 무리들을 범인으로 지목한 후 아주 교묘하고도 잔악한 방법으로 이들을 고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은 로마황제 디베료(Tiberius)의 치세 때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당했던 크리스투스(Christus)라는 자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가공할 만한 미신은 한동안 잠잠했으나 곧 다시 일어나서 역병(疫病)의 근원지였던 유대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악독하고 더러운 사상들이 집결되어 있던 로마 안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자백에 따라 또한 수많은 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단순히 방화혐의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을 향한 증오 때문이었다. 이들은 군중들의 조롱과 오락의 대상으로 처형되었다. 이들은 짐승들의 가죽으로 둘러 싸여져서 개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하고, 혹은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횃불 대신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구경거리를 위해 자기의 정원을 개방했으며, 또한 사유극장 안에서 이러한 창극을 연출하였고, 전차병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자기의 전차 안에 타고서 군중들 속으로 휩쓸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극형을 받기에 족한 이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모든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야만성을 충족시키는 데에 희생되고 있다는 느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16)

AD 115-117년 경에 쓰여진 이 타키투스의 기록은 약 50년 전에 발생했던 로마시 화재사건과 네로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 박해와 순교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신약성경 외에서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언급으로 간주되고 있다. 로마시의 화재사건이란 AD 64년 6월 18일 발생하여 밤낮 7일 간 계속된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로마의 14구역 중 3개 지역이 전소되었고, 7개 지역은 부분적으로 불탔던 대화재사건이었다.17) 아마도 이 사건은 치안(治安)의 문제로 보고 되었고 또 타키투스가 이 사실을 기록할 당시 기독교는 상당한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므로 과거의 사료를 검토하여 이 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타키투스가 기독교에 대하여 경멸했던 것으로 보아 화제사건과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 사건의 정보를 기독교인들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빌라도의 보고서와 같은 공문서로부터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타키투스는 당시의 소문에 의하면 네로가 대화재를 바라보면서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했다고 기록했다.18) 그러나 스에토니우스는 이 소문을 기정사실로 기록하고 있고, 네로가 로마시를 방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그런데, 로마의 화재사건과 관련한 이 기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했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리어 타키투스는 기독교에 대해 “해로운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 pernicious superstition)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면서도, 네로에 의해 속죄양으로 희생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비록 네로를 싫어했으나 주로 궁정의 소문에 근거를 두고 기록했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주고 있다. 역사가로서의 타키투스의 명성은 그의 친구인 플리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 속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후대사람들에게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나의 삼촌의 죽음에 대한 증언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고맙게 생각합니다…만일 그의 죽음이 당신에 의해 기록된다면 그에 대한 불멸의 명성이 남게 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20)

플리니의 이 편지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타키투스의 이 기록은 또 하나의 가장 오래된 성경 밖의 기록으로서, 특히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신약의 5가지 점을 확인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가 티베리우스황제 치하에서 일어났다는 점(눅 3:1), 둘째, 그리스도가 처형당할 당시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의 총독이었다는 사실(마 27:2, 행 3:13, 13:28), 셋째, 그리스도가 죄인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눅 23:2), 넷째, 이 일이 유대지방에서 일어났다는 점(막 11:16), 이 신앙운동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퍼져갔다는 점(행 1:4, 28:14)이 그것이다. 그래서 누가-행전의 지리적 단계, 곧 유대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사역(눅 2:4)이 바울의 로마에서의 사역(행 28:14)으로 종결되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타키투스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실재성과 초기 기독교의 지리적 확장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화제 사건과 관련한 기록 외에도 타키투스는 초기 기독교와 유관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AD 57년에 로마의 장군 아우루스 플라우티누스(Aulus Plautius)의 아내 폼포니아 그레치나(Pomponia Graecina)는 “외국으로부터 전해진 미신”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아우루스 플라우티누스는 AD 43년 경 남부 브리튼(Britain)을 정복하고 로마의 영토로 귀속한 장군이었다. 이 장군의 부인은 14년 동안이나 상복과 같은 옷을 입고 당연시되었던 그녀의 신분에 걸맞는 이들과의 사교를 피해왔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았으나 그녀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비록 그녀는 다른 이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았으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폼포니아 그레치나가 추종했던 “외국으로부터 전해진 미신”은 기독교였을 것이다. 타키투스의 이 기록에 대해 H. Pitman은 “방탄한 네로황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절재와 금욕을 지향했던 그리스도인들의 고결한 생활이야 말로 ‘영구적인 장송’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고 해석했다.21)


