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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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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이야기
Subject   기독교강요 강의/안명준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Ph.D. 수업)

안명준교수(평택대신학전문대학원)

수업계획
수업소개 및 수업일정과 수업진행 소개
인터넷을 통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산책
기독교강요 CTV 42 디지털 강요 산책
칼빈이 누구인가? 신학자로서 해석자로서 접근
칼빈의 신학적 훈련을 통한 생애를 엿보기
기독교 강요란 어떤 책인가?
강요의 역사, 목적, 사상적 배경
사상적 배경으로 영향력
어거스틴- 사상전반에 영향
크리소스톰- 성경해석- 간결성과 단순성
루터-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순서가 1536년 판 강요의 구성에 나타난다.
강요의 형식
제 1권- 제 4권까지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신학적 내용들






















칼빈이 누구인가? 신학자로서 해석자로서 접근
칼빈의 신학적 훈련을 통한 생애를 엿보기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위대한 신학자였다. 로버트 킹돈(Robert M. Kingdon)에 의하면 칼빈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였으며, 그가 여러 저술에서 전개한 신학적, 교회적, 그리고 정치적 사상, 또 그가 제네바에 세워 지도한 모델교회, 마지막으로 그가 여러 나라의 정치적, 지적 지도자들에게 베푼 적극적인 지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전하는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Robert M. Kingdon, "John Calvin,"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For the studies on the biography of John Calvin, see Barend Jacobus Engelbrecht, "Calvyn as die grondlegger van die Reformatoriese leer," Die Hervormer 50 (1959): 12-13, 16-17, 20; Emile Doumergue, 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Geneve: Slatkine, 1969); A. D. Pont, "Calyvn: 'n lewensskets," Die Hervormer 52 (1962): 5-6, 18-19; Benjamin B. Warfield, "John Calvin: The Man and his Work," Methodist Review 58 (1909): 642-663; Richard Stauffer, "Calvin," in International Calvinism: 1541-1715, ed. Menna Prestwich (Oxford: Clarendon Press, 1985), pp. 15-38; Charles Partee, "Farel's Influence on Calvin: A Prolusion," in Actes du Colloque Guillaume Farel, eds. Pierre Barthel, Remy Scheurer and Richard Stauffer (New Haven: Yale University, 1983), pp. 173-85; T. H. L. Parker, "Calvin in His Age," Reformed and Presbyterian World 25 (1959): 300-07; William J. Bouwsma,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in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ed. Jill Raitt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1987); 318-33.
 

개혁자 칼빈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 칼빈의 신학을 근거하여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을 밝히려고 한다.

I. 칼빈의 삶

초기생애

영어식 존 칼빈(John Calvin)은 프랑스어로 장 칼뱅(Jea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Theodore Beza, "Life of John Calvin," in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vol. 1, ed. by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3), p. 21. Here Beza recorded Calvin's birthday as "the 27th July in the year of our Lord 1509".
 프랑스의 피카디 주에 있는 유명한 고도 노용 Noyon,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8, pp. 297-298: "an ancient cathedral city, called Noyon-la-Sainte, on account of its many churches, convents, priests, and monks, in the northern province of Picardy, which has given birth to the crusading monk, Peter of Amiens, to the leaders of the French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the Ligue), and to many revolutionary as well as reactionary characters."
에서 태어났다.  노용이란 도시는 한때 성 머다드(St. Merdad) 성 엘오이워스 (St. Eloiwas)와 같은 감독들이 살았던 유명한 곳이었다, B. J. van der Walt, From Noyon to Geneva: A Pilgrimage in the Steps of John Calvin (1509-1564) (Potchefstroom: Potchefstroom University for CHE, 1979), p. 3.
 또 찰스 대제(후기 신성로마 황제)가 768년 누우스트리아(Neustria)의 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곳이며 987년에는 카페티안(Capetian) 왕조의 창시자이며 프랑스의 왕 휴우 카펫 (Hugh Capet)이 왕으로 즉위한 곳이었다. "Noyon,"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Micropaedia, 15th ed.

