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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이야기
Subject   교회,종말론 강의/안명준교수/김정건목사정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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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종말론
안명준 박사
김정건목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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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중요성 - 영적인 기관으로 영혼의 구원에 관련되어 있다.

문제점 - 현대시대에 교회관의 잘못된 형성 - 그리스도와 말씀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와 배금주의 및 세속주의 샤머니즘, 최근의 성장지상주의, 극단적 은사주의, 신비주의 등등

(예/ 결석 안하면 돈주는 교회 - 미국 록 오브 오번 - 의례적 형식 탈피 신바람 화제.)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문제점이 있지만 현실을 잘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 중요한 것은 말씀과 그리스도가 중심과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질문을 제기?
- 어떻게 극복하는가? 올바른 대안제시,  문제점을 발견-분석, 분석-재창조

문제점을 갖는 한국교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들(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쓰레기다"
- 신학교육에 있어서 올바른 신학교육
- 성경에 근거한 목회관
- 그리스도 중심의 목회철학,
- 현대의 지식기반에 근거한 정보화(인터넷, 전자 우편)
- 현대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루터의 종교개혁(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면죄부(면벌부) - 죄에 대한 공포(죽음과 저주)
스콜라 토마스 아퀴나스 "은총과 자연" -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서 출발
현대인의 마음을 찾아라! - 인간 이해에 대한 연구를 하면 목회철학과 비전을 갖게 된다.
루돌프 불트만 - 현대인은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해에서 비신화화를 주장
              - 현대인을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접근하여 해석을 하였다.
              -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강요하지 말라.
              - 시간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지 않느냐는 전제가 요구된다.
K. 바르트
- 잘못된 교회관을 타파하고 사회와 역사 앞에서 앞장서서 가는 모범적인 교회관이 필요하다.
- 사회와 역사에 대한 Leadership이 요구 된다.



서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신에게 연합시키고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어서 그 교회를 자기의 몸 곧 성도의 무리(communio fidelium, sanctorum)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론이 신론과 계시론 보다 앞선다.
-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드로의 로마 방문을 대한 이해에서 교회를 출발, 우선권을 둠
- 검증되지 않은 것은 부패한다.(R.C.C는 검증하지 않았다.)

개신교는 검증의 물줄기를 찾았다.
종교개혁가들은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검증의 기회를 삼았고,
새롭게 때어날 수 있었다.(reform, renewal) - paradigm shift
교회는 전통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았다.
* 트렌트 회의(Tridentine) / 1545-1563년에 열렸던 로마 가톨릭의 종교회의로서, 개신교의 전파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이다.  이 회의에 의하면, 개신교의 교리들은 오류투성이로서, 이 두 교회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성경과 전통 공회, 교리집을 같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개신교는 모든 것은 성경 아래에 놓고 보았다(오직 성경)
교회는 성경을 산출하는 도구이기에 앞선다고 하며,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수여해 주는 자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한다.
무형교회가 아닌 신자의 어머니로서 유형교회를 강조한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을 교회보다 먼저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우선으로 두었다.

교회의 명칭과 교회론의 역사적 개요

구약

카알 - 에클레시아 - 부르다
에다 - 수나고게(LXX) - 지정된 장소에 모이다.

신약

에클레시아 = 에크(from) + 칼레오(call out) - 불러내다 - 신약교회로 주로 사용, 예수님도 처음으로 사용(마 16:18)
수나고게 - 오다, 함께 모이다 - 유대인의 종교적 회합, 공적 예배 건물

에클레시아의 사용
지교회, 가정교회, 단수형의 일단의 교회들, 그리스도의 중심의 전세계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는 전체로서의 몸을 지칭
Church - kerk, Kirche.
          Kyriankn - kyriakos - 주께 속하다 - 하나님의 영적인 건물을 의미

교회를 나타내는 성경의 다른 표현들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 하나님의 전, 위에 있는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


교회론의 역사적 개요

교부시대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가? - 감독의 통치하에 있는 외적인 기관으로 인식(조직체)
성결의 표지로 감독들을 사도들이 참된 후계자로 간주
어거스틴은 교회의 본질을 강조 - 도나티스와(Donatism ;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 주의자들은 규율(discipline) 문제를 구실로 하여 주후 4세기에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최초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이단은 아니며 성도의 교제는 거룩하고, 배교자의 성례는 무효이며, 자기 교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한다) 싸우면서 -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람의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 키푸리안의(교회의 조직체를 강조, 감독 권위, 유형적교회) 영향으로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통일시하게 하는 로마 카톨릭교회관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중세시대

성 빅토르의 위고는 교회와 국가를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두 권세, 교회가 더 상위,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 교회의 권위로,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로마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
이런 동일시하는 사상의 결과
1) 가정, 학교, 과학, 상업 등 모든 것을 교회의 통치하에 둘 것.
2) 구원의 복은 오직 교회의 각종 규례들을(특히 성례) 통해 임한다.
3) 교회의 점진적인 세속화를 초래함

종교개혁기

Rome Catholic Church(R.C.C.)의 교회관을 거부하고, 만인제사장을 주장, 교회의 참된 표지로 말씀의 참된 선포, 성례, 권징.
칼빈 -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반대 / Hans K ng, 교회 밖에도 구원있다.)

R.C.C는 교회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 중심 신학도 교회론이다.
교회 > 예전(MASS) > 성만찬(화체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재료의 개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화체설"을 주장)
- 미사의 강조는 은총을 주는 기관은 교회이다.
- 개신교는 모든 은총의 권위가 성경과 성령에 있다.      

