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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최병규
Subject   이단 경계의식, 사도들로부터 배우자!  
이단 경계의식, 사도들로부터 배우자!  
 
최병규 박사의 이단 문제 칼럼
  
최병규  
 
 
어느 시대 어떤 영역에서든지 위기는 찾아온다. 그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면 그 개인이나 단체는 재앙을 면할 수 없다. 토인비(Arnold Toynbee)는 그의 역작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인류 문명의 위기와 극복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세계문명과 연관하여 이 용어들을 사용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은 거대 문명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종교(실제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 IX권에서 종교문제도 다루고 있음)의 문제,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이단들의 ‘도전’을 염두에 두고 이 술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challenge of christian cults)에 대하여 정통 교회가 변증적인 차원에서의 응전에 실패한다면, 교회는 커다란 폐해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에 대하여 주의 교회는 신약의 사도들 시대 때부터 계속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교육을 시켜왔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각처에서 이단의 공략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들, 특히 목회자들이 신약시대 사도들과 같은 ‘이단 경계 의식’을 가지고 대응(응전)한다면 교묘하고도 지속적인 이단들의 도전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필자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직시할 때 느끼는 점들 가운데 하나는,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이단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쁜 목회 일정 가운데 이단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독서하거나 연구한다는 것 자체도 힘들기도 하고, 이단 관련 자료들을 검토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흥미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들을 하나같이 비성경적이거나 목회자들이 배운 신학적 지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목회자들이 보기에는 이단들의 성경해석 및 교리들이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구태여 그러한 것들을 살펴보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러저러한 이유로 이단이나 불건전 단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도 그러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이단의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이단의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는 과업이 어떤 목회자들에게는 해당되는 것이고 어떤 목회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이단에 대하여 응전하는 것은 일부 목회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인가? 교회 활동의 다른 영역들은 소중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고, 이단 도전에 대한 응전 활동을 감당하고 있는 분야에는 투자의 가치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대하여 거시적인 세계관을 지닌 목회자로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로서 이단응전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회자로서의 수치이며 직무 유기’이다(필자는 격한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사안의 경우에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우리는 사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양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일꾼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목회자는 주님의 양떼가 사악한 이리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그들과의 영적 전투를 감행해야 한다. 성경은 그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술어를 빌리자면, 하나님의 도성(the Heavenly City)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최후 승리를 얻을 그 날까지, 이 땅위의 ‘모든 목회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악한 세력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이단들’과 싸워야 한다. 주님께서 최후의 승리를 보장하신다.

  그러면,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이단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의 이단 응전 의식’을 살펴보자.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거짓 교훈과 관련되어 있는 언급은 행 13:5-12절에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을 이단에 관한 언급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바울 사도에게 ‘거짓 선지자 박수’ 바예수(Barjesus)는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였다. 바울 사도는 바예수의 실체를 영적인 차원에서 간파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의 말을 전달했는데 그것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바예수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사람이었다. ‘바른 길(타스 호두스 타스 유데이아스, the right ways)이란 정통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예수는 그 바른 길을 ’굽게 한 사람‘이었다. ‘굽게’라는 말은 디아스트렙호(diastrepho)라는 말로서 왜곡하다(to perverse, pervert), 혹은 바른길(right path)에서부터 돌아서다(to turn aside)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리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바예수의 성향은 오늘날 이단자들의 모습과 거리가 멀지 않다.

  갈 1:6-9절에는 ‘다른복음’(another gospel)을 전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통복음인 ‘그리스도의 복음’(토 유앙겔리온 투 크리스투, the gospel of Christ)을 변하려 한(메타스트렙호, 곡해하다 to pervert, 바꾸다, 돌아서다 to turn around)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와 몇 명의 성도들을 요란케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요란케 하다’는 말은 ‘타랏소’(tarasso)라는 말로 “선동하고 자극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의심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거나 두려움으로 누군가의 정신을 공격하는 일련의 행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를 침투하여 기성교회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이들은 바로 ‘성도들을 요란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언명하기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아나데마’(anathema) 즉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신에게 바쳐지거나 성별된 어떤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으나,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진노(divine wrath)나 저주 하에 처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TDNT, Vol. 1. p. 354. 고전 12:3; 16:22; 갈 1:8).

