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차종순교수
이      름: 관리자
작성일자: 2002.05.01 - 10:58
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

차 종 순
(호남신학대학교)

I
1984년 개신교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이래 100여년이 지난 이즈음, 한국은 조용한 은
둔의 나라에서 전세계를 품에 안은 한 낮의 태양과 같은 나라로 떠 올랐다. 대살로니가 사람들
을 바울(Paul)과 실라(Sillas)를 가리켜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행17:6)이라고 했다면 한국은
천하를 놀라게 하는 나라로 발전하였다.
개신교의 전래를 전후해서 구미 선진열강들의 이권쟁탈장이 된 한국에는 서구문명이 전달되
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통치를 거치는 동안에 어쩔 수 없는 문명화(서구화)의 길에 섰었다. 이
기간동안에 한국의 역사와 정신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어릴때부터 세뇌당하곤 하였다. 더우기 6.25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은 서구화(미국화)가 비뚤어지게 유행하게 됨으로써 서구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따르는 비정상적인 흐름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이후로 한국에는 각 분야에서 한국의 재래적인, 토속적인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
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해서, 한국학에 대한 연구활동이 일어 났으며, 1980년대 부터는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장호뢰 신학교 동문회가 "개혁신앙과 민족사"라는
대주제를 중심으로 우리의 뿌리와 현재적 위치를 반성해 보는 것은 한국교회사의 한 장을 차지
할 만큼의 의의가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본 패널토의에서는 종교개혁 신앙의 원리와 요소들을
대표적인 개혁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종합하면서, 이러한 전통에서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가
참으로 개혁적 원리에 충실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충실하고 있는지 민족사적 한국교회사 맥락에
서 반성함으로써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설정해 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릴 것은, 여기에서 밝히는 선교사들의 이야기에는 지금까지 말하기를
꺼려하던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때로는 비난도 하고
공격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에 대해서 오해를 갖고 있거나, 선교사
들의 공로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히면서 독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II
종교개혁은 한 젊은 청년, 루터(당시 22세)의 위대한 추구,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심하
는 한 청년의 고뇌로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가난을 이기고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영예스
러운 기회도 애타는 심정에 만족을 주지 못하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의 어거스틴파 수도
원에 들어가서 후기 유명론적 구원제도에 따라 경건과 고행으로 평안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 내가 누구건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만큼 거룩해 질 수 있겠는가?"(Oh!
whom thou wilt become holy and fit to obtain the grace of God)라는 확신이, 즉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도 말하기를, "수도승이 수도원의 생활로 하늘에 갈 수 있다고 보장한다면 나 자신은 분명
히 하늘에 있을 것이고 동료 수도승들이 나를 보장해 줄 것이다"고 했다. 루터는 자신의 고행과
경건생활을 보면서 수도원의 선배, 스승들이 객관적으로 보장해 주는 구원의 확신보다는 본인이
스스로 말씀을 읽으며-주로시편, 로마서, 사도신경-하나님의 의(롬1:17)는 죄인을 처벌하시는데
있지 않고, 신앙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아는 주관적 확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후기 중세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이나, 지적인 비평에서 보다는 개인
의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체험 등에서 시작되었다. 즉 객관적인 구원의 확인보
다는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지적인 동
의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투신(Throw oneself upon God)이다. 교리적이
거나 신조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이며 통전적인 만남을 의미했다. 종교개
혁자들에게는 -최소한 루터와 칼빈- 이러한 신앙(믿음), 말씀을 근거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흐름이 밑바닥에 있었다. 틸리히(Paul tillich)는 이것을 종교개혁의 실질원리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인(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와 형식 원리(성서)라고 구별해
말했다.
그러나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 제 1 대 개혁자들의 사후로 이어지는 "정통주의"시대는 이들이
원하지 않았던 이론화, 신조화, 체계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해서 제 1 대 개혁자들의 신앙과 이론을 체계화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신앙과 신학이 경직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개혁자들의 본래적인 정신
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조용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개혁자들의 지적인 면보다는 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치우치게 되었다. 결국에는 개혁자들의 주장인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만남보다는 내적인, 정적인 만남을 고집한 나머지 비성서적인 경향에 빠
져서 성서보다는 체험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지자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과 성서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
고 알 수 있도록 성서의 내용과 신앙을 간략하면서도 체계적인 형식으로 정리하려고 하는 합리
주의가 대두하였다. 합리주의는 신앙을 단순하게 요약하기 위해서 체계화를 서둘렀으며, 그렇기
위해서는 합리적 즉 이성적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이성주의는 곧바로 계몽주
의로 발전해서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종교, 진리, 성서를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금 정통주
의의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환을 막아 보려고 로망주의가 대두하여 신앙의 지적인 면과 정적인 면을 동시에 하
나로 합쳐서 충족시키려 했으나, 이들의 시도도 삶의 정황적인 현실차원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대두와 성서에 대한 비평주의적 태도,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성서
에 대한 주지주의적인 비판에 맞서서 신앙과 신학을 지켜 보겠다는 신학운동이 미국의 보수 주
의자 가운데서 근본주의 신학운동이란 이름으로 전개됐으며, 이들의 운동은 당시 미국을 휩쓸었
던 무디(D. L. Moody)적인 신앙부흥운동과 결합함으로써 다분히 탈속적이면서도 종말적인 현실
관에서 선교에 대한 정열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같은 시대적 신앙적 분위기에서 한국에 건너올 미국선교사들은 보수주의적 신앙에서 선
교에 임했다.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있었는가"라는 주제는 많은 논란을 거쳐야 할
사항이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기 보다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지만, 이들의 신앙관과 가르침에는 근본주의적 면모가 분명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서
소위 "보수적 복음주의"라는 용어 속에는 광의적으로 근본주의적 신학사상과 칼빈주의적 청교
도 사상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겠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좋은 증거로는 당시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회의 총무로 있었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
다.