#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18세기와 그 이후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영향
슐라이어마허
- 교회의 본질을 교제의 정신에서 찾음. 동일한 정신으로 고무된 신자들의 단체
- 종교 ; 절대 감정을 가지고 절대적 신을 의지하는 것.
-자유주의 ;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체험을 중요시, 자신의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신학을 전개.(이전까지는 성경에 중심을 두고 신학을 정립하고 전개했다)
- 그는 예수를 신의식이 감정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리츨 - 사랑,  
- 무형 - 하나님의 나라,  ; 사랑의 동기로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 유형교회 - 예배를 위하여 모인 공동체
-칸트의 영향을 받음


한국교회는 중세 R.C.C.로 복위하는 현상을 가지고 있다.
철학적 영향 - 화체설(교회만이 은총의 수단이다)
목회자의 교회 우월주의(개교회 지상주의)

                                교회 -교회(유형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성례전                                  
      

   교황                           MASS - MISSIO에서 나옴, 중심사상
                                           사제를 중요시함

베드로가 직접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열쇠를 주었다. R.C.C.가 이 열쇠를 직접 맡았다고 주장
바티칸 - 순교가 일어났던 곳 - 이 땅을 사들여서 교회를 지음 - 바티칸 성당, 시티
        (양초, 사자, 능지처참)

미사(mass) - 칠성사(성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 성사)
성만찬은 화체설
교회를 기구적 교회로 조직했다.(제도화된 교회)
제도적 교회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영향도<세례(성례전), 감독의 권위>

토마스 아퀴나스(천사장 신학자) - 공식적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
최근에는 칼 라너(Karl Rahner) - 하이데거의 이론을 접목하여 20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주도하고 있다.
아퀴나스는 철학을 이용하여 schola 철학을 만들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ectus.
형상과 질료(form and material)
플라톤은 영혼과 현실을 주장(이원론)    나무라는 idea
나무가 있으면 그 자체가 실제이다.      나무    eros(돌아가려는 마음)

나무 = form
나무의 씨가 운동 에너지를 주면 나무가 운동에 의한 생명력을 가지고 나무의 목적을 가지고 나무가 된다.    


움직이지 않고 부동하는 원인이 - 신(神) - 은총(恩寵)을 준다.
아베로스(아랍인)의 영향을 받아서

어거스틴은 교회론 주장(은총으로서)
"인간의 의지, 공덕, 보이는 물질, 헌금, 자연 등등을 움직여서 하나님께로 은혜로 이끈다."
"화체설"을 주장한다.
예수 "나의 몸 - 떡 - 질료(자연)
은총이 물질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몸(형상)으로 만든다.
(hoc est corpus meum - this is my body)

Hans Kung / Karl Rahner = 성례전

고전 11:1-34
창 1:
하나님은 먹는 것을 통하여 영적 훈련을 시킨다.

생명나무                              

                         나무들


          선악과
에덴에서는 먹는 것이 나온다. 인간은 생명이 없다. (we have no life)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나무 = 예수 그리스도
성만찬에서 이미 임재해 계신다.(요한 6:35, 생명의 떡)

예수가 물위를 걸으신 이야기
불트만 - 해변가를 걸었다. (on the water(×), beside the water(○))
- 성경적 의미는 홍해바다를 건너시는 출애굽을 이미한다.

















안셀름(Anselmn)
fides quaerence intellectum
"믿음이 이성을 추구한다"
믿음을 가지고 믿어지면 이해하게 된다. (Karl Barth에 영향)

믿음과 이성 - 이성과 은총, 믿음을 같이 부여한다.
                  죄가 부패가 없다.

무형
 
교회 = 그리스도
 
유형

431년 에베소 공회 - 로마카톨릭교회는 마리아 숭배를 결정
600년 마리아에게 기도, 성자(聖者)에게 기도, 천사에게 기도를 결정

아퀴나스의 은총론 - 관계적 은총론(하나님과 나(죄인) - 회개, 올바른 관계)
루터 롬 1:17을 올바르게 이해함

로마카톨릭교회 은총 - 존재론적, 유형론적, 물질적
charis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한다.

본질과 방편
르네상스(파괴와 부활(재생))
종교개혁(전통과 갱신)
교회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방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 다원화 시대에 맞는 교회와 선교의 모델이 필요하다.

은혜란?
은혜-성화의, 은혜-지속적인(Grace, Sanctifying or Habitual)
     인간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끔 능력을 분여해 주는 초자연적인, 그리고 영속적인 주입된 은혜를 가리키는 로마 가톨릭의 개념이다.  세가지의 주입된 능력은 믿음.소망.사랑이다.  성화의 은혜는 지속적인 은혜라고 불리워 지기도 한다.  개신교에서의 성화의 은혜는 인격을 새롭게 하고 강하게 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은혜-충분한 (Grace, Sufficient)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충분한 은혜는 실제적 은혜의 일종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이루기에 충분하지만, 받는 사람의 거부로 말미암아 효과적이 되지 못한 은혜를 가리킨다.  어떤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소유하고 있다 한다.

은혜-선행적 (Grace, Pervenient)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선행적 은혜는 신앙을 갖게끔 격려하고 도와주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결정에 앞서는 은혜를 가리키나, 특수한 능력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은혜-실제적 (Grace, Actual)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일시적인 도움, 또는 능력을 가리키는 로마 가톨릭의 개념이다.  이는 성화의(sanctifying), 혹은 지속적인(habitual) 은혜와 대조된다.