역사가 윌 듀란트는 노용 도시를 칼빈의 신정정치의 개념과 관련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노용은 교회와 감독에 의하여 지배받는 교회 도시였다. 여기서 처음부터 칼빈은 신정정치의 -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자들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것- 하나의 예를 가졌다고 한다. Will Durant, The Reformation: A History of European Civilization from Wyclif to Calvin: 1300-1564, The Story of Civilization: Part VI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57), p. 459. He considers Geneva as the city of God in the world, citing an example that Valentin Andreae, a Lutheran minister from Wurttemberg, praised the life of Geneva enviously. Ibid., pp. 472-476.
  칼빈이 자란 곳은 이렇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런 의식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후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칼빈의 아버지의 이름은 제라드 코뱅(Gerard Cauvin) 이었다. 그는 근면하고 엄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칼빈의 어머니는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이었다. 제라드는 노용에서 2 마일쯤 떨어진 항구로서 외스(Oise)강을 가로지는 퐁 레베크 (Pont l'Eve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공(boatman)을 하거나 아니면 물통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에밀 두메르그, 칼빈 사상의 성격과 구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 프랑수아 방델은 제라드가 공장직공이며 뱃사람 집안 출신으로 본다. 참고로 프랑스아 방델,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17. 파커는 두 개의 직업을 모두 가졌을 가능도 배제하지 않는다. 참고로 T. H. L. 파커, 죤 칼빈의 생애와 업적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23.
  일반적으로 칼빈은 아버지의 예리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 받았으며 어머니의 경건심을 이어 받았다고 알려진다. 물론 그의 용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 도시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Theodore Beza, "Life of John Calvin," p. 21.
  그의 아버지는 노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런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나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

