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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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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노영상
Subject   칼빈의 성화론 노영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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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화론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노영상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1. 칼빈 신학에서의 성화론의 위치


 1) 성화의 정의
  ‘성화’(sanctification)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거룩하게 만들거나 거룩하게 되는 것’, 또는 ‘신의 은혜에 의하여 칭의를 입은 사람이 성령을 받아 거룩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우리의 행동과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루이스 뻘콥은 성화를 정의하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하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갱신하고, 그로 하여금 선행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성령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성화는 일반 세속의 도덕적 발달과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레위기 11:45과 베드로전서 1:15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른 거룩함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 6:11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언급한다. 그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믿음에 따른 칭의 순간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인 구원의 날에 완료되는 것이다(엡 4:30 참조).
  칼빈은 성화를 종종 회개와 중생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는바(Ⅲ.14.19), 그는 중생으로서의 성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하게 하시며, 그들을 성전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을 아는 것이다.”(Ⅲ.3.9). “성령께서 그의 거룩하심을 우리의 영혼 속에 불어 넣으사 그의 거룩하심 속에서 푹 젖어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갖도록 하셔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상태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Ⅲ.3.8)

 

 2) 칼빈의 구원론에서의 ‘성화’의 위치
  칼빈의 주저인 「기독교강요」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신론(창조), 제2권 기독론(속죄), 제3권 성령론(구원), 제4권 교회론(구원을 적용시키는 수단들)이다. 이상에서 제3권은 은혜의 인간 내적(interior) 사역이라면, 4권은 은혜의 외적(exterior) 사역이라고 할 있다. 칼빈은 위와 같이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따른 구원의 사역, 성령을 통한 구원의 적용 문제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칼빈의 구원론의 전체 구조 속에서 그의 성화론을 살피는 것이 요긴할 것이라 본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전체를 통해 기독교의 구원의 과정을 면밀히 서술하고 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은 영원한 선택(Ⅲ.2-24)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셨다(Ⅱ.6-19).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보내심을 받은 성령(Ⅲ.1)께서 구원의 효력을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 적용시킨다. 즉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믿음을 주시며(Ⅲ.2),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전향하시고 옛 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게 해 주시며 거듭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Ⅲ.3-10). 그리고 죄를 사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시어 의롭게 해주신다(Ⅲ.11-13).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신다(Ⅲ, 14-19).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원의 놀라운 은혜와 영적인 유익들을 효과적으로 얻도록 기도하게 하시며(Ⅲ.20), 목회자들(pastor et doctor)의 복음 사역과 성례전 사역(성만찬과 세례)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은혜의 확증을 주신다(Ⅳ.1-17).”
  칼빈의 「기독교강요」 중엔 성화론이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제3권의 구원론 부분에 성화에 대한 설명이 산재하여 있다. 특히 제3권 중 3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중생: 회개, 7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부정, 8장 십자가를 지는 것, 14장 칭의의 지속적 발전, 15-19장 선행론 등의 내용에서 우리는 성화론의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간추릴 수 있다.
  성령론을 설명하는 「기독교강요」제3권의 내용은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장: 성령, 그리스도와의 연합
2장: 믿음(신앙은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에 따른 것임.)
3, 4, 5장: 회개론(중생론)
6-10장: 그리스도인의 삶
11-13장: 칭의론(1-10장에도 칭의의 내용이 설명되는 부분들이 있다.)
14-19장: 칭의의 시작과 그 이후의 과정, 선행,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 부분이 본격적인 성화론이다.)
20장: 기도
21-24장: 예정, 선택
25장: 부활


2.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에 따른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론 비교