 다음으로 고후 11:4-5;13-15절에 보면, 사도는 거짓 사도들을 분별없이 받아들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면서 경계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을 본다. 칼빈은 본문 4절을 주석하면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거짓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너무 성급했던 점을 들어 혹평하고 있다”고 했다. 고린도인들은 바울 사도가 온건하게 그들을 책망할 경우 더없이 하찮은 구실을 잡고 늘어지면서 불쾌해 했지만, 오만불손하며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거짓 선지자들은 두 손 들고 용납한 것이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바 거짓 사도들의 전파 내용은 무엇인가?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거짓 선지자들, 즉 현대적인 표현으로 본문의 바로 그 ‘이단자들’은 정통교회가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알론 예순, another Jesus)를 전파했고, ‘다른 영’(프뉴마 헤테론, another spirit)을 받게 했고, ‘다른 복음’(유앙겔리온 헤테론, another gospel)을 받게 하려고 했다. 그것을 고린도 교회 내의 일부 교인들이 쉽게 용납했던 것이다.

  바울이 전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 즉 기독론은 빌 2:6-10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 즉 이단자들은 그릇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에는 그 이단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수 상을 가지고 가르쳤는지 소개되고 있지 않다. 그것이 영지주의적 가현설이었는지 아니면 에비온주의적이거나 혹 다른 견해였는지 모르지만, 다만 그 거짓선지자들의 기독론은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로 하여금 가르치도록 위탁한 복음이었다(고후 4:3; 롬 2:16; 16:25; 살후 2:14; 딤후 2:8).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그러한 정통 복음의 내용과는 질적으로 다른(헤테론, different) 복음을 전한 것이다. 사실 ‘다른 복음’이란 복음이 아닌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이단자들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이것은 우리 정통교회가 오늘날의 이단 사이비 사상을 전하는 이들을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쳐다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고후 11:13-15절은 이렇게 가르친다:“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이단자들은 ‘거짓 사도’로 지칭되었다. 비록 이단자들이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할지 몰라도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사탄(Satan)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들은 ‘궤휼의 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궤휼’(돌로이, deceitful)이라는 말은 ‘교활한, 속이는, 사기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역군’(에르가타이)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일꾼'(workman), '노동자’(labourer)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단의 특징이 ‘거짓된 속임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칼빈은 궤휼의 역군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악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교묘하게 무슨 구실을 대면서 파고들어 환심을 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철저하고 세밀하게 검토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럴듯하게 탁월성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다. 마치 오늘날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조를 파송한다든지 위장 교회를 하거나 위장 신학교를 하는 등등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단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단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제 아무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현대 이단들이 사용하기 좋아하는 말들로는 사도요한격 목자, 말세 비밀의 종, 선생님 등등)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들의 실체는 ‘거짓, 거짓,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바울은 ‘가장하는 자들’(메타스케마티조메노이), ‘사탄의 일군들’(호이 디아코노이 아우투: 여자적으로는 ‘그의 일군들’이라는 뜻이며, 여기서 ‘그’는 앞 절에 나와 있는 ‘사타나스’를 가리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렇다. 이단자들은 단적으로 ‘사탄의 일군들’이다. 이 표현 보다 더 직설적인 표현은 없다. 자신의 본질은 ‘악’과 ‘어두움’이지만, 자신을 빛의 천사처럼 ‘가장’하는 것이 사탄이다.