은혜-불가항력적 (Grace, Irresistible)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거부할 수 없는 은혜를 말한다.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에 관한 영국의 수도사 펠라기우스(400-420년?에 활동)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학을 가리킨다.  그의 반대자들에 의하여 그의 주장을 재구성할 수 있는데, 그는 원죄를 부정한 것 같다.  그는 논증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선악을 행하기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 자유는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죄를 인간 영혼의 상태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고, 인간 행동의 특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자기 자신에게만 중요하였다.  아담이 당하게 된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다.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습관적인 것일 뿐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입장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이것이 그의 결론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어쨌든 어거스틴의 입장이 정통이 되었고, 그후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거나, 원죄의 교리를 거부하거나, 혹은 죄책은 인간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행위에만 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나쁘게 말하기 위하여 사용되게 되었다.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 주의 (Augustinianism)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철학사상들의 복합체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등장했던 철학자들 중 많은 인물들이 그의 주요사상들을 재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것들을 자신들의 독자적인 해석을 통하여 변형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때로는 다른 사상의 학파들, 특히 아비켄나 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영향 하에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은 학설들-예컨대 형상 다원론이나 우주 질료형상론-이 명시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기술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중세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고 후일 더욱 발전되어 그 전통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지녔다.  이러한 전통은 아퀴나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세기 사상을 지배하였다.  아퀴나스 이후 이 전통은 토마스주의와 또다시 부활한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점차 붕괴되고 더 이상 어떤 독특한 학파나 전통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통은 다양한 정도에 따라 중세 후기와 현대 철학자들을 고무시키거나 그들의 특징을 이루는 그런 정도의 영향력은 계속 발휘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주요 주제들은 다음의 일곱 가지 표제 하에 논의될 것이다.
     1. 신앙과 이해:  신앙과 이해(혹은 이성) 사이의 관계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구조 속에서 중심적인 것이다.  또한 기독교적 지혜와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개념도 그러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속에 나타난 신앙과 이해의 관계를 설명한 가장 영향력있고 주요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공리 속에 요약되어 있다:  Credo et intelligam(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믿는다).  아벨라르두스는 이와 유사하게 이해에 대한 신앙의 우월성을 철학의 기능에 대한 자신의 논평들 속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는 바울을 부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라면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필요한것이라면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늘 아래 다른 이름은 없으며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받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저 베이컨에게 있어서는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가 극히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  과학적 방법과 실험을 신뢰하는 열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베이컨은 최고의 지혜가 성경 속에서 발견된다고 확신하였으며 철학은 오로지 그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이와 유사한 주제가 보나벤투라에 의해 그의 저서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는 모든 학문과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야 하며 또한 차례로 그 신학은 신앙과 하나님의 사랑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그 까닭은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주며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신앙의 이 우위성을 받아들이고 신학에 대한 철학의 완전 종속성을 인정한 또 다른 중세 철학자들로는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라 로첼레의 요안네스, 아쿠아스파르타의 매튜, 로저 마스턴(Roger Marston) 등이 있었다.
     2. 심리학: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심리학의 특징은 인간을 육체를 사용하는 영혼으로 정의하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이 정의를 통해 암시한다는 점이다. 영혼은 삼위일체의 한 형상으로 간주되며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진다.  세인트 빅토르의 휴는 저명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신비주의 때문만은 아니고 그가 영혼과 인간을 동일시하고 우리 인간들은 영혼과 그 영혼의 정신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영혼과 육체의 연합을 '혼합'으로 묘사하지 아니하고 '병치'의 일종이라고 묘사하였다.  그와 유사하게 오베르뉴의 기욤도 인간을 육체를 사용하는 영혼이라고 설명하고 육체의 모든 부분들 속에 영혼이 임재하고 있음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혼 그 자체에 대한 지식보다 영혼에 있어서 더 본질적인 지식은 없다"라고 진술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이다.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향하여 가며, 인간의 영혼 속에 삼위일체가 임재하며 영혼이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 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심리학과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인식론 모두의 특징이다.  이 원리는 '내면화의 원리'라고 불리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즉 "마음에 임재하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식에 그것이 임재하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은 마음 그 자체와 똑같이 그렇게 마음에 임재하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근대철학에서 이 내면화의 원리는 데카르트.파스칼.토마소 캄파넬라.모리스 브롱드 등과 같은 저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3. 인식론: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인식론은 중세 철학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타협하였다. 이런 타협은 특히 감각작용이 본질적으로 영혼행위의 하나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이론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모범개념들에 관한 학설과 관계가 있는 신적 조명 이론과 진리란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모든 마음 속에 존재하여 있으나 그 마음들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진리개념 등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 신적 조명이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과 혼합되기도 하였다.  안셀무스는 지식이란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이념들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베르뉴의 기욤은 신적 조명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신적 조명이 어떤 이해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부여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로스테스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적 조명이론을 과학 내의 경험적 접근방식과 결합시켰다.  즉 그는 진리란 한 사물과 그 사물의 신적 모형과의 일치라고 간주하였다.  로저 베이컨은 신적 조명을 영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신적 조명 속에 나타나는 신의 행위를 현실적 지성 행위와 비교하였다.  알렉산더는 신적 조명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론과 결합시켰다.  라 로첼레의 요안네스도 또한 두 가지 인식론, 특히 현실적 지성과 신적 조명의 개념을 결합시켰다.  보나벤투라와 아쿠아스파르타의 메튜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식론을 수정하였다.  전자는 감각지식과 추상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과 가능적 지성과 현실적 지성의 존재에 관한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획득을 위해서는 신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도 받아들였다.  아쿠아스파르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론을 수정하였다.  반면 로저 마스턴과 페트루스 올리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적 조명론의 영향을 특별히 받은 학자들은 말브랑쉬(Nicolas de Maleb-ranche), 안토니오 로스미니, 빈첸초 기오베르티 등이다.
     4. 종자 상태의 이성(rationes seminales):  아우구스티누스가 6일 동안의 창조가 있은 후 질료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묘사한 rationes seminales('물리적 힘들' 혹은 '종자들')에 대한 개념은 13세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철학체계들 속에 아주 뚜렷이 재현되었었다.
     5. 질료 형상론과 형상의 다원성:  질료형상론과 형상의 다원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부터 발전되었던 학설들이었다.  후자는 그로스테스테의 빛의 형이상학과, 육체를 수많은 다른 형상들-예를 들어 요소들, 식물들, 동물들 등의 형상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그의 분석 속에 최초로 나타났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어떤 육체에 의해 소유되는 최고의 형상을 빛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빛은 '유형의 형상'이라고 지칭되었다.  형상의 다원성은 그로스테스테 이후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보나벤투라.룰루스.둔스 스코투스 등의 철학자들에게서 현저하게 주장되었다.  보편적으로 이 이론은 여기에서 당연히 추론되어 나오는 보편적 질료형상론과 더불어 나타났다.  질료형상론은 모든 피조물들은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하여 천사적 존재와 인간의 영혼들은 형상과 영적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여졌다.  이런 학설들을 통하여 보나벤투라나스코투스같은 철학자들은 육체와 떨어져 있는 인간의 영혼의 실체적 성질이 완전무결하다는 자기들의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학파는 양 학설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특히 킬워드비와 페컴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토마스주의 학설을 신랄하게 반대하는 데에 이 형상의 다원성을 사용하였다.
     6. 역사의 의미: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계시 속에 표현된 주기적 역사개념과 성육과 구속의 교리들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역사란 신의 계획과 섭리의 한 부분이며 신적 이성의 임재를 반영하고 있다.  신의 은총의 부여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며 인간이 지상의 도성에서의 순례가 끝난 후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중세기 철학자들 중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영향을 벗어난 학자는 거의 없다.  이 사상은 단테의 작품과 기독교 공화국에 관한 로저 베이컨의 사상 속에 특히 현저히 드러나 있다.  이 사상은 캄파넬라.보쉬에.라이프니쯔 등과 같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진보와 사회적 유토피아 사상에 대한 현대적으로 세속화된 변형들 속에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7. 자비의 윤리와 의지의 우월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공식화된, 자비의 윤리와 인간 속에서의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월성의 원리는 종교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었다.  전자는 은총과 선택과 예정 등의 상호관계를 지닌 교회들과 더불어 종교적 윤리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프란체스코 학파들 내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모든 중세 신학과 윤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것은 루터와 칼빈 등 후대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의지의 우월성의 원리는 지적 조명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나벤투라의 역설 속에 반영되어 있다.  미들턴의 리처드는 의지란 다른 어떤 능력에 의해 결정됨이 없이 그 자체를 결정하는 능력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란 자유한 것이며 반면 지성이란 알려져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의지는 이 두 능력들 가운데 더 고상한 능력이며 지성을 향해 명령하는 능력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

