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성결대학원 특강 임시강의안 영성과 현대신학/안명준
이      름: 안명준
홈페이지: http://members.tripod.co.kr/amj5
작성일자: 2005.08.22 - 14:24
              영성과 현대신학
                            안명준교수(평택대학교)

I. 서론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정의의 어려움
Houston, Spirituality is The state of deep relationship to God.

래리 리차즈, “영성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는 것이다. 영성은 또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영성이란 정의가 모호하기에 경건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II. 현대 신학에서 영성 이해

A. 현대 신학자들의 영성 이해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leiermacher)의 영성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기존의 정통적인 신학연구 방법을 떠나 신학이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신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론적 학문으로 말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의 첫 장을 열렸다.
    그의 영성의 의미는 절대의존 감정으로 이해된다. 영성이란 무한자를 의식하는 행위이다. 객관적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체험한 내재적 영성이다. 성령의 내주에 의한 크리스챤의 삶의 모습이 아니다.


신학의 중심사상: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이다.
        (das schlechthinnige Abhangigkeitsgefühl)
             (sense of absolute dependence)
    데까르트가 정신을 칸트가 실천이성을 헤겔이 절대정신을 강조한 것처럼 그는 감    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상적 배경
    낭만주의- 낭만주의의 주제는 “무한자가 유한자 안에 있다는 개념 - 자연과 인간역사는 함께 볼 때 무한한 생명의 형태 혹은 현현으로 생각되었다(te idea of the infinite in the finite. . . in which nature and human history alike are conceived synoptically as forms or manifestations of one infinite Life." 슐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의 이 주제에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의 신학이 내재적으로 흘렀고, 범신론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의 하나님의 내재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하나님의 초월성과 초월한 하나님의 인격성에 강조를 하지 못하여 이런 오해를 받았다.
     1796년 부터 1802년 까지 베를린의 차리테 병원에 목사로 있는 동안 낭만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배웠다. 이때 그는 인간의 감정과 직관(Gefühl und Anschauung),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이점에 있어서 자신의 해석학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

대표적인 저서:
 Reden über die Religion, 종교론, 1799 - 종교가 무엇이냐? 종교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고자 함.
    In the very act, you must undestand the production of light and heat in a soul
     surrendered to the Universe. Otherwise you learn nothing of religion, and it goes     with you learn nothing of religion. . . . I ask, therefore, that you turn from     everything usually reckoned relgion, and fix your regard on the inward         emotions and dispositions.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p.     18.)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이나, 양자의 혼합도 아니다. 종교는 교의도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와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 이다,  종교란 절대의존 감정이다. 참된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감각이며 맛이다 (True religion is sense and taste for the Infinite. Ibid., p. 39)

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dsa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n
 Susammenhang dargestellt, 1821, The Christian Faith, Edinburgh: T. & T. Clark, 1989, 신앙론,- 기독교가 무엇인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필적, 현대 신학의 기초가 된 걸작품. 칸트의 지상명령에 반기를 들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존귀성을 저하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자유인은 도덕법아래 있지 않다고 한다. 도덕은 선한 의지에서 출발하지 않고 심리적 힘으로서의 실제 인간 의지에서 출발한다. 즉 무한자와 접촉을 통하여, 절대의존 감정에 의해 해결된다고 한다. 이 책은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과 토대에 관한 연구이다. 현대 신학자들의 필수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신학 방법론
     인간의 경험(감정)을 토대로 체계화 했다. 직관을 통하여 신학의 접근 방법을 만들    었다. 중요한 사상은 유한과 무한의 차이가 아닌 융합시키는 것이었다.(the
     immediate consciousness of the universal being of all finite things in and         through the infinite, 종교의 참된 본질이 무한자 안에서 그를 통하여 유한한 모든     우주의 존재를 직접적    으로 의식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은 3기능-생각(thought, 철학적 혹은 교리적에 연관), 의지(will, 윤리와     관련), 느낌(feeling, 감정에 관련)-이 있다고 한다.
    종교는 감정의 장소에서 발견된다.
    그는 종교론에서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    의하고, 신앙론에서는  느끼는 것 또는 직접적인 자기 의식의 수식(modification), 신    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으로(Gefühl der schlechthinnige Abhangigkeit) 정의. 여기    서 감정은(Gefühl) 객관적 이해의 양식, 정서적 감식의 연쇄, 영적인 것의 각성이라    고 볼 수 있다.     감정은 단순한 인간 정서가 아니라 초주관적 실재에 대한 파악이다.
    신을 이 세계밖에, 이 세계 넘어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나의 단순 존재로 생각하    는 통속적인 개념은 종교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를     애기하는 표현방식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이 전적으로 들어맞는 경우는 거의     없고 항상 부적절할 뿐이다. . . . 종교의 참 본질은 이러한 개념이나 그 밖의         다른 개념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 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서     신을 발견하면서 그 신성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Reden         über die Religion, Sammtliche Werke, Berlin, 1843, i. 264)
    종교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 종교 연구는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인 자신, 즉 그    의 종교적인 감정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것.
    신조나 교의 또는 성경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 혹은 인간의 자기 의식을 신    학의 토대가 되었다.
    This exposition is based entirely on the inner experience of the believer; its only     purpose is to describe and elucidate that experience. (The Christian Faith, p.     428).
    그는 현대의 상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관을 수용    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재 진술한 최초의 신학자. 인간의 경험을 신    학의 주된 자료로 사용. 인간 감정에 나타난 자기 의식과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
    그의 종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을 연상케 한다.
    Piety is the essence of religion (form), but it always takes shape in some
    specific religious tradition (matter). 경건(종교적 감정)은 종교의 본질(형상)이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종교적 전통(질료)으로 모양을 갖는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영성의 문제점