  그리고 15절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 즉 ‘이단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을 엄히 선포하고 있다: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칼빈은 이 표현을 바울이 경건한 자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덧붙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을 무시하고 주의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용감한 사람의 발언이라고 했다. 칼빈의 설명처럼, 바울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특유하고 담대한 양심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참 사도(현대 몇몇 이단들이 사용하기 좋아하는 술어로는 참된 목자, 사도요한격 목자)인 양 위장하면서 역사적 교회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이단적 교훈을 가르칠 것이지만(Cf. 갈 1:7-9) 그들의 결국은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cf. 계 20:10-11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딛 3:10-11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이단’을 경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이 구절에서 사도는 ‘이단에 속한 사람’(하이레티콘 안트로폰, heretical man)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칼빈은 하이레티콘 안드로폰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우리가 고집 센 사람들을 이론으로 이기려 한다면 싸움에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코 말의 부족을 느끼지 않으며, 악한 생각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 가운데 싸움에 있어서 지칠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디도에게 그가 가르쳐야 할 교의의 형태를 명백히 설명했던 만큼 여기서는 더 이상 이단과 싸우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한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논쟁은 또 다른 논쟁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그러한 끊임없는 논쟁이야 말로 ‘사탄의 계략’(cunning of Satan)이라는 것이다. 곧 사탄은 이런 사람들의 ‘악한 수다’를 통해서 선하고 신실한 목사들을 얽어매어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때문에 다툼을 야기하는 논쟁에 휘말려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런 사람을 피하라’는 말을 그들의 야심을 채워주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바울이 ‘이단’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칼빈에 의하면, 바울이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는, 엄연한 잘못이나 사특한 교의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확실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단’이라는 말 속에는 죄악스런 욕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려는 야심만만하고, 무질서하며, 분쟁적인 사람들이 포함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뻔뻔스럽게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자’를 가리켜 바울이 이단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칼빈은 우리가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와 견해나 의견을 달리 한다고 해서 ‘모두’ 이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당파를 이루지는 않지만 서로 동의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바울의 표현 ‘깨어지지 않는 조화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라’(빌 3:15)는 말이 바로 이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교회의 몸에서 분리하거나 양떼를 갈라놓거나 건전한 교의의 발전을 방해한다면 그런 사람은 한사코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단’ 내지는 ‘분파주의’는 교회의 통일성에 완전 상치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한두 번 훈계한 후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 신자가 적어도 한두 번 그런 사람을 ‘훈계’한 후에 그들을 멀리하여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건전한 마음으로 돌이키게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를 이단이라고 부를 수 없겠기 때문이다(칼빈의 견해). 그러나 여기에서의 ‘훈계’(누데시아, admonition)라는 말은 아무런 훈계나 개인 자격으로 말하는 훈계가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공적인 권위로 베푸는 훈계를 뜻한다. 칼빈은 이와 관련하여 강조하여 말한다: “이단은 엄숙하고 혹독하게 규탄해야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훈계한 후에도 회개귀정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울 사도는 ‘멀리하라’(파라이테오마이). 이 말은 '거절하다 혹은 거부하다'(to reject, to refuse)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이단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박윤선 박사가 어거스틴(Augustine)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지지하고 있다: “이단자는 그 이단적 주장을 회개하지 않는 자이다. 나도 이단적 이론을 가지는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것이 그릇된 줄 알 때에 회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단자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박사가 말하기도 했듯이, 누군가가 신앙에서 탈선된 듯이 보인다고 해서, ‘즉시’ 그를 이단자로 규정해서 내어버리는 것은 신자들로서 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회개하지도 않는 이단자를 ‘포용하는 것도 교회의 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박윤선).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이단에 대하여 어떤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 그의 이단경계 사상은 벧후 2:1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칼빈이 잘 설명하고 있듯이,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교리를 부패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서 일반적으로 연약한 심령들을 심히 위태하게 뒤흔들어 놓을 것이므로, 신자들을 끝까지 견디도록 격려함으로써 이같이 거치는 돌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 아래 있는 교회의 상태는 율법 아래 있던 교회의 상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불경건한 교리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단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사탄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뒤엎으려 시도하기 때문에 모든 난폭한 훼방을 확고히 진압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 베드로의 서신에서 우리가 주시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이 있으리라’는 말인데,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어떤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지 않고 ‘모든 시대를 다 포함시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옛 백성들과 비교하고 있다. 즉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시험에 빠질 것에 대비하여, 이 가르침을 우리 시대에도 적용시켜야만 할 것이다(칼빈의 주석).