     1.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양 극단의 이론인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중도적인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신앙에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신앙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은 자기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고, 그 후에 하나님이 그 새생명에게 계속 살 수 있는 은혜를 계속해서 부어주신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어거스틴이 가르친 두번째의 강조점과 상충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부르신 사람은 멸망받을 수 없다<참조: 성도의 견인>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 은혜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어거스틴이 죽기 직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거스틴 사후에도 계속되다가 529년에 이르러 오렌지 회의에서 해결을 보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에는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정죄하고 있으나, 그 결정문의 끝에 첨가되어 있는 요약 구절은 반어거스틴적이어서 이 결정문의 일관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현재, 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동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의 능력을 강조하는 견해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단세설(monergism)에 반대하여 제기되었던 신인협동설을 가리킨다.  교의사에 있어서 이 용어가 생겨난 기원과 그 적용범위는 아직도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았다.  엔리코노리스가 저술한 [Historia Pelagiana] (Padua, 1673)의 한 구절을 보면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이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노리스는 트렌트공의회 이 후에 스콜라주의 신학을 마무리지은 사람들에게서 이 용어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고 보아야 더 타당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16세기까지도 이 용어가 루터교협화신조에서 한번 고립적으로 나타나며(Epitome,581,10), 1601년경에는 루이스드 몰리나가 공박당하던 논지를 언급한 '조력성총 논의회'(Congregatio de aux-iliis)의 기록들 안에서 발견되고 그 이후에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로 보아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용어는 도미니쿠스회 소속 토마스주의자들과 예수회 소속 신부들 간에 벌어진 몰리나주의 논쟁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그 뒤 이 용어는 얀센주의 논쟁 때문에 몰리나주의가 대중에게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가 반대한 마실리아(현 마르세이유) 신학자들의 죄와 은총의 교리도 따지고 보면 반펠라기우스주의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그뒤 레지(Riez)의 파우스투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고 몇가지 점에서 529년 오랑쥬 교회회의에 의해 이단적 교설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보다 앞서 카르타고 교회회의(418년)는 펠라기우스파를 반대하는 8개조의 결의문을 채택했었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1) 아담이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은 오로지 타락 때문이며, 2) 유아들은 원죄 때문에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고, 3)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용서 외에 죄를 피하게 하는 능력도 포함하고 있으며, 4) 지상에서 죄없이 완전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교리 전체가 승인된 것은 아니다.  2년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이단설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 펠라기우스파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은총이 값없이(gratis)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로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진술함으로써 카르타고 공의회의 판결을 넘어서고 있다.  펠라기우스에 대한 정죄를 승인한 자들이라고 해서 전부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전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역사하는 은총, 사유 그리고 교리'가 구원을 얻는데 충분하였는가 하는 문제 또는 '감화의 은총'이 추가로 또 모든 행위에 대해 내면적으로 꼭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이것이 실질적 쟁점이었다-는 396년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속에 나타나듯이,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 곳에서조차 펠라기우스와 반대되는 의미로 답변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때 비탈리스라는 카르타고인을 반박하는 가운데 이 점을 체험했었다.
즉 그는 비탈리스에게 답변하면서(420년경) 은총이 '인간 의지에 선행한다'고 강조하였다.  선행의 공로 사상과 명백히 모순되는 은총 및 예정에 관한 그의 교설로 인하여 또 다시 하드루메툼의 수도사들 사이에 소요가 발생하자 그는 그들을 좀더 계몽시키기 위하여 [De gratia et libero arbitrio]를 그들에게 보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은총의 역사가 자유와 공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와 공로의 기초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이 책에 뒤이어 그는 은총으로만 자유하게 된다는 교리와 성도의 견인교리 그리고 예정된 자의 수효가 확정되어 있다는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 [De correptione et gratia]를 발표하였다.
     마실리아인들은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생각하였고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간이 선을 행하려면 은총의 감화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포함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단세설을 싫어하였다.  그들의 신인협동론적 견해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동의하여 복종하든지, 아니면 은총에 무관심하여 그것을 거부하든지 간에 영생과 관련한 인간쪽에서의 결단을 포함하였다.  신앙은 순전히 은총이 역사한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 은총은 항거할 수가 없고 어떤 인간의 행위도, 이를테면 meritum(공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역사시키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가 없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만 기초를 두고있다는 등의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명제들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신인협동론적 견해는 구원받는 자의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으로만 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감화의 은총' 없이도 가능한 인간의 선행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의 중간이라는 전제 하에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지칭되어 왔다.  따라서 마실리아인들의 신인협동설을 '반'펠라기우스적 견해로 생각하는 것은 옳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프로스페르가 펠라기우스주의의 reli-quie(잔재)를 찾아낸 것은 그들의 견지로 본다면 충분히 근거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괄적으로는 결코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이단설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실리아인들의 견해가 반펠라기우스적이었던 것은 그 사상이 펠라기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중 교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요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몇가지 명제, 즉 그것들을 부인한 사람들이 후일 명백히 정죄를 받게 되었던 몇가지 명제들에 대해서도 반아우구스티누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로부터 정죄받은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반펠라기우스주의 속에 들어 있다고 지적받은 적은 없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반(anti)펠라기우스적 가톨릭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체계였던가?  오랑쥬 교회회의에서 견책받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로부터 이탈한 것들이라고 해서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실질적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읭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후대의 공식적 교리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야 한다.  이단설이라고 비난받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은총의 선행을 부인하고, 2) '신앙'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점을 부인하며, 3) 자연 인간을 선행의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로 보려 하지 않고 인간의 자발적 협조를 은총 역사의 조건으로 삼고, 4) 은총을 '어떤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가정하는 점 등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 개념의 내용과 범위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정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발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데 달려 있다.  따지고 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태도는 사실에 충실치 못한 모순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do-ctor ecclesie(교회의 박사)지만 그의 은총론은 여지껏 공식적으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후대에 발전된 교리 심지어 공식적 재가를 받고 있는 교리조차 반펠라기우스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흘러 왔다.  교회의 이런 불충실한 태도는 반펠라기우스 논쟁을 조정할 때 그대로 놔두게 된 애매하고도 곤혹스러운 점들로부터 야기된다.  오랑쥬의 결정은 모호한 것이다.  철저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면 오랑쥬 회의의 결정문 가운데서 "모든 세례받은 사람들은 만약 뜻만 품는다면 완전해지기 위해서 충실히 노력할 수 있다"는 문장에다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면 우리는 또한 그럴 뜻도 품게 될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을 추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결의문에서는 은총에 저항할 수 있다는 관념이 금지되지 않는다.  이 입장은 이미 반펠라기우스주의보다 연대가 앞서는 [Hypomnesticon]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세례받지 못한 모든 사람 심지어 기독교도의 죽어가는 영아까지도 예정의 불확실성에 속한 가운데 머물고 있다.  은총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선택받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세례받은 자에 관해서는 반(anti)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경향이 단연 압도하였다.  왜냐하면 설령 선택된 자들을 그들의 비저항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해도 버림받은 자들의 사망 예정은 그들의 항거에 대한 예견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며, 또 이것은 예견되던 항거가 행해지지 않으면 선택도 조절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 교리는 뿌리채 뽑혀 버렸다.  모든 세례받은 자에게 있어서 영생에 대한 결단은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 사상을 가진 교회로서는 고트샬크가 다시 제창한 예정론을 이단교설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Hypomnesticon]의 이러한 견해는 비밀-반펠라기우스주의(crypto-Semipelagianism)라고 부를 수 있다.  13세기의 프란체스코 신학은 이 견해를 넘어섰다.  5세기부터 전해 내려온 gratia generalis grata data(값없이 주어진 보편적 은총)과 구원해 주는 은총의 구별, 또 meritum de congruo(자연을 적절히 사용해서 얻는 공로)와 meritum de condigno(초자연적 은총을 근거로 하는 공로)의 구별을 이용하여 반펠라기우스주의적 진술들은 새로운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이 견해들은 신-반펠라기우스주의(Neo-Semipelag-ianism)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오늘날의 로마교회는 나중에 언급된 바로이 두가지 견해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reformed)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을 특징지워 주는 개혁자들의 인간론의 술어이다.  이 견해는 자주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이 말은, 인간이 완전히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것 중에 죄의 권세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이 모든 인간 능력에 진정한 조화와 완전을 가져다 주듯이, 죄는 인간의 전 존재에 영향을 끼치는 부조화이다.