영성을 지나치게 인간의 주관적, 체험적 내재적 측면으로 강조한 것
말씀과 성령의 활동은 약화되고 오직 맛과 접촉과 직관으로 일관된 방법은
현대인의 감성적 요구와 맞아 떨어져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훼손시킬 수 있다.
그의 영성은 말씀에 근거한 계시적 영성이 아닌 인간학적인 영성이다.
영성의 주체가 삼위 하나님임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칼 바르트의 영성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인간에게 찾아 오신다.
따라서 내재적인 영성보다는 철저하게 초월적 영성이다.
여기서 초월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초월적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세계에서 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과 관계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영성의 근원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오는 영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통한
나타나는 영성이다.
인간 스스로 이룬 영성이 아닌 인간은 할 수 없다라는 인식 속에서
즉 변증법적 역설을 통한 초월적 전적 타자 하나님의 영성이다.

바르트의 영성의 문제점
바르트는 성령의 지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관계를 말하기 보다는 초월적 타자적 영성을 말하며, 성육신을 통하여 영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내주를 통한 성화의 삶으로서 영성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

폴 틸리히의 영성

존재의 근거 안에서의 영성을 말한다. 그는 존재의 구성 요소들이 통일되어 있어서 모호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영성으로 주장한다. 이런 삶은 자기 초월의 상태 즉 황홀경이며, 이것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한다. 즉 성령이 인간의 영을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탈아의 상태를 믿음으로 보고, 믿음은 사랑을 구현한다고 본다.

유장환에 따르면 틸리히의 영성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1. 영성은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 문화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역동성과 형식의 통일을 의미한다.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통일을 의미한다. 즉 삶의 총체성으로서 영성이다. 이원성을 극복하고 삶의 모든 영역의 통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분열된 상태인 인간 실존의 소외의(죄) 극복을 의미한다. 새로운 존재에(그리스도서의 예수 안에 나타남) 대한 참여이다.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3.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분열된 상태인 인간의 영의 삶의 모호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모호성의 극복은 현존하는 하나님 즉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영성은 모호하지 않은 삶이며,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 그는 성령을 신의 삶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직접적인, 무제한적인  상징으로 이해한다. 성령이란 인간의 영에 현존하는 하나님으로 본다. 결국 그의 신학에서 영성은 성령의 의한 자기 초월적 탈아적 영성이다.

틸리히의 영성의 문제점
틸리히의 영성은 말씀과 성령에 의한 변화를 통한 삶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의미가 강하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성을 말하지만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 말하며, 참된 영적 변화의 성격이 아닌 철학적인 심리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라는 그의 구호는 영적 실재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가 이원성을 반대하고 삶의 총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진정한 모든 존재의 영역의 통합이란 성령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됨으로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몰트만의 영성

영성이란 하나의 영적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삶과 하나님의 영과의 살아 있는 교제를 말한다.

영성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력내지 활동력으로 말한다. 그것은 삶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어떤 영적 상태 혹은 영혼의 영성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물질적, 사회적 현실 속에 실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내지 생명의 힘으로 파악한다. 5. 생명의 영성으로 총체적 영성으로 이해한다.
희망의 영성이다. 11. 약속으로 나타나는 영성이다.
정치신학적 영성이다. 11. 메시아적 나라를 역사의 현실 속에 앞당기는 것이다.