3. 비두니아 지방 총독 플리니의 기록 (c. 112)

  플리니(Pliny, 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c. 62- c. 113)는 AD 62년 현재의 밀란에서 멀지 않는 코뭄(Comum)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삼촌인 플리니 1세(Pliny the Elder)에 의해 양육 받았다. 그는 삼촌이었던 플리니 1세(Pliny the Elder)22)와 구별하기 위해 플리니 2세(Pliny the Younger)라고 불린다. 14살 때 로마로 가서 로마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수사학자로 알려진 꾸인틸리안(Aristides Quintiliaus) 문하에서 공부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수사학을 공부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어 문필가가 되려고 했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후일 로마 제국의 행정관료로 활동하게 된 그는 편지 쓰는 일을 즐겨했고 이 일에 만족했다고 한다. 로마정부 기관의 관직(praefectus aerari militaris 혹은 praefectus aerari Saturni)에서 일하던 그는 AD 100년에는 행정관(Consul)에 임명되었다. 그는 3번이나 트라이얀황제의 법률고문으로서 황제의 의전비서관(consilium principis)을 지냈다. 특히 그는 트라이얀의 황제 즉위식에서 황제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이 분명하고, 111년 경 트라얀 황제에 의해 흑해 서해안쪽에 있는 비두니아(Bithynia)와 본도지방의 총독(legatus propraetore)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13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플리니는 먼 여행을 별로 해 보지 못했던 인물인데, 비두니아와 본도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로마를 떠나 에베소를 경유하여 임지인 비두니아에 도착한 날은 111년 9월 17일이었다.23) 비두니아와 본도는 풍요한 대지, 해양자원이 풍부하여 로마제국에서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비두니아는 비두니아의 왕이었던 니코메데스 4세(Nicomedes IV)가 기원전 75년에 그 영토를 로마제국에 양도하여 제국에 편입되었고, 약 10년이 지나 본도는 기원전 64년에 로마에 병합되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플리니가 비두니아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를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역사 상 가장 행복한 시기”(during a happy period of more than fourscore years, the public was conducted by the virtue and abilities of Nerva, Trajan, Hadrian, and the two Antonines)라고 명명했는데,24) “기독교 시대의 제2기”에 해당했다.

  플리니 2세는 서신으로 된 전 10권의 서간문을 남겼는데, 이 일로 그는 서신의 사람(a man of letters)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남긴 현존하는 10권의 서신집 가운데서 9권은 플리니의 생애 여러 기간 동안 쓰여진 20편 내지 30편의 서간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제10권의 경우는 플리니가 비두니아와 본도의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트라이얀황제(98-117)에게 보낸 60통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25) 따라서 그의 서신 제10권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플리니는 타키투스 보다 재능이나 다양성 차원에서는 다소 부족하지만, 역사기록의 신빙성이나 정확성에 있어서는 타키투스 보다 신뢰를 받았다.26)

  플리니가 112년 경에 기록한 트라이얀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는 기록된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유감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신앙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27)
 
황제 폐하께(My Lord)! 저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당신에게 여쭙는 것이 저의 습관입니다. 저의 우유부단과 무지를 보다 잘 지적해주시고 정정해 주실 이가 폐하외에 누가 있겠나이까! 저는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의 재판에 참여해 본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전례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자와 젊은 자들에 대해 차별을 두어야 하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신앙을 그들이 포기할 때, 그 죄를 사면해야 하는 것인지, 일단 기독교 신자였던 자들은 그 후 신앙을 포기해도 아무런 소용없이 처벌을 해야 되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기도교인임을 표명하는 그 자체로써 처벌을 받게 되는지, 혹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과 함께 부수되는 범죄 사실이 있을 때 처벌을 해야 되는지요?