    학문의 시작


제라드는 칼빈을 노용에 있는 카페뜨 대학(the college of the Capettes)에 보냈다. 그곳에서의 학문적인 프로그램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은 수의 교수진으로 보아 파리에 있는 대학에 비해 교육의 수준은 떨어졌다. 그곳에서의 교육에 만족하지 않은 제라드는 1523년 칼빈이 라 마르셰 대학(the college of La Marche) 에 입학시켰다.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 9. Here he says, "Calvin's father dispatched him to the university of Paris when he was about twelve, then the normal age for beginning higher education." He measures  twelve  on Calvin's arriving at Paris because he thinks that Calvin would have been sent in 1521. But Philip Schaff, F. Wendel, and  Alister E. McGrath accept the year as "1523". This date is the general view of the scholars. Against this view T. H. L. Parker insists on Calvin's entry at La March in 1520 or 1521. See T. H. L. Parker, John Calvin (Batavia: Lion Publishing Corporation, 1987), pp. 187-8. Alister E. McGrath, A Life of John Calvin: A Study in the Shaping of Western Culture (Oxford: Basil Blackwell, 1990), p. 27, concludes as follows: "Calvin probably attended Latin Classes under the supervision of Cordier at either or Sainte-Barbe, without the young Calvin having any formal association with either or any college at this initial stage."
 이 대학은 인문주의적 정신을 칼빈에게 주었다. 그곳에서 칼빈은 유명한 라틴어 교수인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 아래서 라틴어를 배웠다. Alexandre Ganoczy, The Young Calvin, trans. David Foxgrover and Wade Provo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7), p. 57. On his influence upon Calvin Ganoczy writes the following: "This outstanding priest was definitely a partisan of pervasive reform, both in teaching methods and education which he wanted to base on trust and not constraint, and all aspects of piety, which he hoped would be less formal and more Christ-centered. Cordier proved himself to be an heir of biblical humanism and of the devotio moderna. He wanted students to be initiated not only in grammar but at the same time in piety and in love of Christ, his word and his laws. Although the young Calvin spent only a few months in the school of this illustrious master, Cordier had a profound influence on him." Cordier's influence on Calvin, however, does not mean that he taught young Calvin the Gospel and made the most important contribution to Calvin's conversion. The connection between Cordier's influence and Calvin's sudden conversion is an unproved conjecture.
 그는 현대 교육학의 창시자중에 한사람으로서 칼빈에게 인문주의 철학과 기독교 경건을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F. Wendel, Calvin et l'humanism, p. 11; Alexander Ganoczy, The Young Calvin, p. 57. Steven Ozment, also points out the fact that Cordier introduced Calvin to 'the scholarly world of humanism', in The Age of Reform 1250-1550: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p. 352.
 칼빈은 자신의 데살로니가 전서의 주석(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Thessalonians)을 코디어에게 헌정하였고, 후에 그를 자신이 세운 제네바 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로 청빙하였다. 후에 칼빈은 그 대학에서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으로 옮겼다. 에라스무스와 로욜라를 배출한 그 대학에서 칼빈은 자신의 지적 형성의 큰 발전을 보게된다. 당시 그 대학에는 베다(Beda), 안토니오 코로넬(Antonio Coronel) 그리고 존 메이져(John Major)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칼빈은 철학과 수사학, 교부들의 작품들을 배울 수 있었다. 몽테규에서는 루터의 사상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그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이유는 아마도 법조계의 직업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T. Beza, about the reasons why Calvin's father changed his first plan, says that the design of making him a priest was interrupted by a change in the view of his father because he saw that law was a surer road to wealth and honor.("Life of John Calvin," p. 22). In relation to the reason why his father changed his mind, Wendel, points to the real problem as follows: "He caused his son to abandon theology because he was no longer assured of the support of the church dignitaries of Noyon, upon whom he had been counting to provide Jean with a first-class appointment. In consequence of his management of the winding-up of an estate, of which he had not been able to render an acceptable account, Gerard was now embroiled with the Chapter of Noyon. He thought therefore that he was obliged to seek a career for his son elsewhere, and, relying upon the celebrity of Pierre de l'Estsoile, he sent Jean to pursue legal studies at Orleans.", in Calvin, p. 21.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르레앙 대학(University of Orleans)으로 갔다. 그는 거기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레스토알( Pierre de l'Estoile) 밑에서 법률과 수사학을 배운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는 이탈리아의 법학자 안드레아 알키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 대학(University of Bourges)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루터파 신자였던 멜케오르 볼마르(Melchor Wolmar) 교수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칼빈은 헬라어 고전은 물론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볼마르의 루터란 영향이 칼빈의 회심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F. Wendel, Calvin, p. 23. A. Ganoczy in The Young Calvin, p. 68 agrees with him, referring to a statement of Beza. Beza says about Wolmar as Calvin's teacher of Greek as the following: "I have the greater pleasure in mentioning his name, because he was my own teacher, and the only I had from boyhood up to youth. His learning, piety, and other virtues, together with his admirable abilities as a teacher of youth, cannot be sufficiently praised. On his suggestions, and with his assistance, Calvin learned Greek. The collection of the benefit which he thus received from Wolmar, he afterwards publicly testified  by dedicating to him the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see Life of John Calvin, pp. xxiii-xxiv. From Beza's record, we can not find out Wolmar's influence on Calvin's conversion, except Greek. In his dedicatory epistle Calvin also did not speak of him about the influence related to his religious experience and his conversion as follows: "Nothing, however, has had greater weight with me than the recollection of the first time I was sent by my father to learn civil law. Under your direction and tuition, I conjoined with the study of law Greek literature, of which you were at that time a most celebrated professor. And certainly it was not owing to you that I did not make greater proficiency; for, with your wonted kindness of disposition, you would have had no hesitation in lending me a helping hand for the completion of my course, had I not been called away by my father's death, when I had little more than started." in Comm. on 2 Cor. p. 101. Here Calvin called him a lawyer. It is clear that Calvin thought of him as a teacher of law and Greek, not as a religious teacher who converted him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이런 과정을 통하여 칼빈은 인문주의자로서 원문 해석에 있어서 필요한 훈련을 배웠다. 후에 성경을 해석하는 위대한 학자로 쓰이게 된다.

1531년 5월에 칼빈의 아버지 제라드가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이제는 아버지의 뜻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하나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그는 파리 왕립 대학(Royal College)로 옮겨 피에르 다네(Pierre Danes) 밑에서 헬라어를 배우고, 바타블(Vatable)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 칼빈은 1532년 4월 4일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해석(Calvin's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를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칼빈은 에라스무스에 버금가는 유명한 인문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칼빈은 에라스무스의 본문비평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스토아주의적 입장에서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마음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칼빈이 세네카의 관용에 대한 해석을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였다. 칼빈의 이책은 내용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칼빈의 회심



칼빈 바로 이때 갑자스런 회심을 하게된다. 자신의 회심의 날짜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쓴 시편주석의 서문에서는 당시 자신의 회심의 상황을 설명한다.