 1) ‘구원의 순서’란
  구원의 순서란 용어는 루터파 신학자 카르포프(Jacob Carpov)가 1737년에 처음 사용하였다. 구원의 순서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루신 객관적 구원의 사역이, 주관적으로 개인들의 마음과 생활에 실현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움직임을 그 논리적 순서로, 또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머레이(John Murray)는 주장하기를 구원의 순서를 성경으로부터 명확하게 추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구원의 다양한 과정이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을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성경의 근거, 로마서 8:30(정하심-부르심-의롭다하심-영화롭게 하심)로서, 이에 의거 그는 다음과 같이 구원의 순서를 정하였다: 부르심-중생-믿음-회개-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 그러나 벌카우어(G. C. Berkouwer)는 위와 정반대 입장을 견지한다. 성경에서 고정된 구원의 순서를 추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롬 8:30이 구원의 순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는 말보다 구원의 여정(way of salvation)이란 말을 선호한다. 일례로 “믿음이라는 것도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걸쳐 널리 편만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2) 칼빈과 웨슬리가 언급한 구원의 순서
구원의 순서칼빈예정(선택)-유효한 부르심(소명)-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믿음-중생(성화)-회개(죽임과 살림)-기독교적 삶(의 스타일): 자기부정, 십자가를 짊, 내세에 대한 묵상-칭의-선행(성화)-견인-영화   * 믿음+회개=회심(conversion)웨슬리선행은혜(보편은혜에 의해 원죄 사함)-회개(구원의 현관)-믿음-칭의(구원의 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자범죄 사함, 객관적 사건)-중생(초기의 성화)-성화(구원의 집, 성령의 내주에 의해 타락한 본성 새롭게 함, 주관적 사건/점진적 성화-완전한 성화)-[사회적 성화-우주적 성화]-영화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영광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론은 예정론에서 시작한다. 그의 구원의 순서는 예정개념에서 논리적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를 점진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모든 순서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인 분석이기보다는 논리적인 분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생과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에 비해 웨슬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주권적 구원론을 전개하기보다는, 인간 편에서의 응답으로서의 시간적 구원의 순서를 전개하였다. 칼빈은 고린도 후서 7:10을 주석하면서, 믿음과 회개와 칭의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보면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칼빈도 암시적으로 구원의 순서를 말하고 있다. 칼빈은 구원의 시작을 유효한 부르심(effective calling)으로 본 반면, 웨슬리는 선행은혜(prevenient grace)를 구원의 시작으로 본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을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일방적인 은혜의 역사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수여하시고, 또 믿음을 주셔서 회개케 하시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한다는 순서로 구원과정을 서술한다. 반면 웨슬리는 선행은혜로 죄인이 하나님께 방향전환의 회개를 한 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얻어 의롭다함을 받고, 내적 변화로서의 중생과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하였다.
  “칼빈이 중생의 교리를 의인 교리 앞에 둔 것은 로마 교회의 신학의 이론에 대하여 처음부터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중생 곧 성화를 먼저 다루고 칭의를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선행을 간과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며, 칭의만을 강조하고 선행을 무시한다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에 맞서, 칭의 앞에 먼저 성화를 다루었던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이중은혜를 받는다. 첫 번째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비로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하고 촉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값없이 의를 얻는 그 믿음은, 회개를 실행하는 데 기울이는 노력을 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Ⅲ.3.1). 칼빈도 일방적으로 칭의(justification)만을 강조하고 성화(sanctification)를 간과한 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가 제시한 구원의 순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지적할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믿음과 회개의 순서이다. 칼빈은 믿음을 회개의 앞에 두었으나, 웨슬리는 믿음을 회개 뒤에 위치시켰다. 웨슬리는 복음을 믿기 전에 회개의 과정이 필요함을 언급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끊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하는 것이 믿음에 대한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 곧 믿음에 이르기 전,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준비라는 생각을 일체 버릴 것을 말하였다(Ⅲ.3.27). 물론 회개라는 것은 일종의 죄에 대한 인식이므로 그것이 하나의 공적이 되는 것은 아니나, 칼빈은 그럼에도 죄를 깨닫는 것을 위해 먼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은 회개의 공적화 가능성을 애초부터 철저히 차단하려 한 것이다.
 
 3)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론에 대한 비교

  칼빈 성화론의 특징들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칼빈은 죄가 용서받았지만, 그럼에도 죄가 인간에 내재하므로, 이러한 내재하는 죄의 영속성 때문에 점진적 성화의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죄의 영속성을 마음의 부패, 악한 경향성, 육적인 본성이란 용어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오염된 마음이 무질서하고 죄악 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고 말한다(Ⅲ.3.12). (2) 그는 완전주의를 배격한다. 칼빈에게 있어 성화는 무엇보다 쉬지 않고 충동하는 육적 욕망을 부단히 소멸하는 것이었다. 또한 적극적으로는 영의 소생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있어 칼빈은 완전을 향한 진보의 의무를 촉구하였지만, 완전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로 나가지는 않았다. 이에 있어 재세례파는 성화의 점진적 필요성을 배격하였는바, 칼빈은 이와 같은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없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비판하였다(Ⅲ.3.14). (3) 칼빈은 완전주의를 추구하는 분파적 경향을 비판하였다. 