  이제까지는 기독교도라는 죄 몫으로 체포당한 자들을 다음과 같이 처벌하였습니다. 피고들에게 우선 진실로 기독교인이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 라고 대답할 경우에는 그 형벌에 대한 경고를 한 후 두 번, 세 번까지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그래도 계속 고집하면 그들을 처형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그들의 죄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고집과 꺾이지 않는 오만은 어쨌든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로마 시민권자들은 제가 수도로 이송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우리들이 이미 경험하였듯이 제가 이 문제를 취급했기 때문에 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익명의 편지가 제게 보내져왔습니다.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이 명단 가운데 있는 몇몇 사람들은 자기들이 현재나 과거에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부정하였습니다. 이들은 나의 명령에 따라서 제신들의 이름을 불러 주문을 외우고, 제가 이를 위해 특별히 여러 신들의 조상(statues)들과 함께 준비해 두었던 당신의 초상 앞에 향을 피우고 포도주를 바쳐 경배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라는 자를 저주하였습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이러한 짓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말대로 경배한 자들을 석방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또한 어떤 자들은 자기들이 과거에는 기독교들이었으나, 그 후 그 신앙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자들은 3년 전 혹은 그 이상, 이들 중 한 명은 20년 전에 이미 기독교를 떠났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의 초상과 신들의 조상에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의 실수나 잘못이 있다면 겨우 아래와 같은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이들은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해놓고 해가 뜨기 전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찬양하는 곡조 없는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함께 맹세를 나누는데, 이는 어떤 범죄를 범하도록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절도, 강도, 간음, 약속의 파기, 인간들로부터 부탁을 받고 그 신의를 지키지 않는 행위 등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그 후에 모임을 계속하여, 일단 헤어졌다가 다시 모여 음식을 나누는데,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평범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제가 당신의 지시에 따라서 모든 사적 모임을 금하는 법령을 발한 뒤 그러한 모임마저도 중지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는 소위 ‘집사들’(deacons)이라고 불린 두 명의 여자 노예들을 고문하여 좀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서도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악한 미신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해 황제 폐하의 고견을 들을 때까지 더 이상의 심리를 중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반드시 황제 폐하께 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연령층과 남녀를 뛰어넘어 수많은 자들이 혐의를 받고 있고, 또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염성 강한 미신은 도시에만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과 지방에도 침투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곧 중지시키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다시피 한 신전들이 다시 사람들의 찾아오고 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던 제사가 다시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사는 이 없던 제사용 짐승들을 위한 사료도 다시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미루어 보건대 이 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28)

플리니는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황제와 끊임없이 서신 왕래를 했는데, 모든 중요한 사안들을 황제와 의논하고 황제의 지시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그는 독자적으로 결정할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이거나 브루스(F. F. Bruce)의 설명처럼 전형적인 공무원상을 보여준다.29) 일예로 비두니아 지방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화재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의용소방대(collegium fabrorum)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황제에게 제안한 일이 있었다. 즉 그는 150명 미만의 인구로 하되 이 본연의 일 외에는 다른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이며, 이 정도의 수를 감독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보고하였다.30)

그러나 황제의 대답은 의외였다. “만일 사람들이 그 명칭이 무엇이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공통의 목적을 위해 모이다보면 쉬 정치적인 조직(hetaeria, political club)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소화 작업은 개개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그리고는 가정에서 화재시를 대비하여 물 한 양동이와 펌프를 준비해 두라는 것이 황제의 지시였다.31)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의용소방대를 조직한다 해도 그것이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성 때문에 소망대의조직을 반대했던 것은 당시의 상황을 반영해 준다. 이 답변 속에서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얼마나 제한을 받았던 가를 엿볼 수 있다.