칼빈 역시 루터의 성경연구가 종교개혁의 기반을 마련한 것처럼 관심을 성경연구에 집중하였다.  칼빈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1533년 11월 1일 취임되었을 때 연설문을 도와주게 되는데, 그 연설문의 내용은 기존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루터가 주장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호소하였다. 칼빈이 이 연설문을 직접 썼는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도와주었는지 아니면 콥이 혼자서 썼는지는 계속 논쟁되고 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으로, 니콜라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결국 파리 남서부 250마일에 위치한 앙굴렘(Angouleme)에 은신처를 정했다. 그는 친구인 루이스 두 틸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교부들의 책을 비롯한 수많은 장서가 있었다. 칼빈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쓸수 있었다.

칼빈은 1534년 5월 로용을 방문하여 성직자로서 그의 직업을 종결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을 했다. 1534년에 그는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 - 죽을 때 영혼은 잠을 자기 시작해서 죽은 자의 마지막 부활 때 잠을 깬다는 교리-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Psychopannychia)이라는 책를 발간했다. 여기서는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의 영혼는 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534년 10월 18일에. 그들에 대한 박해 이유는 1534년 10월 마르쿠르(Antoine Marcourt)가 로마 교회의 미사를 반대하는 조문들을 붙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무섭게 시작되었다. 칼빈도 결국 망명자로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5년 1월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인 콥을 만났다. 그리고 듀 틸레의 서재에서 쓰기 시작한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1535년 8월).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하면서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사를 썼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바로 프랑스 신교도들에 대한 변호를 서문에 불였다.
1536년 Reader in Holy Scripture to the Church in Geneva 가 되다. 교수로 시작하고 설교자가 되다. 신앙공백에 제네바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서명시도가 후에 강경이미지로 나타나고 칼빈에 대한 비난으로 칼빈 반대파가 1538년 2월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칼빈이 후에 제네바를 떠나게 한다. 예배의식 특히 성체(host) 문제로 추방 당함.
    1538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목회를 시작, 성경주해 교수직 수행 요한복음과 고린도서 강해.

1541년 9월 13 열렬한 환영

기독교강요


(평택대 안명준교수)

기독교강요를 이해하기 위한 구조들

강요의 구조

구성의 원칙이 삼위일체적이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체계를 따른것이며,
루터의 소요리문답를 따른 형태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1.1)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해서 어떤 분이신가를 다룬다.


교리와 윤리의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경건신학
    자신의 신학을 개인적이며 경건과 관련된 것으로 만든다.

강요에 나타난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플라톤적이다.
수평적보다는 수직적이다. 필립 홀트롭은 “플라톤은 직접 경험과 직관으로.
그리고 (어거스틴과 신플라톤주의) 하나님 안에 참여함으로써 지식을 얻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이 강요를 시작하는 방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에서 이미 플라톤적 관점을 엿 볼수 있다.“
칼빈의 사고는 항상 그러한 교리, 즉 하나님과 인간은 모두 영적실재이지만(1.12.3),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실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실재라는 교리로 귀결된다.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동질성을 중시한다(신적 존엄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강조). 플라톤의 사고영역 전체가 그의 목적에 유용하다(참여, 조명, 중재, 성령의 감동 등의 개념).(필립 홀트롭, 기독교강요핸드북, 25)

예를들면

finitum non capax infiniti.
특히 플라톤의 신개념은 칼빈의 신 개념 설명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볼수 있다.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nanae Religions)

인간을 강조). 여기서 강요라는 말은 법학의 용어로서 Gaius 가 법학강요(Institutiones)를
썼다. 후에 교부 Lactantius, Ambrosius는 신학논문의 제목에 이 말을 사용한다. 심지어 Bernard of Clairvaux도 사용, Cassianus의 경우 인스티투티오라는 제목이 신앙 생활의 규율과 구체적인 계율, 그리고 개인의 후년을 가르킨다. (필립, 28) 따라서 법학도였던 칼빈은 이 용어를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핵심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안내서이다.
Erasmus(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 1516), Bude 는 이상적 군주를 양육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인스티투티오의 개념은 그런 인물을 키워낼 교육과 훈련을 가리켰다. 이 사실에서 칼빈도 이 말의 사용을 통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발전하도록 돕는 교육과 훈련하는 암시가 있다고 본다(필, 29). 이것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칼빈이 당시 프란시스 왕에게 강요를 헌사한 점에서 나타난다. 루터(LC의 서문, 1529)나 멜랑히톤(Theologica institutio in Epistolam Pauli ad Romanus, 1519)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강요의 목적