인간이나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다 하여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순수한 봉사와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이 두 가지의 징표가 교회 가운데 확립되어 있다면, 비록 악덕이 다른 면에서 솟아 나오고 있더라도 결코 교회공동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Ⅳ.1.12). (4) 칼빈은 계속적 회개로서의 성화를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문하는 회개와, 입문한 후의 계속 성장하는 회개를 명백히 구분하지 않았다(Ⅲ.3.20). 또한 회개를 중생과 같이 일평생 지속하는 과정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내재하는 죄의 항구적 활동성을 강조한다. 효과적인 회개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한다. 인간의 의지력과 인간의 능동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칼빈의 성화론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사상과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지배한다. 회개의 결과가 신앙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부여된 신앙의 결과가 회개라고 그는 말한다. 칼빈은 인생 중에서의 계속적 회개를 강조하였으며, 루터와 같이 신앙인이라도 본질상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그는 성화의 실재(reality)적 완전은 부인하면서도 완전을 향한 진보의 가능성(possibility)은 인정하였다.
  웨슬리의 구원과 성화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1) 하나님의 선행은혜가 인간의 자연적 양심을 깨우고 그의 의지를 강화한다. (2) 하나님의 확신시키는 은혜가 칭의에 앞서 회개를 일으킨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객관적으로는 칭의로, 주관적으로는 중생으로 체험된다. (4)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로 인도되며, 그 목적은 기독교적 완전(perfection)에 도달하는 데 있다. 이에 있어 웨슬리의 구원론과 성화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말하는 선행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웨슬리는 가톨릭의 신학과 루터나 칼빈의 개신교신학을 종합하였다고 평가되는바, 이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렇다. 전적 타락한 인간을 가톨릭이 말하는 자연인 정도의 수준이 되게 하는 은혜이다. 이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은혜로서 보편은혜(universal grace) 또는 예비적 은혜(preparatory grace)라고도 불려진다. 구원의 은혜는 아니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은혜이다. 전적 타락한 인간은 이 은혜를 받아 그 안에 있는 원죄가 제거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죄와 구원의 필요함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웨슬리는 자연인의 이성과 양심을 선행은혜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깨닫게 하는 은혜(convincing grace)라고도 불려진다. 이 은혜를 통해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은 후에도 자범죄 및 유전적 부패성은 그대로 남게 된다. 웨슬리는 은혜를 선행은혜와 칭의를 가져오는 칭의의 은혜(justifying grace), 성화를 가져오는 성화의 은혜(sanctifying grace)로 구분한 바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가톨릭과 다르게, 이 선행은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른 것으로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은혜는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필요불가결한 도구이기는 하나, 진리의 내용은 제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깨우치기 위해서는 자연인의 이성에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선행은혜는 은혜의 보편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보편구원론과는 구별된다.
  칼빈의 성화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 중심, 실천적이고 전투적이며, 일평생 지속적인 성화론이라는 데에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행동주의적 성화론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선행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웨슬리의 성화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잘 조화된 역동적인 성화론이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상승적 성화론이다. 칼빈은 성화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대하여”(On the God's Vineyard)에서 가톨릭은 성화를 강조한 나머지 칭의에 무관심하였으며, 루터는 칭의를 강조한 반면 성화에는 무관심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은혜의 윤리와 가톨릭의 성결의 윤리의 필요한 종합"(a necessary synthesis of the protestant of grace with the catholic of holiness sanctification)을 이루면서 창의적 종합을 추구하였다. 이에 반해 루터는 칭의 속에 성화를 포함시켰다. 루터는 전가(imputation)된 것으로서의 성화를  강조하였으나, 웨슬리는 전가된 성화와 동시 참여(impartation)로서의 성화를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우리 밖(extra nos)에서 임하시는 객관적 은혜만을 강조하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전통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in nobis) 주관적 은혜로 체험되는 거듭남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정적 체험을 객관적 은혜보다 더욱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의 한계를 웨슬리는 극복하였다. 웨슬리는 전가된 의뿐 아니라, 본성적인 의까지도 강조한다.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화를 칭의와 분리하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하면, 의식주의(ceremonialism)와 도덕폐기론의 위험이 빠질 수 있으며,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의 근거로 삼고자 할 때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블러쉬(Donald G. Bloesch)는 지적한바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구원의 기초나 근거는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에서의 하나의 구성적 요소이다. 이에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의 신정통주의자들은 신앙의 행위를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 또는 열매로 간주함으로써 이 둘을 결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칭의가 없는 성화가 불가능한 것 같이, 성화가 없는 칭의 또한 생각할 수 없다. 이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과 은혜를 손상함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성화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해 고심하였다. 칼빈과 웨슬리 또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하였는바,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전략을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인 것이다.  