나라를 개방한 이래 처음 25년간 전형적 선교사의 모습을 퓨리턴 형의 사람들이었
다. 이 퓨리턴 형의 선교사는 안식일을 지키되 우리 뉴 잉글랜드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했던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 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 이러한 선교사들은 강력
하게 보수주의적이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 한 전천년의 견해는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 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 한 이단이라고 생각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는 현대적 견해를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특별히
장로교 선교단에서 그 앞길이 험준하다.

북장로교는 최소한 이러한 기준에서 선교사를 선발했을 것이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
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829년에 개교해서 한 때 보수주
의 신학의 요람이 됐었고 많은 신학자를 배출했던 맥코믹(McComick) 신학교에서 공부한 마펫
(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신학생 때에 무디의 강력한 감화와 영향력을 받은 "학생자원
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가해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한국에 처
음 왔을 때(1890)를 상기하면서,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예배에서 회상하였다. 블레어(Blair:방의량)는 마펫을 회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은 그의 매우 소중하고,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특징을 주었다."고
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마펫은 "정당한 의미의 근본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관에 있었던 마펫은,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찌라도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자..... 다른 복음
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라고 한국교회에게 당부하였다.
보수적 근본주의 특성가운데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
로 보지 않는 편협성이 있었는데, 이러한 편협성을 마펫을 위시한 상당수의 재한 미국선교사들
에게서 발견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신학
의 갈 길이다고 쳔명한 박형룡 박사의 말은, 결국 한국신학의 편협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러한
편협성에서 오는 신학활동의 제한, 보수적 교리주의 팽배 등은 결국 교파의 분열이란 아픔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만 하더라도 1960년대부터, 합동과 분리된 뒤로부터,
신학활동의 자유가 점진적으로 보장되면서 목회자 상호간의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
끼게 됨으로서, 칼빈(John Calvin)이 목표로 세웠던 신학적-목회자(Theological minister)의 상
을 구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밝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앞으로를 제시해야 한다.
첫째, 한국의 신앙과 신학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정통적, 전통적맥락과 전승에 바르게 서서
한국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형성했는가? 이종성 박사는 한국의 신학을 수입신학이라고 단정하
면서 서구의 신학을 너무나도 쉽게 유행시키는 잘못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의 신학
은 신학교육의 짧은 역사와(장로회 신학교가 1901년에 세워졌다고 하나, 정상적인 신학활동은
1955-1960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한 신학적 축적의 빈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신학적 준비가 있었는가? 신학적 준비란 신학을 할 수 있는 어학적 준비를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서구 신학은 고전어에 대한 습득과 각종 자료정리, 번역, 출판 등으로 자국어로 신학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마련해 놓았다. 또한 신학의 각 분야에 걸친 교수진의 부족에서 오는
교육의 결핍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와 신학간의 끊임없는 대화로 원만
한 상호보완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학의 준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입
신학의 단계에서 벗어나 한국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1960-70년대에 시도된 한국
적 토착화의 신학은 이종성 박사의 지적대로 어설픈 한국적 신비주의의 무당종교, 혹은 혼합주
의에 빠지고 말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의 신학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해서, 고려말의 3은의 충절과 조선
조 사육신의 절개, 영남의 퇴계 이황, 호남의 고봉 기대승, 경기의 율곡 이이 등의 3대 학풍과,
정약용의 실사구시의 실학사상과, 매천 황현, 민영환 등의 민족주의적 정신, 서재필, 안창호 등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꿈을 이어 받아서, '한국적 선비 정신을 살리는 신학'의 정립"을 앞으로는
한국적 신학으로 세워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각 신학교마다 한국학을
가르쳐서 기독교 정통, 전통 신학과 결합한 한국적 정통신학을 수립해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한
다 하더라도 앞으로 20-30년 후에 그 결과가 나타나겠지만, 현재적으로 많은 신학자, 목회자
들이 한국적 정통신학의 수립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밝은 앞날을 기대해 본다.
개신교의 전통은 항상 개혁하는 교회, 항상 개혁하는 신앙, 항상 개혁하는 신학일찐데, 우리는
선교사들의 전래 신학을, 그것도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일부 지지자들이 이룩한 신학을, 지상의
목표로 보수하던 우둔함에서 벗어나서 한국적인 기독교 신학의 정립을 세울 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적(민족주의적) 기독교 신학, 신앙의 수립은 종교 개혁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므로,
지금부터는 종교개혁의 민족주의적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