 칼빈은 “It has been my purpose in this labor to prepare and instruct candidates in sacred theology for the reading of the divine Word, in order that they may be able both to have easy access to it and to advance in it without stumbling. For I believe I have so embraced the sum of religion in all its parts. and have arranged it, it will not be difficult for him to determine what he ought especially to seek in Scripture, and to what end he ought to relate its contents. If, after this road has, as it were, been paved, I shall publish any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I shall always condense them, because I shall have no need to undertake long doctrinal discussions, and to digress into commonplaces. In this way the godly reader will be spared great annoyance and boredom, provided the approach Scripture armed with a knowledge of the present work, as a necessary tool. (Inst. Geneva, 1559)

결국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돕는 훈련 지침서이다.
칼빈의 실천적 모습을 본다.


기독교강요의 사상적 배경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여러 사상들에 대한 연구

기독교강요의 사상적배경

 

첫째, Sola Scriptura 다른 어떤 개혁가 보다도 구약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해석에도 나타난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관에 있어서 쯔빙글리에 영향을 받은 것.

둘째,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초기 교회 공의회들 그리고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들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스티우스(Themistius), 키케로 뿐만 아니라 존 크리소스톰, 오리겐(Origen), 어거스틴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초기에 칼빈은 그리이스 교부들 중에서 크리소스톰을 특히 선호한 것처럼 보이며, 점차 어거스틴의 영향이 증대하였다. 특히, 교리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에게서 인용하였다. 신의 도성(De Clementia에서 이미 영향받음), 자유의지와 성례전, 은혜론과 예정론에 영향을 받음,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고 칼빈은 1559년 판에 말한다. 구속의 주요한 요점들을 간략하고 분명하게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스콜라 신학자들의 영향 롬바르트, 아퀴나스, 던스 스코투스, 오캄, Nomina post res (유명론-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서, 보편은 "물 뒤에 있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 universalia의 실재성 부정하고 개체강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중세의 일부 사상에 보다 밀접해 있다.(어떤 신학자는 그 근거를 로마법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한다.)

네째, 인문주의자들과 개혁가들에게 영향. 칼빈이 영향받은 인문주의자들로는 발라(Valla), 에라스무스(Erasmus), 부데(Bude)등이 있으며, 이들은 칼빈의 해석학에 많은 영향을 주엇다.
Cf. Myung Jun Ahn, "The Influences on Calvn's Hermeneutical Development of His Method," Hervormde Teologiese Studes, 55, 1999.

그들과 칼빈의 차이점

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받음 루터- 1536판 강요는 루터 소요리문답에서 영향을 받음, 기독교교리를 일치, 차이점은 공재설, 성경의 정경성, 예정, 교회, 기독론
멜랑톤- 기독론, 반대- 자유의지와 예정교리는 반대
부처- 1538-41사이 영향을 스트라스부그에서 실제적, 윤리적 관점에 대한 0
영향을 받음, 구원과 예정, 하나님의 나라개념, 경건의 강조,

칼빈이 기독교와 강요와 후기 개혁신학의 특징의 차이점을 비교
삼위일체 loci method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하나님의 주권강조 윤리과 경건강조 딱딱한 교리적 신학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원론 현실 역사의 실재성강조 . . . . . . . .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신학적 특징들

강요의 구조를 이해를 위하여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 중에 하나로서 강요는 1536년 6 장으로 시작되었으나 1559년에는 80 장으로 개정되고 증보되었다. 최종판의 영어 판은 1561년 번역되었다. 칼빈을 이해하려면 강요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강요는 그의 문학적 성격을 비롯한, 그의 신학의 심오한 깊이와 논리 그리고 명료하고 간결한 형태로 작성되었다. 이런 명료성과 간결성은 그의 로마서 강해(1640)를 시작으로 그의 성경을 다룬 모든 작품에서 그의 신학적 해석학의 근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본인 논문 Brevitas et Facilitas: A Study of A Vital Aspect in the Theological Hermeneutics of John Calvin (UP, 1997), Cf. 칼빈의 성경 해석학(1997).