몰트만의 영성의 문제점
 내면적이며 초월적인 특성이 도외시 되었으며, 지나치게 외향적인 역동성에 강조가 강하며,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관점에 지나친 경향이 있다. 신앙의 삶, 기도의 삶이 무시되고 있다. 그의 영성은 현재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영성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인 면이 약하다.


B. 현대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의 영성

나우웬의 영성


나우웬이 제시하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진정한 길에서 그의 영성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나우웬이 제시하는 우리의 길 '영성에의 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대답은 아마 "성공을 향해서"라는 대답일 것이다. 현대의 문화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를 희망하고, 그것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그 상승에의 욕구가 과연 인생의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은 바쁘기 때문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한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앞의 현실만을 바라보며 바쁘게 살아간다.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채, 저 높은 언덕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달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상승에의 길...'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걷고 있는 삶의 길이다.
하지만, 인간이 걸어가야 할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 주님은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방황하는 크리스천에게 낮은 곳을 향해 달리라고 말씀하신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거꾸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는 분수의 흐름을 따르지 말고, 순리에 따라 낮은 곳으로 고요히 흐르는 물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크리스천이 걸어가야 할, 본래의 인간이 걸어갔어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 걸어가야 할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영성에의 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소망을 마음에 품고, 따뜻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길 잃은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의 품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나우웬은 길 잃은 우리에게 참된 '영성에의 길'로 가는 길목을 구체적으로 4가지의 길 즉, '능력의 길', '평안의 길' , '기다림의 길', '삶과 죽음의 길'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나우웬의 '능력의 길'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마적인 권력에 대한 해결 방식으로 전적인 무력함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를 두거나, 부러워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바로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오기를 원하신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안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한다면 연약함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나우웬은 진정한 능력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힘을 통한 능력에서 무력함을 통한 능력으로 옮겨 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두려움 많고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상처받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좌우에서, 여기저기서, 예나 지금이나 제공하고 있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이런 권력들은 우리로 하여금 작은 꼭두각시로 죽을 때까지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권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향해 다가가며 무력함으로 세례를 받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마음으로 빠져들어 간다."(38p)
나우웬의 이러한 '의외'의 주장은 평안의 길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평안의 길'에서 나우웬이 우리에게 평안의 열쇠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지체 장애자 '아담'이다. 아담은 말을 할 수도 없고, 혼자서는 옷을 입거나 벗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도움이 없이는 혼자서 걷거나 먹을 수 없는 25세의 청년이다. 아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단지 가끔 눈맞춤만 할 수 있다. 그는 심한 간질로 고통받고 있으며, 대량의 약물치료에도 불구하고 '대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거의 없다.
나우웬은 그러한 아담을 돌보면서 차츰 그와 함께 사고나,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의사소통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지식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서 말미암는 사랑이 아닌, 인간성을 공유함으로써 말미암는 사랑의 관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평안은 본질적으로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평안은 무엇보다 존재의 예술이라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노력한다.
"나의 과거의 삶 대부분은, 나의 가치는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확고히 했다. 학위와 상을 받았고, 출세도 했다. 그렇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약간의 성공, 약간의 명예, 약간의 권력밖에 없는 외로운 정상을 향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나는 느리고 무거운 숨을 내쉬는 아담 곁에 앉아 있을 때, 그 여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52p)
진정한 평안은 마음에 속한다는, 현대 문화와 사회에서는 너무 혁신적일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 나우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대한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영적인 삶이란 생물학적, 정서적, 지적 삶의 발달 다음에 가장 늦게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담과 함께 살면서 또 그와 함께한 경험을 숙고해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영은 우리가 걷거나 느끼거나 말할 수 있기 훨씬 전에 우리에게 다가오셨음을 깨달았다."(55p)
영성에의 길은 또 기다림의 길이기도 하다. 나우웬은 두가지 측면에서의 기다림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면서 진정한 기다림의 삶을 통한 영성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을 생각할 때 기다림은 한층 더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가장 만연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자신과는 다를 수 있는 타인을 두려워하고, 내면의 감정이나 불편한 감정을 두려워하고, 또한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우리에게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아마도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파괴적인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리라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71p)
이 두려움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나우웬은 크리스천의 기다림은 매우 '능동적인'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기다림은 도착하지 않는 버스를 짜증 섞인 감정으로 기다리는, 그러한 수동적인 기다림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리가 씨앗이 땅에 심겼으며 무언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기다린다면, 이것은 우리의 기다리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능동적인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능동적인 기다림과 수동적인 기다림은 '믿음'의 문제인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의 영성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가장 깊은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91p)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막바지 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서도 나우웬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나타난 역설의 진리를 우리의 마음 속에 심으며 놀라운 해답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특히 당신의 죽음을, 어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르게 하는 길 이상으로 보셨다. 그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떤 것에 이르는 통로였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내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나는 죽기 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까?' 이것이 아니다. 참된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내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풍성한 열매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 삶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내 죽음이 그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이 내게도 유효한 것임을 기꺼이 인정할 때에만 대답할 수 있다."(98p)
영적인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것이고, 이러한 열매 맺음은 성공이나 생산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우웬은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게 되는 우리의 마지막 통로이자 우리의 출애굽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서 그 길을 가셨고, 우리도 일생동안 동일한 길을 가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부르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이다."(118p)