루터
- 율법과 죄에서 구원 - 은총 - 오직 예수 그리스도
- 기독론적(예수중심) 은총을 주장
터툴리안 - 인간의 책임 - R.C.C.에 영향(은총 : 자연) - 공덕 사상

칼 라너 - 수용주의
-익명의 그리스도

교회관이 전통적인 구조는 이어가면서
성경신학적 new paradigm이 필요하다.

패러다임 (Paradigm)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그밖의 양식비평가들(Form-critics)이 제시한 명칭으로 복음서의 구절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구절의 의미를 납득시키기 위해 하신 특별한 말씀을 둘러싸고 구성된 여러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는 구절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설교할 때에 예화로서 사용됨에 따라 현재와 같은 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디벨리우스는 타복음서에서보다 그 형태가 뚜렷한 마가복음에서 8개의 예를 열거하고 있다.  즉 그것은 중풍병자의 이야기(2:1-12), 금식에 관한 질문(2:18 이하), 밀이삭을 자르는 이야기(2:23-28), 손이 마른 사람(3:1-5), 그리스도의 가족이야기(3:31-35),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을 축복하신 일(10:13-16), 세금바치는 일(12:13-17),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14:3-9) 등이다.

성경적 배경과 신학적 근거
성령론 - 교회
- 교회성장의 방법으로 생각
- 성삼위일체의 성령(leadership)



하나님의 은혜 - 교회 - 말씀과 성례(세례, 성만찬)