  플리니는 그의 50여 년 간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져 본 일이 없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자신이 관할하는 비두니아 지방에서 기독교가 급속하게 전파되자 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고심한 것 같고, 황제의 조언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리니의 편지는 다소 장황했던 반면 황제의 답신은 간단했다. 플리니에게 보낸 트라이얀 황제의 회신은 다음과 같다.

나의 친애하는 세쿤두스(Secundus)여, 그대는 기독교라는 혐의로 당신에게 고소를 받은 자들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올바른 과정을 밟았습니다. 사실 어떻게 이들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를 한 마디로 일반적인 결정을 내리기가 곤란합니다. 일부러 이들을 속속들이 찾아 색출해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약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반드시 처벌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부정하고 이에 대한 근거로써 우리들의 신들의 이름을 불러 찬양한다면 이를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과거에 그 자에 대해 어떤 의심이 있었던지 상관없이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받은 바, 발신인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익명의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며, 우리들이 사는 시대를 잘 알지 못하는 야만적인 행위입니다.32)

이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비 기독교권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 처리 문제와 관련된 플리니와 트라이얀 황제간의 편지는 몇 되지 않는 중요한 사료로서 몇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끌고 있다. 우선 이 편지에서 플리니는 비두니아 지방에서는 빈빈한 일이었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는 일(cognitio)에 관여한 바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어린아이나 어른을 동일하게 취급해야 하는지, 신앙을 포기한 이들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단지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nomen isum)처벌할 충분한 근거가 되는지, 아니면 신자라는 사실과 함께 다른 범범행위가 있어야(flagitia cohaerentia nomini) 처벌할 수 있는지 등을 묻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플리니에게 고지해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플리니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고발되었다(Christiani deferebantur)고 말한다. 여기서 플리니가 사용하는 Christiani deferebantur라는 말은 법률용어로서, 동사 defero 는 “누구 누구를 반대하여 통보함”(inform against somebody)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고발자는 누구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타키투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확산으로 사업상 손실을 입은 상인이거나 사업가일 가능성이 높다.33)

  플리니의 이 편지를 통하여 당시 비두니아 지바에서의 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비두니아 지방과 본도지방에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지방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베드로 전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벧전 1:1). 그러나 플리니가 총독으로 있을 당시 신자의 수는 급증했고, 여자 노예를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도시와 시골에서 빠르게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제판하기 위해 로마로 보낸다는 언급은 기독교가 로마 시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이교의 신전들이 곧 황폐화될 상황에 직면했다. 이 기록은 신약성경의 증거를 확인해 주고 있다. 즉 기독교 복음의 전파와 함께 은장색업자(銀匠色業者)들이 생계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행19:24ff), 이교의 신전에서 사용될 짐승의 사료를 조달하는 업자들 또한 기독교의 영향으로 자신의 생계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34)

  둘째, 초기 기독교 예배의식에 관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집회가 “어느 정해진 날(fixed day) 해뜨기 전”에 회집하였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찬송과 성만찬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안식 후 첫날에”(the first day of the week), 아마도 성찬식을 행하기 위해 "떡을 떼려"(to break bread) 모였던 드로아에서의 집회와 비교될 수 있다. 플리니의 편지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집회는 같은 날 좀 더 후에 있었는데, 그들은 아가페 곧 애찬(fellowship meal)을 나누었다. 이들이 첫 모임에서 행했다고 하는 ‘맹세’는 플리니가 사용한 라틴어로는 sacramentum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 속에는 우리가 오늘 성례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라틴어에서 이 세크라멘툼이라는 말은 로마의 병사들이 군에 입대할 때 복종할 것을 다짐하여 맹세하는 데 사용되거나, 범죄조직에서 조직에 대한 맹세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플리리는 이 이 맹세가 범죄행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먹는 음식이 “평범하고 무해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떠돌던 식인 풍습(ritual cannibalism)이나 근친상간을 행한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기도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를 거부하여 저주하지 않았다(고전 12:3). 도리어 이들은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거나 어떤 형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넷째,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일을 지시하는 황제의 답신에서 법령이나 전례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플리니는 기독교인이라는 고백만으로도 죄가 성립하는지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는 점과 함께 불명예스러운 일이 수반될 때 죄가 되는지를 묻고 있으나 황제는 이 점에 대해 답하지 않고 있다. 즉 기독교에 대한 뚜렷한 제재 규정이 없고 치안상 문제가 될 때 만 처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기독교는 비두니아와 본도지방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탈루스의 기록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 혹은 플리니가 초기 기독교에 대해 말하기보다 훨씬 앞서서 한 로마의 작가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한 한 가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마에서 유대인의 추방이 있는지 약 3년이 지난 후인 AD 52년 탈루스(Thallus)가 남긴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 또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경 밖의 기록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탈루스는 디베료황제 치하의 노예출신으로서 그는 트로이 전쟁 때부터 당시까지의 그리이스의 역사를 아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은 분실되어 현존하지 않으나 AD 221년 경 줄리어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인용을 통해, 예수님의 처형 당시의 정황을 성경 밖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탈루스는 그의 역사서 제3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팔레스틴에 임한 초자연적인 암흑을 언급하고 이는 일식(solar eclipse)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름달에는 일식이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탈루스의 지적은 옳지 않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처형된 지 약 20년이 지난 후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로마의 비 기독교도들 사이에 알려졌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 하다.