 나우엔의 영성의 문제점

문제점으로는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적 태도가 약하다. 세상에 대한 변혁적인 세계관이 약하다. 지나친 포기와 현실 도피적인 면이 보인다. 참된 영성이라면 현실과 문화에 대한 성경적인 적극성도 있어야 한다. 일반은총의 영역을 말씀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약하게 보일수 있다.
  
Thomas Merton의 영성

강경림교수는 머톤의 영성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수도원적인 관상기도를 생활화하였다. 기도를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사고를 훈련시키는 자기 성찰의 기도(reflexive prayer)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며 대화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진리와 성령으로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주체인 나의 생각과 욕망을 간구하는 것이라 한다. 두 번째는 묵상기도(meditative prayer or meditation)인데 이 기도는 단절로부터 시작한다
고 한다. 자기의 이상이나 주장, 심지어 자기 구원조차도 단절하며, 모든 세 상사와 단절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으려는 적극적인 마음 자세로 묵상하는 것이라 한다. 세 번째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or contemplation)로서 완전히 자신을 비우고 정화하며 하나님의 은총의 현존과 성령의 뜻과 그리스도의 의지에 완전히 의지하여 그 분의 뜻과 일치하려는 기다림의 기도라고 한다. 기도자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살아서 말씀해 주시는 것을 빈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한다.
 
머톤의 영성의 문제점

객관적인 말씀에 근거한 기도보다는 주관적 신비적 체험적 기도의 내용을 강조한다. 이런 기도는 잘못된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다.

  
III. 잘못된 영성신학을 만드는 현대 사상들

종교 다원주의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비에 대한 종교적 이해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오직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의한 영성을 부인하다. 타종교의 메시아적 영성을 주    장한다.

뉴에이지 운동
  인도종교와 철학이 혼합된 사상으로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단 요가, 명상이나 기체조등이다. 혼합주의적 영성.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를 통한 교회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의 상실로 인해 각 개인의 체험과 주장을 공동체의 검증없이 강조한다. 각자의 독특한 신비적, 종교적 체험은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IV. 잘못된 영성이란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 영성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대한 혼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영성의 완성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나친 신비주의적 혼합주의 영성
    현실을 도피하여 지나치게 신비주의 추구하는 영성이란 비성경적이다. 이웃에 관심    과 사랑 그리고 공동체의 참여를 통하여 진정한 경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고에 의한 혼합주의. 범신론적 영성으로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한    다. 범아일여 사상.

지나친 금욕주의적 영성
    인간은 영혼과 몸을 가진 전인적 존재임을 망각하고 지나치게 몸을 학대하여 내면    을 세계를 훈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그의      선물이다.
이원론적 영성
    자신의 세계와 세상이 분리되어 일반영역을 무시하고 도피하는 것은 잘못된 영성이    다. 플라톤적이며, 영지주의적 신비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V. 올바른 영성을 위하여

올바른 영성이란 성경에 근거한 영성이다. 최근 김정우 교수는 성경적 영성에 대하여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올바른 영성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

올바른 영성은 삼위일체 안에서 삶이다.
    성부 하나님, 죄의 용서와 영생의 선물을 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아바 아버지    로 부를 수 있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성경중심과 올바른 성경해석에 근거
    영성의 바른 길은 성경의해서 인도된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바로 성경의 정당한 해석을 통하여 타당성을 얻으며, 여기에서 진정한 영성이 나온    다.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강조한다. 영성이 좋다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충만하다라고 보    아야 한다.
    롬 8:29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올바른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
    회개기도와 성령의 역사에 귀 기울임
올바른  영성은 성도의 교재와 관련된다.
     행 2: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성경적 세계관을 제공
    니버가 말한 문화의 변혁자로서 그리스도를 제시
    스킬더가 말한 문화의 열쇠로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속과 종말로 이어지는 세계관을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