 

3. 그리스도와 연합(the communion with Christ)과 칼빈의 성화론


 1) 그리스도와 연합과 칼빈의 구원론
  칼빈 신학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union with Christ)과 ‘성화’(sanctification)가 그의 전 신학구조 및 구원론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더브리스(Dawn DeVries)는 실로 칼빈의 전 구원론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에 근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 됨은 말씀에 의해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며, 성령의 사역을 통해 믿음에 의해 포착되어지는 것이다. 칼빈의 전 신학적 구조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조망된다. 칭의론, 성화론, 예정론, 신앙론, 기독교인의 영성 이해, 성례론을 위해 그리스도와 연합 및 그리스도 안에 참된 참여(a true participation in Christ)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Ⅲ.1.1/ Ⅳ.17.11). 중생, 소명, 회심, 회개, 칭의, 성화가 성령의 현실성에 관련되어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진다(Ⅲ.11.2/ Ⅲ.11.10). 신앙도 지적인 시인(acknowledgment)만이 아닌 것으로, 연합이라는 경험적 측면 갖는다(Ⅲ.11.7). 밀너(Benjamin C. Milner, Jr.)는 이르기를 신앙과 칭의가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행동보다 순서상으로 뒤에 오는 것이, 이러한 하나 됨으로서의 성화가 구원의 기초를 이루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과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한 양상으로 표명될 수 있다. 칼빈은 신앙이 성령의 주된 사역임을 언급한다(Ⅲ.1.4). 또한 우리는 그의 몸에 참여함을 통하여 이중은혜(a double grace) 곧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를 받게 된다(Ⅲ.11.1). 칼빈은 또한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가 그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서 회복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칼빈은 예정론도 기독론과 성령론을 근거하여 해석한다. 그는 예정론을 신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Ⅰ.15.8). 그는 예정의 근거를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것이다(Ⅲ.22.3). 시간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이다(Ⅲ.22.3).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구원의 예정은 확실한 것이 된다. 바르트는 그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된 예정에 우리가 참여함을 강조함으로 예정론의 숙명론적 성격을 제거하였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칼빈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르트도 예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숙명의 문제를 기독론적으로 해결하였던 것이다.
  루터의 칭의론도 단순히 외부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법정적 또는 수동적인 의의 개념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루터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란 개념을 통해 칭의론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화(theosis, deification)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우리는 루터의 이러한 입장을 그의 용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왕국,’ ‘신비적 연합,’ ‘황홀경,’ ‘신비적 그리스도’ 등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루터는 가톨릭의 공적주의와 함께 하나님과의 본질혼합(a mixture of substances)을 강조하는 열광주의 양자를 다 반대하였다. 하지만 루터와 칼빈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루터는 ‘신비적 체험’ 강조하였던 반면, 칼빈은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였다(Ⅲ.11.10). 이상의 언급들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연합’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주요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있어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신비주의와 관계없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칼빈은 신비주의의 입장을 갖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신학과 오시안더(Osiander)의 신학을 신랄히 비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Ⅰ.14.4/ Ⅲ.11). 칼빈은 신비주의의 존재론적 측면 특히 하나님 안으로의 존재론적 몰입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한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근대에서는, 신비주의나 성서의 기적 등을 이성에 반한 것으로 판단함에 따라, 칼빈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개념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을 축소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복합적이다. 그는 특히 클라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의 신비주의에 대한 친화력을 보여준다. 또한 플라톤적 신비주의에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칼빈은 그의 생애 중 신비주의의 입장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과 깊은 관계를 맺었음이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우리는 근대적 경건 및 중세 신비주의의 그에 대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칼빈은 신비주의는 특히 클라보의 베르나르와 장 제르송(Jean Gerson)에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장 제르송은 16세기 프랑스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관상의 산」(The Mountain of Contemplation)이란 책을 저술한 바 있었다.
  성화를 의인으로 해소시킬 때 우리는 칭의일원론에 삐질 우려가 있는바, 신비주의, 열광주의, 타계주의, 값싼 은혜, 신앙지상주의 은혜론, 폐쇄적 교회관에 따른 윤리의 부재, 선행의 약화 등을 모면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칭의에 비해 성화만을 강조하거나 칭의를 성화 안에서 해소시키는 성화일원론은 율법주의, 공적주의, 무분별한 행동주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의 약화 등의 위험이 있다.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을 통해서 얻은 의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의 면전에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Ⅲ.11.2). 말씀과 영을 통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2) 성령의 매개적 사역과 칼빈의 성화론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하였다. 성경의 기자들에 영감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며, 성경의 독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분도 성령이고, 성례를 통해 은혜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다.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매개 작용을 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Ⅲ.1.1).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이 없인 그리스도가 우리밖에 머무른다(Ⅲ.1.1). 칼빈은 성령을 하나님의 존재의 역동성을 매개하는 영이라고 정의한다(Ⅲ.13.19). 성령은 단순히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뿐 아니라 그 분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Ⅳ.17.10). 성령의 능력과 효율성이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pro nobis) 사건’을 ‘우리 안에(in nobis) 거하는 사건’이 되게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실제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맺어 주는 끈이다(Ⅲ.1.1).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의인과 성화의 은혜의 삶을 수여한다. 우리의 외부에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Christ extra nos)(Ⅲ.1.1)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이 된다. 성령을 통해 그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와 영적 유익함을 나누게 되며,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주관적인 사건으로 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 곧 참여(participation)가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그간 잘 인정되지 않았었다. 신학자 리츨(Albrecht Ritschl)은 신비주의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양립할 수 없다고 하였었다. 하지만 텀블레로(Dennis E. Tamburello)는 그의 책 「그리스도와 연합」(Union with Christ)에서 클라보의 베르나르와 칼빈을 ‘신비적 연합’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종래의 칼빈과 신비주의 사이의 부정적 관계를 논박한다. 그는 칼빈의 입장을 광의의 신비주의 속에 포함시킨다. 협의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하나 됨을 추구하는 반면, 광의의 신비주의는 성령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비주의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신비주의는 궁극적인 존재와의 직접적 합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바의 그리스도와 연합은 머리와 지체의 결합이다. 우리 마음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체험적이며 신비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연합을 하나님과 인간 본질(substance)의 존재론적 혼합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경건한 인간 본질의 신적 존재로의 몰입 내지 합일이라는 중세 신비주의와 칼빈의 신학은 같지 않다. 성령을 통한 합일이지 직접적인 합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의 신비주의는 개인의 체험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동시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교회론적이며, 성례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3) 칼빈이 언급한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한 반성