  이어서 베드로는 ‘가만히 끌어들여’(파레이삭수신, secretly bring in)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비밀히 소개하다”, “몰래 가져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사방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사탄과 악인들의 교활성’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신자들은 이단자들이 가려놓은 함정을 피할 수 있도록 더욱 철저히 ‘경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이단들이 제아무리 멸망시키려고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깨어 있는 자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거짓 선생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먼저 그들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한다. 여기에서 “사신”(아고라산타)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무엇을 사다’(to buy) 또는 ‘장사를 하다’(to do business there, buy or sell) 등의 1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구속(구원)하다’(to redeem)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부인한다(아르네오마이, to deny someone, to deny one's self)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문은 거짓 선생들이 주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임박한 멸망’(탁시넨 아폴레이안)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3절에는 ‘저희가...지은 말을 가지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칼빈은 이 구절을, 베드로 사도가 신자들로 하여금 악한 선생들(ungodly teachers)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 하여 그들을 보다 예리하고 지속적으로 대적하도록(resist them more resolutely and more constantly)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이단들이 교묘하게 구상해 낸 것을 ‘지은 말’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지은 말’(플라스토이스 로고이스, feigned words)이란 ‘만들어진, 가공의 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만들어낸 말로써 성도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을 만들어내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3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탐심’(플레오넥시아)이다. 탐욕스런 욕심에 이단 교주들이 기초해 있다. 그들이 그릇된 동기를 가지고 어떻게 합리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탐심’(covetousness)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단자들은 탐심으로써 만들어낸 말을 가지고 성도들에 접근하는데, 그리하여 그들은 ‘이를 얻는다’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를 얻다’(엠포류오마이, to make merchandise of you)는 말은 '사고팔다‘(to buy and sell) 즉 장사하다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그들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유익을 얻는다는 말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정면 대치되는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에게 향한 결과는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하여 악한 자들 즉 거짓 선생들(현대적 의미로 이단자들)이 받을 멸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칼빈은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그들은 임박한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으므로 무릇 그들과 연합하는 자는 비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다서 1:3-4절에서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여기에서 유다는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힘써 싸우라’는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고 하면서, 편지를 써야 할 필요성(아낭케)을 느꼈다고 한다. 칼빈(Calvin)은 이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유다가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감을 느꼈다고 해석했다. 그러잖아도 유다는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성도들이 악마의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만큼 당장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다는 왜 절박한 심정으로 편지를 썼는가? 그것은 4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거룩한 공동체 내에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특별한 공격과 유혹의 계략이 있으므로 성도들은 무장을 갖추고 격퇴시켜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칼빈은 그러한 유다의 태도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모범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선하고 신실한 목자(good and faithful pastor)란 얼마나 예리하게 현재 교회가 당면한 상황(present state of the Church requires)을 파악하고서 각 경우에 맞는 충고를 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칼빈의 이러한 언급 속에서 우리는 도전을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유다에 의하면 이단자들은 ‘가만히 들어온다’. 파레이스뒤노(pareisduno)는 ‘몰래 들어오다’(to enter secretly, to slip in stealthily), ‘몰래 기어들어오다’(to creep in unawares)라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다가 사용하고 있는 ‘파레이세뒤산’은 사단의 무리들이 정신 차리지 않고 있는 자를 감쪽같이 엉큼하게 파고드는 것을 뜻한다. 사탄이 하나님의 알곡을 훼방하려고 그의 가라지를 뿌리는 것은 농부들이 잠들어 있는 밤을 통해서이다.” 그렇다. 오늘날의 이단들도 교회에 ‘비밀리에’ 잠입해 들어온다. 그들 가운데 한 부류는 ‘침투조’라고 불리고 있음을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르고 있다.