초판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구성되었다고 본다. 이런 구성에 대하여 웬델과 스파이제커, 멕닐은 강요가 루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초판은 요리문답서의 틀을 취하였다.
율법, 믿음. 기도에 관한 처음 3 장들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1529)과 대요리 문답에 근거하였으며, 4 장 성례와 5 장 거짓 성례는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에서 본 뜻 것이며, 6 장은 인간의 자유에 관한 루터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본다.(Jeremiah J. Smith, CE)

칼빈의 강요에 대한 이해는 최종판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신학적 구조에 대한 칼빈의 만족은 그의 최종판에서 나타난다.
Ioannes Calvinus Lectori
"nunquam tamen mihi satisfeci, donec in hunc ordinem qui nume proponitur digestum fuit."(yet I never satisfied myself, till it was arranged in the order in which it is now published) 한국어 번역에 있어서 “설명된“ 이란 말은 출판된 으로 고쳐야 한다.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1536년 판의 내용들

    초판은 1536년 3월에 바젤(Basel)의 출판업자 토마스 플래터(Thomas Platter)와 발사스 라시우스(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 되었다.  저자는 칼빈 자신의 이름 그대로 하지 않았으며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Martia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중세 말시의 문답식 문헌의 관례에 따라서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십계명(1장), 사도신경(2장), 주기도문(3장), 성례(4장)의 순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여기에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논박을 추가하고(4장 끝부분), 소위 다섯 가지 하는 “거짓 성례”를 부정했다(5장). 마지막 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1. 1장: 율법에 관하여.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 3.4.5.10계명은 적용하거나 실례를 들어서 더 충분히 논의하고, 나머지 계명들은 간략하게 의역하고 있다. 결론부 에서는 율법의 효과와 칭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2. 2장: 믿음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는 주로 빠졌는데, 믿음의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논문, 사도신경의 해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에 관한 부분으로 짜여졌다.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재세례파와 반(反)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강한 대비가 장 전체에 걸쳐 있다.
3. 3장: 기도에 관하여. 이 장은 마틴 부쳐(Martin Bucer)의 <복음서 주석, 1530>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의 대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수다한 인간 중재자 사이의 대조이다. 전반적으로 카톨릭 예배의 허구와 복음주의 예배의 순수성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대조 점들이 다루어졌다.
4. 4장: 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세 단락은 1559년 판의 성례장의 순서(4. 14-18)와 대개 일치한다. 먼저 성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결론부로서 두 가지 주(主)의 성례의 집행을 짤막하게 논의한다. 성례 전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견해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례를 믿음의 증서에 찍힌 “봉인들”이라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박약한 이해력을 고려하셔서 조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하나의 성례전으로서 영적으로 말하면 육체적 결혼에 대하여 the exegetical principle of accommodation을 사용한다.
세례에 관해서는 재세례파와 도나투스파적인 주장 및 카톨릭의 견해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상징이며 표식”이라고 하는 쯔빙글리식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성찬에 관한 논의에서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성찬에 대해 그 때까지 있었던 무수한 논점들을 섭렵하여 나름대로 소화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는, 미해결의 문제들을 오랫동안 토론해 온 것처럼 곧바로 논쟁에 들어간다. 셋째로, 칼빈은 다양한 분파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더 충분한 신학적 논쟁을 앞질러간다.
 성찬에 대한 기존의 두 이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례의 존엄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면 미신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성례의 가치와 유익을 냉랭하고 시시하게 다루면 성례를 경멸하게 된다. 칼빈이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야기 시킨 주  원인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의문을 품은 데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가?”라고 의문했어야 했다. 그는 미사숭배를 거부하며,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나 카톨릭식의 고행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쯔빙글리의 합리적인 축소론(the rationalistic reductionosm)에는 반대하지만, 실제적 현현과는 달리 영화롭게된 몸의 축약이라는 의견에는 찬성한다. 칼빈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무한한 심연을 기이하게 연결한 이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를 “마치” 육체적 현현인 것 “처럼” 받아들인다. 성례는 단순히 믿음과는 별개인 표적도 아니며, 성례 자체가 믿음의 역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성례는 협력한다. 이러한 논거는 칼빈 당대나 이전의 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근저에는 신학과 기독론상의 상이점이 내포되어 있다. 칼빈은 신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신학적 견해나 예배의 관례를 거부하는 강한 목회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올바른 성례의 집행에 관해 논의한다. 성례 신학과 관례상의 정오(正誤)를 갈기는 시금석은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5 장 6 장은 변증적이다.
5. 5장: 다섯 거짓 성례에 관하여.
(Sacramenta non esse quinque reliqua quae pro sacramentis hactenus vulgo habita sunt declaratur, tum qualia sint ostenditur) (It is demonstrated that the five remaining ones, until now commonly considered sacraments, are not sacraments: Then it is shown of what sort they are)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도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물론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론과 의식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시헹 중인 각 “성사”의 전거를 조사한 후, 그것의 실제 내력과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준다. 견진례와 종부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논의하고,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는 길게 다룬다. 이 장과 6장의 중간부인 교회의 권능 편에서 칼빈은 중세 교회체계의 토대를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논파한다.  
6. 6장: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 권능, 그리고 정치적 조직(세속정부)
       제6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는 복음에 입각하여 형성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이것은 1634년의 벽보비난사건 의대답이 되었다.