맺는 말

  이상과 같은 비 기독교적 자료를 통해 64년경에서부터 110년 어간에 이미 비두니아 지방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49년에서 64년 사이에 로마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현저한 사실은 이들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는 점이다. 플리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도사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편만하다”고 했다.

로마시의 경우 49년의 유대인 추방이 있는지 15년이 지나 대화제로 로마시의 3개 지역이 전소되었을 때 네로황제가 “기독교라는 한 집단”(class.... called christians)을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이 점은 기독교 신자들이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는 점을 암시한다. P. Barnett, 24.

비록 우리가 로마나 비두니아 지방의 기독교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 시작은 예수의 사역으로 기원한 유다지방에서 전해졌을 것이다. 이 작은 시작이 한 세대를 거쳐 가면서 당시 세계로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해로운 미신이었으나 그 미신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고신대학교 교수, 호주 시드니 메쿼리대학교 고대사학과 연구교수

1) Justin, First Apologia 35. 7-9.
2) Tertullian, Adversus Marcionem iv. 7. 19
3) 트라이얀이 황제로 피임되었을 당시 독일 지역에 주둔 중인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군인으로 혹은 행정가로서 로마제국의 공복으로 살았다. 그는 키가 크고 튼튼한 체격의 스파르타적인 용기를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근면했던 그는 국력을 신장하고 영토를 확장하였고, 117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칭송을 받았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타키투스와 플리니로 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4) Suetonius, Nero 16. 2; Paul Barnett, Is the New Testament History? (Sydney: Hodder & Stoughton, 1986), 23.
5) Suetonius, Claudius 25.4. 흔히 영어로는 이렇게 번역된다. “Since the Jews constantly made disturbances at the instigation of Chrestus, he[Claudius] expelled them from Rome."(J. C. Rolfe, Suetonius, LCL, 53).
6)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을 명한 클라우디우스 칙령이 49년에 발표되었다는 근거는 5세기 기독교 역사가였던 오로시우스(Orosius)의 기록(Orosius, Historiae adversus paganos 7.6.15-16)에 근거하고 있고, 현대의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David W. Gill and Conrad Gempf, The Book of Acts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Vol. 2 Graeco-Roman Setting (Eerdmans, 1994), 469.
7) H. J. Leon, The Jews of Ancient Rome, 22-23.
8) D. Slingerland, "Chrestus: Christus," in A. J. Every-Peck ed., New Perspectives on Ancient Judaism, Vol. 4, The Literature of Early Rabbinic Judaism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133-34.
9)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Stephen Benko, "Pagan Criticism of Christianity During the First Two Centuries A.D.,"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omischen Welt, Band II.23.2 (1980), 1056-1061을 참고할 것.
10) F. F. Bruce, The Book of the Acts (Eerdmans, 1988), 347.