  유다는 그와 같이 가만히 들어와서 성도들을 노략질하는 이들에 대항하여 성도들이 경각심을 가지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와서 성도들에게 퍼뜨린 거짓 교훈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칼빈이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은 우리가 불경건과 세속적인 욕망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서 검소하고 의롭게 그리고 경건하게 살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악독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방탕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일 4:1-3절에서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으므로 영들을 시험하라’고 하면서 경계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한 주석을 하면서 그가 요일 2장에서 해석한 부분과 연관 짖고 있다. 칼빈은 요일 2:18절에서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라고 하는 부분의 ‘적그리스도’란 한 사람이 아니라 왕국이나 어떤 체제로 보려고 한다. 그런데 18절에서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하기 때문에 그 표현은, 사도 요한이 장차 산발적으로 나타날 전령사들로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으로 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칼빈은 그 예로서 세린더스, 말시온, 발렌티누스, 에비온과 아리우스 등 그 후에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일어난 마귀의 왕국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이단’ 혹은 ‘이단자들’을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신비가 은밀히 역사해 온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칼빈은, 그의 당대의 현상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사탄이 잔인한 폭력으로써 교회를 압박하고 공공연하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지금 이 때야말로 조금도 방심하거나 졸아서는 안 될 때’라고 한 것이다.

  2장에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설명한 칼빈은, 4장에서의 사도 요한의 교훈 속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도요한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악을 보여주고 그 악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그 악을 조심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영들을 분별하라), 마지막 세 번째로는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특별한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인데 결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보았다.

  1절에 보면 사도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즉 요한은, 칼빈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듯이, 신자들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어떤 교리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잡다한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상기시킨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다. 교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덧붙인 것이다(칼빈). 우리가 적절한 비평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분별의 영을 받아야 하며, 또 그 영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별의 영’을 받아야 한다고 하며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영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 분별의 영을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에게서 지혜의 영을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참 분별력을 갖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2절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아주 쉽게 분별하는 특별한 표식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참 믿음의 목표가 되지만 ‘모든 이단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요한이 제시하고 있는 그 기준은 무엇인가? 먼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점을 시인하는가 않는가의 여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이미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그분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참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설명한다(칼빈은 옛날의 이단들이 이 믿음에서 떠난 것처럼, 그의 당대 가톨릭 교도들도 역시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또 그의 인성을 부인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참신이시면서 참인간(vere Deus vere homo)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영들은 하나님께 속한다(엑 투 데우 에스틴). 그러나 3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는 사기꾼들을 ‘더 증오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삽입하여 넣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시대 사도들이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에게 가르쳤던 바 ‘이단의 도전’에 대한 ‘응전 의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도들은 철저한 이단 경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목회자요 교회의 스승으로서 주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셨던 양무리들에게 이단자들과 이단 사상의 위험성을 일깨워주었다. 사도들에게 있어 ‘이단 경계 의식’과 ‘이단 교육’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 본연의 태도’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잠재의식 속에도 과연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의식’이 살아 있는가? 필자는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다. 목회자 자신부터 이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성도들에게 경계의식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이단 사상으로부터 더 잘 보호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사도 요한,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와 같은 분들처럼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악한 이리떼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하여 애써야 하겠다.

  오늘 우리들이 교회의 1세대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 시대의 사도들로부터 이단 응전의식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을 베풀고 있는 주님의 양떼들은 이단의 도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신앙을 보호하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창궐하고 교회에 까지 침투하여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이때에, 모든 목회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이단 경계의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 최병규 목사     ©뉴스파워  
 



최병규 박사는 예장 고신총회 유사기독교 연구소장으로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단상담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한장총 이단대책위원회 서기 및 위원장 역임. 한기총 이단대책위원회 서기 및 부위원장 역임). 한국교회가 매년 9월 첫째 주간(혹은 주일)로 지키는 이단경계주일 제정을 발의하였으며, 현재 각 교파와 교단이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공과 교재 제작하도록 협력을 구하며 추진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이단 대응 관련 아티클은 아래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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