  스미디즈(Lewis Smedes)는 칼빈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을 신비적인 면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믿음 안에서의 인격적 만남(a personal encounter in faith)으로 해석한다. 신앙이란 연합의 경험으로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개방성(a personal openness)이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서 순종의 행위를 수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응답하는 우리의 의지와 마음의 행위인 것이다. 스미디즈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나의 행동으로 해석하지 일종의 존재적인 연합으로 보지 않는다. 이에 있어 파커는 그와 같은 스미디즈의 입장과 다르게, 신앙을 행동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일종의 시인으로 생각하였다. 행동으로 보게 되면, 그 행동이 하나의 공적으로 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커(T. H. L. Parker)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직접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간접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신앙을 하나의 행위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것에 대한 시인(acknowledgment)으로 생각하였다. 아무튼 스미디즈와 파커의 입장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을 본질적인 연합으로 보기보다는, 거리를 둔 간접적인 것으로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전가된 의에 의한 칭의이지, 가톨릭과 같은 본질혼합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둘은 모두 범신론(pantheism)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의이지, 우리의 본질에서 나오는 의가 아님을 그들은 강조한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칼빈의 이중은혜를 단 하나의 은혜인 칭의로만 감축하는 결과를 낳을 위험을 갖게 된다. 스미디즈와 파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의 존재 내에 내재하는 신을 말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를 위시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나치게 하나님을 내재화한 나머지, 범신론의 위험을 갖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성과 교회의 아이덴티티에 손상을 주게 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자의식(self-consciousness) 속의 실재로 파악함으로, 일종의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연합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을 매개로 한 연합을 강조하였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신비주의와 같은, 본질혼합이 아니라 연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의화나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의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시안더는 십자가와 성육신을 무시한 일종의 가현설적인 하나 됨을 주장하였다. 의인과 성화는 서로 구별되나, 분리(separation)되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의 은혜로서의 의인과 성화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Ⅲ.11.6).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의 현실이요 그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구별(difference)되어야 한다(Ⅲ.16.1). 오시안더와 같이 두 은혜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의인 이상의 어떤 것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그의 신성에 대한 연합임과 동시 그의 인성에 대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의 성육신과 고난에 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시안더가 주장하는 주입된 본질(essentia infusa)과는 다르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일종의 의화사상이다. 오히려 칼빈은 성령의 사역에 근거한 영적 연합을 강조한다(Ⅲ.11.5). 칼빈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하면서, 의가 주입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의에 참여(impartation)하고 있는 신자의 위치를 말한 것이다. 칼빈은 스콜라 신학자들의 은혜 주입설을 반대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주께서 본질혼합이 아니라 인격의 연합에 의해서(non confusion substantio sed unitate personae)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칼빈은 본질혼합을 말하는 가톨릭과 오시안더에 반대함과 동시(Ⅲ.11.5-6), 성례전에서 신적인 은혜의 실재를 분리하려는 세르베투스(Servetus)와 재침례파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의 츠빙글리의 기념설처럼 칼빈은 신앙과 성령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례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입재를 결코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는 단순한 영적 임재(spiritual presence)가 아니며, 실재적 임재(real presence)여야 한다고 하였다(Ⅳ.17.29). 그리스도는 성만찬 시 육으로 임하시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삶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오늘의 세상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오늘의 세상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종말적 완성을 기다리며, 오늘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신화(theosis)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고대교회사에서 신화이론으로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레네우스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이론, 카파도기아의 교부들 신적인 삶에 참여 및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 등의 개념들이 이것을 나타낸다. 물론 이것은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말한다. 닛사의 그레고리 등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을 통한 신화를 더욱 강조였다. 그것은 영 그리스도론 및 성령론 중심의 동방교회의 구원론과 무관하지 않다. 루터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서의 속성교류를 강조하였다. 루터는 계속적 은혜(gratia)와 함께, 성령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서의 은사(donum)를 강조하였다. 물론 루터는 신화의 가능성은 인간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어진다고 하였다. 성화의 삶이 종말론적 유보와 성령론적 주도권에서 일탈될 때, 그것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칼빈의 신비적 연합은 종말론과 결합된다. 신앙의 순례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대로의 상태(status quo)를 승인하지 않는바, 현실을 개혁하는 자들이 된다. 성령을 통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이 역사를 이끄시는 분으로, 그러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정치와 사회적인 변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성령으로 연합’에서 성령을 강조하면, 성화가 제한된다. 그러나 연합을 강조하면 의인보다는 의화가 강조된다. 이에 칭의에 기반한 보다 적극적 성화에 대한 강조를 위해서는 양자 사이의 긴장이 중요하다. 물론 그것은 본질혼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 사이의 구분이 필요하다. 칼빈은 기독론에서의 속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 communication of properties)를 인정한다(Ⅳ.17.30). 그리스도와 인류 사이에 이루어지는 속성교류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교제가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본질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의 속성을 나누어주는 속성교류의 측면을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하였다(Ⅱ.12.2).
  감리교 신학에선 칼빈과 웨슬리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루터와 칼빈의 개신교신학은 의인(imputation of righteousness)을 강조하는 신학으로, 가톨릭의 신학은 의화(infusion of righteousness)를 강조하는 신학으로 해석된다. 루터와 칼빈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의로운 본질을 갖지 못한다고 하였다. 신자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용서받고 의로워졌으나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사상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엔 의로운 본질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개신교의 사상은 구원 후에도 우리가 죄인 된 상태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로 여길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구원 후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되어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빈은 수동적인 은혜론을 말하는 반면, 가톨릭은 적극적인 은혜론을 언급한다. 이에 있어 웨슬리는 의인의 사상에 기초하여 의화의 사상을 연결하고 있으며, 전가된 성화(imputed sanctification)사상에서 출발하여 참여된 성화(imparted sanctification)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일면의 측면을 부각한 것으로, 칼빈을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필자는 칼빈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그의 성화론에서 강조함을 최근의 신학적 견해들을 통해 피력함으로써, 칼빈의 성화론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 인간의 능동적 위치가 강조되고 있음을 보이려 하였다.  