11) 그러나 에드윈 저지(Edwin Judge), 벤코(Benko)는 견해를 달리한다. 호주의 저명한 고대사학자로서 로마사 전공의 저지교수는 로마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간의 폭력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수에토니우스는 기독교의 현존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Chrestus를 Christus 로 오기할 정도의 실수를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E. A. Judge and G.S.R. Thomas, "The Origin of the Church at Rome: A New Solution?" RTR 25(1966), 84-86]. 벤코는 Chrestus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대행동주의자로서 이 난동은 기독교와 무관하고, 도리어 유대민족주의나 애국주의 혹은 열혈당(Zealotism)과 관련된 인사라고 지적했다[S. Benko, "the Edict of Claudius of AD. 49 and the Instigator of Chrestus," TZ 25(1969), 406-418]. 한 역사가의 짧은 기록은 약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12) F. F. 브루스(서영일역), 「초대교회역사」(CLC, 1992), 173; F. F. 브루스(한균역), 「예수님과 기독교의 기원」(생명의말씀사, 1984), 21.
13) Paul Barnett, 23.
14) F. F. 브루스, 172.
15) 「로마제국의 연대기」(Annals of Imperial Rome)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책은 본래 1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6권의 책의 사본은 AD 850년경에 복사된 한 가지 사본만 남아 있고, 7권부터 10권까지는 분실되었다. 그리고 11권부터 16권까지의 역사는 11세기 경에 기록된 사본이 남아 있다.
16) Annals, XV, 44, 2-5.
17) Edward T. Salmon, A History of the Roman World, From 30 BC to AD 138 (London: Methuen & Co., 1075), 181.
18) Annals, XV, 39.
19) Life of Nero, 38.
20) Epistles, 6:16; Paul Barnett, 20.
21) 브루스, 174.
22) 플리니 1세는 37권으로 구성된 기념비적인 「자연의 역사」(National History)라는 작품을 남겼던 인물로서 79년 8월에 있었던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을 조사하러 갔다가 연기에 질식되어 사망했다. 그의 삼촌 플리니는 플리니 2세도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숙부의 요청을 거절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3) Robert L. Wilken, The Christians as the Romans Saw Them (Yale Univ. Press, 1984), 1.  플리니는 군복무차 시리아를 여행한 일 외에는 이탈리아를 떠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R. L. Wilken, 4).
24)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6 vols. (London: 1978). vol. 1, chap. 1, "Introduction."
25) 플리니의 서간문 원전은 R. A. B. Mynors, ed., Epistularum libri decem (Oxford, 1963), 영문번역본은 Betty Radice, The Letters of the Younger Pliny (NY: Penguin Books, 1963)이 대표적인 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26) 인드로 몬타넬리(김정하 역), 「로마 제국사」(까치, 1998), 354.
27) 이 편지와 트라이얀 황제의 답신에 대한 토론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A. N. Sherwin-White, The Letters of Pliny: A Historical and Social Commentary (Oxford, 1966)는 최근의 중요한 문서이며, 보다 오래된 연구로는 E. G. Hardy, Christianity and the Roman Government (London, 1934)가 대표적이다.
28) Epistles of Pliny, X, 96. 이 본문의 영문번역본은 Stephen Benko, 1068-9, 혹은 Paul McKechnie, The First Christian Centuries (Apollos, 1996), 110-112를 참고할 것. 이와 관련된 전문은 특히 J. Stevenson, A New Eusebius (1957), 13-16을 참고하라.
29) 브루스, 213.
30) Epistle, 10. 33.
31) Epistle, 10. 34.
32) 이 두 서신들을 Epistles of Pliny, X, 97.
33) Stephen Benko, op. cit., 1070; Robert L. Wilken, 15.
34) P. Barnett, 18.
35) 기독교 역사가인 Julinus Africanus(AD 221)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유월절은 춘분 후의 보름달에 해당함으로 Thallus의 주장이 올지 않음을 지적했다. 브루스 , 「초대교회 역사」, 173.
36) P. Barnett,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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