  계시(Revelation)
    헬라어 'apocalypsis'를 번역한 용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벗기다, 드러내다, 벌거벗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무엇이 계시되었는가 하는 계시의 내용에 대하여는 서로 다르지만, 계시의 형식적인 의미는 동일하다.  계시는  (1)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숨기워져 있다.  (2) 그것의 의미가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두 가지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쓰이는 용어도 아니고,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신약에서도 구약에서도 발달된 계시의 개념을 찾아 볼 수는 없고, 단지 후대의 신학자들이 교회의 메시지에 대한 깊은 반성을 통해서 이 개념이 정리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구약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주어져 있는 많은 형상과 상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기본적인 계시에 대한 이해가 그 형상과 상징 속에 감추어져 있다.  성경 본문은 모든 신학자들의 해석에 대한 방법론을 제공할 만한 자명한 해석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계시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은 신학자가 가지고 있는선 이해를 반영하고 있으며, 성경 본문의 해석을 통하여 그 선 이해를 정당화시키는 그러한 경우가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시를 이해하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유형들이 있다.  (1) 계시는 일련의 초자연적인 진리들이 나타내 보여지는 것이다.  (2)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명제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다.  전자의 이해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정통주의가 가지고 있는 계시 이해이고, 후자는 성경적이고 진정한 개신교적 이해이다. 이 구분은 매우 개략적인 것이므로, 그 둘의 중간에 수많은 대안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중 첫번째의 계시개념은 두 가지의 앎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한다.  하나는 본질에 관한 설명으로서의 앎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상징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는 앎이다. 이 두 앎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친구를 안다고 할 때에 그 친구의 본질을 안다거나, 그 친구의 지성과 의지의 관계나, 뇌와 양심의 관계를 안다고 말하는 것과, 그 친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그 친구가 무슨 말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앎과는 전혀다른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이 두 지식이 서로 대조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과 많은 수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계시를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진리들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와 같은 신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이 이 계시에 포함되고, 따라서 이는 도그마(dogma)로서 보존되어 진다.  신앙이란 이러한 도그마에 대하여 지성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가리킨다.  때때로 개신교의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자들과 구속사를 말하는 신학자들은 신적 본질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우주적 계획에 그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강조점의 이동일 뿐 계시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은 변함이 없다.
     루터는, 비록 그가 그 개념의 결과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논외로 하고서, 계시를 신의 숨은 본질에 대한 나타남이나 우주적 계획의 나타남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자비의 나타남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상벌 관계를 통해서 인간을 다루지 않고, 자비와 용서로써 인간을 대하신다.  그리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본질은 숨기워져 있으나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즉, 계시는 우리의 형이상학적인 지식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에 관한 지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지식이나, 동의나, 신앙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그 동의를 통해서 교리의 수락이 아닌 다른 종류의 결단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뢰이며, 피두시아(fiducia)이다.  멜랑히톤(Melanchthon)의 공식은 루터 사상의 이러한 측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루터처럼 과격하지는 않으나 이와 비슷한 이해를 칼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두 세기에 걸쳐 명제적인 계시 이해는 근본적인 파괴를 경험하였다. 즉,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나타남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으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계시 이해도 두 가지의 대안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1) 계시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 비합리적인 언어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거룩에 대한 신비적인 경험이다.  (2) 계시는 하나님과 개별적인 인간 사이의 나-너 관계의 만남이다.  이 둘은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현대의 신개혁주의 신학은 계시의 개념에 관한 활발한 논의로 특징지워 진다.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계시를 형이상학적인 진리들의 나타남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나-너 관계의 만남과 동일시 한다.  그러나 이 나-너 관계의 계시와 최종적인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과 나-너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다른 신학자들은 구속사의 모델로 되돌아 가서 계시를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동"으로 규정하며, 이 계시 속에 구원의 계획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성경의 근본적인 질문이 역사의 의미를 문의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걸리게 되며, 또한 그러한 역사철학이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현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불트만(Rudolf Bultmann)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는,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고, 성경의 케리그마(Kerygma)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비진정성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직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 역시 계시는 받아들여져야만 계시라고 하는 역설에 부딪히게 되었고, 다시 과거의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틸리히(Paul Tillich)는 계시를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기반과 의미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그 존재의 기반이 신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리함으로써 그는 계시의 명제적 이해를 반대하고,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제공하였으며, 나-너 모델을 회피한 것이다. 바르트(Karl Barth)는 이 모든 대안들이 계시를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격 언어와 본질 언어를 결합시키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개신교의 계시 이해는, 루터가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과, 그가 우리를 대하시는 성품을 아는 것과를 구분한 이래, 과거의 정통주의적인 이해에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루터 - 율법
1) 죄를 깨달은
2) 그리스도의 구원
3) 신자의 성화(칼빈 - 웨슬리)