 

 4) 바르트(Karl Barth)의 성화론과 칼빈의 성화론
  1960년대 이후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의 행동을 강조한 신학의 영향으로 성화의 주제가 신학에서 강조되게 되었다. 바르트의 신학은 로마 카톨리시즘, 프로테스탄트 현대주의 즉 합리주의, 역사주의, 낭만주의, 신비주의, 정통주의 등 널리 말해 신학적 인본주의라 부르는 일련의 신학사상을 극복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칭의와 성화론은 칼빈과 루터와 웨슬리의 신학들 중, 칼빈의 신학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001년 듀크대학(Duk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스텁스(David L. Stubbs)는 바르트 신학에서의 ‘그리스도와 연합’ 혹은 ‘그리스도에 참여(participation)’한다는 모티브가 바르트의 인식론과 구원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바르트의 이 같은 신학적인 전망은 칼빈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바르트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모티프를 중심하여 맴돌고 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성경과 신학 전통 및 당대의 관념론과의 대화에서 개념화하였다. 우리는 이 같은 바르트의 구원론을 '칸트적인 참여자적 구원론'(Kantian participationist soteriology)으로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개념을 그리스도의 본질의 주입으로나 일종의 범신론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화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성육신 사건과 같은 일종의 성례전적 사건이다. 바르트는 성화를 일종의 참여의 양상으로 본다. 먼저 인간이 인간의 본질적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우리의 현상적 삶에 모순이 된다. 이 참여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대해서는 모순된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사건 속에서 오늘 우리의 역사와는 상이한 역사가 우리의 현상적 영역에 충격을 준다. 바르트는 초월하신 분이 어떻게 성화의 과정에 현존할 수 있을까를 계속하여 질문한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참여(participation in Christ) 사상과 칸트의 인식론을 채용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humanity)의 연합의 양상을 교회와 신자의 성화적 현존과 연결한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 속에 있는 것 같이, 그리스도와 죄 된 우리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는 말한다.
  칭의와 성화 역시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관련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에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개인적이고 교회 내적 성화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역사 경륜에 입각한 세계 변혁적 성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이 이신칭의의 출처가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본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죄 된 인간과 세상을 관계하는 개념적 모델로서 ‘삼위일체적인 실천적 앎’(trinitarian practical knowing)을 제시하였다고, 스텁스는 설명한다.
보수주의의 초월주의자 신학자유주의의 내재주의자 신학1915-20 사이의 바르트의 신학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위로부터의 접근. 계시 강조아래로부터의 접근인간 밖에 계신 하나님: 인간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의와 대비함인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강조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강조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하나 됨을 강조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도르트 회의의 TULIP 교리와 연결)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이 약화됨이 문제인간의 타락과 죄성을 무시. 기독교가 도덕주의화 할 우려가 있다.

 