개정판들의 구성과 특징

웬델의 칼빈과 배틀즈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 분석, 파커의 칼빈 신학 입문을 중심으로,

 제 2판 (1539년 말, 스트라스부르그)
형식도 요리문답에서 벗어나 칼빈의 판단에 따른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전개.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1 장은 하나님의 지식, 2장은 인간의 지식, 3장은 율법, 4장은 믿음(사도신경), 5장은 회개, 6장은 믿음에 대한 의인(義認), 7장은 구약과 신약, 8장은 예정, 9장은 기도, 10장은 성례, 11장은 세례, 12장은 주의 만찬, 13장은 기독인의 자유, 14장은 교회의 권위(Ecclesiastical Power), 15장은 시민의 정부, 16장은 5가지의 거짓된 성례, 17장은 기독인의 삶)
         그 특징들은 재 세례파,
 카롤리와 논쟁의 결과와 세르베투스의 저서에 대한 문제로 삼위일체론 상세히 보완한다.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얻은 결론들을 많이 수록해 놓고 있다.  이중예정론도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과의 논쟁과 부처(Bucer)의 영향을 통해 2판에 추가된 것이다. 배틀즈에 따르면(15) 어거스틴에 대한 자료가 상당량 보강된다.  이를 통해, 초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칼빈의 기독교적 인류학과 교회론에 대한 연구가 어거스틴에게서 상당히 힘입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2판에서는 교부 존 크리소스톰의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처의 Metaphrases(1536)의 영향이 나타난다.
1542년 7월 1일 파리 의회는 라틴어판과 프랑스판 강요가 이단으로 발매 금지령.

   제 3판 (1543년, 제네바)
         역시 라틴어로 출판되었으며, 1545년에 불어로 번역되었다.  제2판보다 4장이 증보되어 총 21장이 되었다.  증보된 장들의 내용은 맹세, 인간의 전승(전통과 유전), 교회의 권한, 교회 조직에 관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 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그 훈련에 대한 칼빈 신앙의 성장을 보여준다.

 제 4판 (1550년, 제네바)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1년 후 불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장(章)의 수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종전과는 달리 각 장들이 몇 단락으로 세분되어 독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 판은 여러 판을 거듭하며 출판되었는데,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그리고 성자 숭배, 형상 숭배에 관한 것을 논박하고, 인간 양심을 해설한 것이 증보 되었다.

      최종판 (1559년, 제네바)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1559년 제네바의 로베르 에띠엔(Robert Etienne) 출판사를 통해 나왔으며, 다른 해에 불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전체4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제1권은 신론으로 모두 18장이며, 제2권은 기독론으로 총 17장이고, 제3권은 성령론으로 25장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제4권은 교회론인데  20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보면 총 80장이다.
    필립 홀트롭, 30.
      기존 판들은 제 1권 1, 2 장을 개별 주제(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에 할애하지만, 1559년 판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동질성에 초점으 fen고,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섭리와 예정은 따로 때어 다룬다.
제 2권에서는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관련한다(7장). 인간의 참된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감사의 심정으로 율법 준수 강조(6, 7장)
성령에 관한 논의가 확대되었다.
기도는(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19)와 예정 교리(21-24) 자리 잡았다.
위로와 확신를 주시는 성령의 적극적 사역을 다룬 후에 예정교리를 다룬다. 이것은 개혁주의 정통신학 또는 스콜라 신학이 예정을 다루는 위치와 아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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