성례 (Sacrament)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유효하게 만드는 기독교의 종교 의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성례전을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보이는 표지"라고 정의하였고, 이 정의는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어떠한 성례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나, 혹은 그 보이지 않는 실체와 보이는 표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이 두 가지의 문제는 로마 가톨리과 개신교를, 그리고 개신교의 각 교파 사이를 갈라놓는 주된 쟁점 중의 하나이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등 좀더 가톨릭적인 교회에서는 일곱 가지의 성례가 있다고 믿으며(세례, 견신례, 혼배, 성직안수, 고해, 성찬, 종부 등), 반면 개신교에서는 단지 두 개의 성례만을 인정한다(세례와 성찬).  이는 개신교가 이 두 가지의 성례만이 분명한 성경상의 근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례의 숫자 문제 외에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각의 성례관의 차이를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차이를 그렇게 일반화시켜서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다.  즉,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은 성례의 객관적인 능력을 중요시하고, 개신교는 주관적인 신앙을 중요시한다는 것이 일반론이지만, 로마 가톨릭도 영혼에 장애 요소가 있으면 성례가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루터도 그리스도가 그 만찬의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육체로서 계시다고 한다.  또한 로마 가톨릭이 성례가 효력을 발생하려면 적절하게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개신교에서도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가 성례의 적절한 시행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어떤 개신교 교회는 다른 개신교 교회들보다 로마 가톨릭 쪽에 더 가까웠으며, 로마 가톨릭 신학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일의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문제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의 성례 신학과 개신교의 성례 신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은 성례 그 자체가 성화시키는 은혜의 통로(수단)라고 본다.  사제직과 이 은혜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덕이 성례를 통하여 주입되었으나, 후에 활성화되기 이전까지는 잠자고 있다든가, 혹은 세례와, 견신례와, 성직안수의 경우에서처럼 일단 그 피수여자에게 그 덕이 전해지면 그것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라든가 하는 개념이가능하게 된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약의 비유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례의 은혜는 객관적 조건이 만족될 때에만이 주입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고, 신자가 능동적인 신앙에 의하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성례들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되고, 그것이 '구체화'된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들에 매일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신앙이 없으면 성례들은 전혀 효과를 발생하지 못한다.  칼빈은, 은혜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호의의 선물임을 명백히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에 따르면, 성례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과 동일하다.  성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선포하고, 인을 치지만, "그 자체로부터는 아무런 은혜가 나오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선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공표하고, 보여주고, 보증금이나 담보물처럼 그것들을 재가해 줄 뿐이다."
     성례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례도 하나님의 말씀처럼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됨을 의미한다고 하며, 이를 반대한 사람도 있지만, 성례는 로마 가톨릭적인 의미에서의 유일한 은혜의 전달 수단도 아니며, 또 그런 의미에서 효과적도 아닌 것이다.  개신교는, 주입되었거나 잠자고 있는 은혜라는 개념이나, 신자에게 주입된 지워질 수 없는 은혜와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며, 피수여자의 의지에 어떤 장애 요소만 없으면(즉, 피수여자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성례는 효과를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신교의 교리가 성레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라 하여 이를 반대한다.  개신교의 성례관은, 성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개신교에서는, 성례가 성경의 재가를 받은 말씀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는 필수적이지만, 성례들이 말씀의 유일한 형태는 아닌 것이다.  성례가 유일한 말씀의 형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기 위하여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성례관에 있어서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신앙과,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성찬 (Eucharist)
     "감사를 드린다"는 뜻의 헬라어에서 나온 말로서, "주의 만찬" 혹은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를 가리킨다.  신약에서 그런 뜻으로 쓰인 적은 없지만, 신약 시대 바로 직후부터 이 말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퀘이커나 구세군 등의 예외는 있지만, 성찬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권을 통털어서 예배와 실천의 중심 요소가 되어왔다.  그러나, 성찬의 해석은 늘 논쟁의 주제가 되었으며,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 각 파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성찬에 관한 이론과 그 실행 방법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 복잡하여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의 주된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빵과 포도주의 요소들은 사제의 성별하는 선언이 있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체로 기적적으로 변한다(화체설).  (2) 그 기적은 정당하게 안수받은 사제에 의하여 수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3) 미사 그 자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죄를 위한 유화(propitiatory)인 희생제사로 이해된다.  성찬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태도나, 평신도에게는 잔을 주지 않는 것 등도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개혁가들은 그리스도가 성찬에 임재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서로 이견을 가지지만, 위의 세 가지 이론을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그 반대는, 그들이 신앙이 은혜의 본성과 관련된 기본적 확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신앙이란,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기때문에 미사가 유화적 희생 제사일 수 없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사제의 행위에 의존할 수도 없으며, 은혜가 주입된 실체일 수도 없는 것이다.  전형적인 개신교적 대답이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 속에 들어있다:  "성찬은 하나님의 약속을 효과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인으로써 덧붙여진 것이며,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성찬에 관한 개혁가들의 서로 다른 견해는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쯔빙글리(Zwingli)의 관심은 로마 가톨릭의 희생으로서의 미사개념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찬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반면, 루터(Luther)는 로마 가톨릭을 극도로 반대하는 칼슈타트(Carlstadt)의 과격한 견해와 쯔빙글리의 "상징적" 해석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강조하였다.  문제가 되고 있었던 신학적 이슈는(개인적인 질투의 감정과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논저이 흐려지긴 했지만)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양상이고, 이 때문에 기독론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칼빈의 입장은 중재적인 입장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리스도는 성찬의 능력 가운데 신비적으로 임재하시지만, 그 성분들이 기적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사제의 기적적인 유화의 개념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찬에 관한 논의는 개신교 교파들의 연합 움직임과 로마 가톨릭의 문화 개방에 자극을 받아 다시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지만 불행하게도 기독교에 있어서의 의식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쟁점으로 남아 있다.

칼빈주의 5개 신조 (five points of Calvinism)

     칼빈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강조한 다섯 가지 신조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무조건적인 선택.
     2. 선택된 사람에 대한 제한 속죄.
     3. 재능과 장점에 있어 전적 타락.
     4. 불가항력적 은혜.
     5. 성도의 궁극적 구원.

칼빈 = 복음 = 율법
- 계약(covenant)의 관점에서 관계성을 확립

칼 바르트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
- 화해 - 성육신(계시)
- 복음의 이해를 넓게 했다.
                                                  언약궤  
칼빈의 5대교리
 
1.전적부패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렘17::9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요일1:8,10
 
2.무조건 선택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8-30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전1:1,2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4,5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3.제한속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요10:11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9:15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4.불가항력적 은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엡2:8,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롬8:30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6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5.성도의 궁극적 구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10:27-3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31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칼빈의 신학체계

칼빈의 신학은 체계적이다.이 점에 관한한 평생 비체계적 신학으로 살았던 루터와는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태만하여서는 안될 것으로 본다. 그럼 칼빈의 신학 체계를 어떻게 파악하여야 옳은 것인가?
 칼빈 자신의 저작을 읽는 것만큼 그의 체계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아마 없을 것이다.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제 1 장은 율법에 관하여 논술되었다. 이 부분에는 십계명 해설이 있다. 제 2 장에서는 신앙에 관하여 논술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도신조의 강해이다. 제 3 장에서는 기도에 관하여 논술되었는데 주기도가 논술되어있다.

1.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기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할 것.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인생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이 어디 있는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3:11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떼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영원히 죽지 아니 하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대한 사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인식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  외에 또 다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사람에게 바른 신앙심이 주어지는 동시에 무한한 평화와 기쁨과 위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요 14:1,27)

2.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가 다른 점
만일 인생에게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짐승보다 니을 것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며 또 누구든지 그렇게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이 임의로운 생각으로부터 생겨진 것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께서 친히 내신 것이어야 합니다.참된 종교의 출처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참된 종교란 일평생을 통하여 참되고 살아계신 약속의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믿음으로 봉사하는 일이며 거짓 종교는 인간적인 욕망과 허영심을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3.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될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롬 1:20,히 11:1) 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하고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며 섭리하고 계십니다.