4. 그리스도와 연합의 관점에서 조망된 성도의 선행
 
  성화는 크게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로 구분된다. 개인적 마음의 부패가 제거되고 새롭게 되어 그들의 행동이 변하게 되는 개인적인 성화는, 일종의 윤리적 측면의 변화를 수반한다. 동시 기독교의 성화는 사회적인 성화를 병행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인간뿐 아니며, 인간의 거주하는 삶의 환경으로서의 사회와 자연만물의 변화가 성화에 포함된다. 필자는 다음 두 장에서 성화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서의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그리스도와 연합의 관점에서 서술하려 한다. 칼빈은 믿음을 가리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고 하였다(Ⅲ.2.7). 믿음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며, 마음의 지식 곧 실천의 지식이다. 신앙은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죄의 용서와 삶의 복은 윤리적 차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삶의 변화 및 이 세상에서의 윤리적 실천을 요구한다. 칼빈의 윤리의 세 구성요소인 선과 덕과 법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칼빈은 선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지복의 삶(the beatific life) 영적인 것임을 말하였다. 먼저 참된 행복은 세상적이며 감각적인 것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세상적 부요, 권력, 명예 등은 다 헛된 것이다. 행복 된 삶의 성취는 미래의 영원한 세계에서 된다. 오늘의 삶은 순례적 삶이다. 또한 행복 된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communion with Christ)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그들의 최고선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성취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행복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응답할 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에 있어 그 하나님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개인적 삶의 영역 및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 이 지복의 삶을 어떻게 알고 가질 수 있는가? 이 지복의 삶은 오직 계시와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 후 심각히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지복의 삶의 획득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음으로 칼빈은 이르기를, 인간의 선행이 마음의 생생한 근원에서 연원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함은 외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화목이 이루어지기까지 어떠한 마음도 옳지 않다. 결과적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어떤 행함도 선이 아니다. 인간이 변해야 선행이 나온다. 그는 인간의 변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정(선택)-유효한 부르심(소명)-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믿음-중생(성화)-회개(죽임과 살림)-기독교적 삶(의 스타일): 자기부정, 십자가를 짊, 내세에 대한 묵상-칭의-선행(성화)-견인-영화이다. 그는 기독교인의 선행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에서 야기되는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기독교인의 삶의 스타일(Christian life-style)을 변화하며, 마침내 선한 행동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경건(piety, pietas)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언급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동시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감사의 마음을 생기게 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은 자기부인, 십자가를 짊, 순례적 삶으로 구성된다(Ⅲ.7-9). 먼저 자기부인은 죽임(mortification)과 갱생(vivification)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의 죽임과 동시 이웃사랑을 위해 다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자기죽음을 통해 우리는 자기애와 교만을 극복하게 된다. 그것은 겸손과 타자에 대한 존경으로, 또한 공동선과 타자를 위한 사랑의 윤리로 이어진다(Ⅲ.7.5). 두 번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받는 고난의 훈련을 의미한다. 그것엔 훈련, 징계, 핍박의 세 요소가 있다. 훈련으로서의 십자가는 자랑의 마음을 제거해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지극히 약한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이다(Ⅲ.8.2). 고난은 우리에게 겸손 및 순종과 인내를 가르친다. 세 번째로 내세에 대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개혁에 눈뜨게 한다. 사람이 참으로 선해지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로 서있지 않으면 안 됨을 칼빈은 강조한다. 도덕적 삶의 불가결한 조건(sine qua non)인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이기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은 문제가 있다. 성도의 어떤 행위라도 그 본질적 가치에 의거하여 판단한다면 부끄러움 이외에 어떤 보상도 받을 가치가 없다(Ⅲ.14.9). 그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간구원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심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경건한 사람은 이기심을 가지고 단순히 자기의 유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살지 말고 자기의 주어진 기회에 따라, 또한 할 수만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칼빈의 자유론은 칭의론에 속한다. 그는 칭의를 통해 자유를 획득한다고 말한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으로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폐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자유의 실천을 통해 율법의 정신에 충실함을 말한다. 적어도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얻은 인간은 그들의 삶에서 성화를 향한 윤리적 실천을 추구하며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된다. 여기서 율법은 강요가 아니라 의롭게 인간을 위한 은혜의 다른 차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과 율법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나간다. 그는 율법의 문제를 성령론적으로 해석한다.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내면적으로 복종하게 한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율법을 내면적으로 복종하게 될 때, 성령은 율법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계시한다. 성령의 역사를 벗어나서 성경은 죽은 문자가 된다. 복음이 율법에 앞선다. 모든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없는 율법은 가치가 없으며, 어떠한 확실한 희망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Ⅲ.2.32). 율법은 거듭난 자의 영성이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도록 인도한다. 칼빈은 무규범주의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을 사랑하고 흠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Ⅱ.7.7.).
  칼빈은 율법주의와 무규범주의의 양극단을 다 경계한다. 루터는 율법을 복음과 대치(dialectic)되는 것으로 보고, 율법에서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칼빈도 우리가 율법의 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율법과 복음을 연속적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도 말씀하신 분이시다. 이런 각도에서 그는 루터와는 다르게 율법의 적극적인 효용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사용을 말한다: 제1사용 신학적 사용(usus theologicus) 즉 영적 사용(usus spiritualis)-죄의 고발. 제2사용 정치적 사용(usus legis politicus)-악인으로부터의 공동체 보호 유지하며 죄를 억지한다. 이러한 악인들이 벌이 무서워서 악을 행치 않게 된다. 율법의 제3사용(usus legis tertius)-선의 권면으로서의 사용이다(Ⅱ.7). 1, 2사용은 소극적인 율법의 기능이며, 3사용은 율법의 적극적인 사용을 말한다(Ⅱ.7.6-12). 이와 같이 특히 칼빈은 율법의 제3사용을 강조하였다. 이에 칼빈은 “제네바 훈령집”(Geneva Ordonnances) 등을 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그런 율법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직접적 요구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법을 아래와 구분한다.
  자연법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놓은 내면적인 법이다. 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이성과 양심의 파편이 있다. 자연을 통해 우리는 신인식 및 신의 법을 간여할 수 있는 가능성(possibility)은 있으나 실재성(reality)은 없다. 타락 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나중에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다. 자연법을 자기 안에서 들려주는 양심은, 인간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충분한 지시를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계시를 통해 우리의 양심이 새롭게 되어야, 자연법이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 그 자연법의 내용을 또렷이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실정법은 자연법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용된 것이다.
  요약하여 칼빈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기독교인의 선행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칭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확신, 용서의 체험,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하는 칼빈 신학의 역동성과 연관된다. 우리는 이러한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아들 됨의 자격을 얻는다. 이러함에 신자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스스럼없는 순종과 같다. 칼빈은 먼저 행복 된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자기죽음을 통해 그의 삶의 스타일이 변혁되어 새로운 도덕적 행위자로서 태어나게 됨을 언급하였다. 그는 율법의 문제를 성령론적으로 해석한다. 성령은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계시한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선(good)과 덕(virtue)과 법(law)으로 구성된 윤리의 전 체계가 성령의 역사에 따른 영성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재정위 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됨이 없는 바른 윤리생활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은 스콜라 신학의 일반적 주장처럼 인간의 영적 노력에 맞춰 그때그때마다 주입되는 하나의 은혜의 특질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의 역동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감사, 겸손, 종말론적 희망이 칼빈의 영성신학에 특징이다.
  칼빈은 기독교인이 양육되는 장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기독교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시고, 그 안에서 그들을 양육시키시는 장이다(Ⅳ.1.5). 둘째, 아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Ⅳ.1.5). 우리는 몸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연합할 필요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사람이 혼자서 경건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개인주의를 철저히 거부하였다. 셋째, 교회는 경건생활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삶의 훈련과 통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에 중요하다고 그는 말하였다. 특히 교회의 치리는 기독교적인 삶에 외적인 보조수단(external aid)(Ⅳ.1.1)이 된다. 인간의 윤리적인 삶은 이러한 교회공동체의 양육 없이는 불가능하다. 칼빈은 성화의 방편이 되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및 성례전 그리고 기타 극기 등의 훈련을 언급한다. 이러한 성화의 방편들은 모두 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것들로서, 성령을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방편들을 통해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성령은 교회를 성화의 장으로 만드신다.


5. 그리스도와 연합의 관점에서 조망된 개인적 성화와 세상의 성화


 1)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
   석동욱은 그의 논문에서, 성화의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먼저 성화론의 출발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 하나님에 대한 앎과 경건이 성화에 필수이다(Ⅰ.2.2). 다음으로 성화의 은혜로서의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화의 전제가 된다(「기독교강요」, 제2권). 다음으로 성령을 통한 실천적 성화가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서술된다. 제4권에선 교회와 성화, 곧 공동체적 생활, 교회의 권징, 성례전과 설교 등이 성화의 조건 등이 표명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국가통치와 성화의 문제를 다룬다. 개인과 교회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성화 및 성화를 돕는 체계로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은혜의 내적(interior) 사역과 외적(external) 사역에 대해 말한다. 그는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내적 사역을, 「기독교강요」제4권에선 외적 사역을 말한다. 내적 사역이란 믿음을 통해 개인의 내적인 마음의 부패를 제거하는 사역이며, 외적 사역이란 교회와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성화하실 뿐 아니라, 세상과 문화를 성화하시는 분이시다. 문화의 보존자 하나님은 인간의 영적, 문화적 삶이 죄로 인한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변혁하신다. 하나님의 비밀스런 자극(Arcano Dei Instinctu)을 통해 하나님은 사회와 세계를 이끌어 가신다.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지배되는 것과 같이, 성령께서 이루신 교회공동체와도 분리되어질 수 없음을 언급한다. 동시 이 같은 교회공동체에서의 삶은 인간공동체 속에서의 삶과 나뉘어 질 수 없다. 교회와 사회는 모두 하나님의 세우신 제도로서 인간의 거룩한 삶을 위해 중요한 것이다.
  칼빈은 그의 교회론과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통해 협소한 개인주의적 영성의 한계를 극복한다. 교회는 성령의 교통 하에서의 그리스도와 신자의 사랑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는 기독론과 성령론에 근거한 내향적인 교회론을 강조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체가 교회라는 것이다(Ⅳ.1). 그는 그의 교회론에서 성만찬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는 성례전을 사회윤리적인 측면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희생을 근거로 인간의 사회적 삶은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으며, 성만찬의 교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회중 간의 영적 친교는 장차 회복 되어야 할 사회의 정의로움과 평화 및 해방의 영성을 지향한다.
  개인의 삶의 환경이 거룩하지 못할 때, 그 개인은 바로 성화되기 어렵다. 구약성경은 인간의 성화뿐 아니라, 환경과 자연물의 다양한 성화를 언급한다. 안식일, 절기들을 구별하는 시간의 성화(창 2:3), 장소의 성화(출 15:13), 각종 기물들을 성별하는 사물의 성화(출 15:13), 제사장 등의 특정한 사람의 성화(출 29:1-36, 40: 12-15, 레 21:1-22:33) 등이다. 또한 신약성경은, 교회의 거룩하게 됨(벧전 3: 11-12, 엡 5:25-27, 고후 11:2, 계 21:9)과 세상의 성화에 및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화(고전 1:2, 고전 1:30, 6:11) 등에 대해서 언급한다. 현대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만물이 새로운 질서를 갖는 것으로의, 모든 피조물의 성화를 강조한바 있다. 그는 세상의 개혁과 피조물의 새롭게 됨으로서의 사회적 성화의 차원을 다섯 가지의 해방으로 말한다. 경제적 차원, 정치적 차원, 인종적 문화적 차원, 자연세계의 차원, 삶의 무의미함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 등에서의 해방이다.  

 

 2) 칼빈과 사회적 성화의 실천
  중세는 성직에 관하여만 “소명”(Beruf, vocatio)이라는 말을 적용하였으나, 루터는 만인제사장직론에 입각하여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았다. 큰 패러다임 이동이다. “소명”에 관하여도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칼빈은 국가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성화)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세속적인 삶(secular life)을 거룩하게 사는 삶(sacred life)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직업윤리는 “예정론” 및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청교들에게 가서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베버(Max Weber)가 언급할 정도로 루터의 그것보다 사회윤리적인 영향력이 더 컸다 하겠다. 끝으로 “교회와 국가”에 대하여도 칼빈은 루터를 따른다. 즉, 칼빈이 루터의 두 왕국론(zwei Reichenlehre)의 구도를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루터와 강조점을 달리한다. 환언하면 루터는 복음과 성령이 지배하는 이신칭의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으나 사단과 죽음과 죄의 권세 하에 있는 불신자들의 세계를 이분화 시킨 나머지, 후자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소홀히 하게 하는 경향이지만, 칼빈은 후자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을 강조하고, 나아가서 기독교인들의 후자에 대한 책임과 성화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예컨대 칼빈의 종교개혁의 현장인 제네바의 경우,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제네바 도시국가 전체가 크게 성화되었었다.
  칼빈은 사회적 성화를 폭넓게 실천하였다. 그는 제네바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신정정치의 장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저속한 노래와 카드놀이 고리대금업 등을 금지시키고, 76명을 귀향 보냈으며, 간음죄라는 이유로 58명을 처형키도 하였다. 칼빈은 근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로크(J. Locke, 1632-1704)의 사상과, 1688년 청교들이 중심하여 일으킨 영국의 명예혁명,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등에 순차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s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칼빈의 사상이 자본주의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정치적 질서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divine ordinance)의 산물로 보았다. 정치적 질서를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로 생각하였다. 국가와 교회 모두를 그리스도의 주권(the sovereignty of Christ) 하에 두었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루터의 두 왕국 이론과 비교된다. 그는 국가의 적극적인 기능이 강조하였다. 이에 신실한 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국가의 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에 비해 루터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악마와 육욕과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범죄가 줄어들도록 하기 위하여 가정과 국가와 교회라는 삼대질서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였다. 칼빈은 거룩함과 도덕을 사회질서에로 통합시키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으로서의 영성은 개인뿐 아니라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질서의 새로운 회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영성이 사적 종교와 공적 종교, 개인의 변화와 공동체의 변화, 그리고 내면성과 외면성이 서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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