4.사람에 관하여
   사람은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읍니다(창 1:27).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약속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람에 관하여 아무 것도 올바르게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말은 또 한번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한번 어머니의 태에서 육신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된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어있읍니다.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되는 것입니다.이러한 중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이 되어야 구원 받게   되며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사람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사람은 선택을 할만한 자유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사람을 죄의 노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여 죄를 짓는 행위만을 자유 의지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일은 사람이 임의로 행하는 자유 의지의 능력에 의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를 멀리하는 일도 또한 자유 의지의 행위라야 합니다. 타락한 심성을 가진 부패된 사람은 자유 의지의 능력마저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선에로의 자유 의지 이것만이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자유 의지란 사람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행해도 된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행할 수는 있으나 죄를 짓는 일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결국 참된 자유를 상실하고 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7.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증한 것과 파멸을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법자들로서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는 풍성하신 긍휼과 자비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능력을 강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며 우리의 그릇됨을 바르게 하시며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멸망으로부터 구원으로 ,악마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직접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에로 인도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 아래에 두시고 훈련시키시고 율법으로 하여금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셨다는것입니다.

8.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모든 의의 완전한 규준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 계명은"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우리의 형식적(외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순수하게 진실하게 믿어 하나님의 고귀하심을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하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첫째 계명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둘째 계명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과 어떻게 예배하여야 하며 공경해야 하는가에 관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 했읍니다(요 14:15). 셋째계명"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말에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요청에 합당하게 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넷째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넷째계명은 세가지 이유를가지고 있읍니다.
   1)제 칠일 안식일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적 의미를 주시기 위한 것 입니다.
   2)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칭종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날을 제정하시기를 원하셨읍니다.
   3)하나님은 고용인들에게도 안식일 하루를 쉬게 하셨읍니다.이것은 주종관계에 있어서 주인만 안식할 것이 아니라 종도 안식해야 한다는 원칙인 것입니다.

 * 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는가?*==>하나님께서 안식을 정하신 목적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또 하나는 인생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날 중에서 한 날을 지정하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받으시는 시간을 지정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이 인생들 때문이라 함은 안식일로 인하여 우리 인생들에게  유익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에 와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그 의의마저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대신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 가장 마지막 날로써 일곱째 날이며 주일은 일주일 중에 첫째날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교회의 권위나 어떤 한 사람의 제안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입니다(시118:24).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제정하신 것입니다.어떻게 일주일의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던 것이 첫째 날로 변경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1)예수님께서 직접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막2:28) 즉 안식일은 곧 "주의 날"인 것입니다."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날"입니다. 2)첫째날을 지키는 것은 사도들의 관례였읍니다.3)초대 교회에서는 주의 날을 대단히 소중히 여겼읍니다.
 다섯째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여기서는 우리의 부모님과 그리고 웃 어른에게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며 존경하며 감사하며 경애하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골3:20). 하나님은 출 20:12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여섯째계명"살인하지 말라"(출 20:13). 여섯째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며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사람의 의무입니다. 일곱째계명"간음하지 말찌니라"(출 20:14).이것은 음난한 생각과 행위를 금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순결을 보존하라는 명령입니다 (마5:28). 여덟째계명"도적질하지 말찌니라"(출 20:15).여기서는 남의 소유물을 빼앗는다든지 가로 챈다든지,몰래허락 없이,양해없이 임의로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읍니다.    아홉째계명"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 20:16). 여기서는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어떠한 말이나 비방이나 혹은 이웃을 해치는 어떠한 헛된 말이나 행동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20:26-28). 열째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출 20:17).이 계명은 모든 탐식을 물리치라는 명령입니다.탐욕이란 세상적 유혹을 불러 일으키는 욕심을 의미합니다.

9.율법의 요약
    율법의 요약은 두개의 조항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읍니다.이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입니다(눅10:26-28).첫째 조항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것이며 둘째 조항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것입니다.

10.율법만으로는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는가?
    율법에 명령되어 있는 것을 완전히 행치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선고하셨읍니다.모세는 하는과 땅을 불러서 증거를 삼고 율법을 공포하였으며(신30:19) 그 백성앞에 축복과 저주,생명과 사망을 두고 그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므로써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이에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나타내면 낼수록 우리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롬3:20,5:13). 율법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대신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11.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예비적 단계
  율법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조금도 어김없는 완전하신 공의로 보응하시는 분으로서 두터운 심판자로 나타나게 되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이며 예비적 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죄인)을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는 법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인 것입니다.

12.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알게 되는것
  긍휼이 풍성하시고 깊으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으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게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접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소경이  되어 있으며 몽매하여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총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오직 신앙인만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영접하고 있읍니다(엡3:17) 신앙자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깨닫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13.선택과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계획,작정)이 어디에 있기에 신자와 불신자가 그렇게 다른 것인가  이에 관하여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비유로 가르치고 있읍니다 (마 13:1-22) 하나님은 자기의 영원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후사를 정하히시고 말씀의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깨닫지도 못하며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고후 2:16).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읍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한 뜻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미천하고 조잡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사 55:8-9). 선택과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영역에속하여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자비하심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최상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롬 9:21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든 권이 없느냐" 라고 기록 되어 있읍니다.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모든 일을 행하심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엡 1:4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셨고 우리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14.참된 믿음이란 ?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즉 믿음의 정의는 약속에 의하여 확신되는 일입니다.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읍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하신 믿음의 대상이며 (행 4:12,24:2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요 3:16).

15.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볼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무식하고 얼마나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생애(일평생)의 모든 역량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과 독특하고도 귀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롬 8:16).

16.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입니다. 영생은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아는 것"입니다(요17:3).그런데 이일이 이루어 지려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서가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고 죄 사함을 받게되는 믿음의 의에 의하여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그러므로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17.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며 신앙으로 말미암아 성화 되는 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증인이 되시고 자기의 의를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셨읍니다.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에 따라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따라성화되어 가지 않는 자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 뿐만아니라 성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30).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롬3:31,갈5:16).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의 부패로부터 성결케 되며 심령이 온유하게 되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계시 = 성경 - 요한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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